2) 노자 예제(例題)-7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利 無之以爲用(11장)
輻(복): 바퀴 살.
轂(곡): 바퀴 살이 모이는 통.
埏埴(선식, 연치) : 찰흙을 이기다.
鑿戶(착호) : 門을 뚫다.
牖(유) : 窓門.
이 장도 널리 알려진 장입니다. 먼저 대강의 뜻을 풀어서 이야기하지요.
서른 개의 바퀴 살이 모이는 바퀴 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하여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약간의 해석상의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노자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轂)은 바퀴 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을 끼웁니다. 곡에 축(軸)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자명한 사실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이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찻잔 한 개를 고를 때 무엇을 보고 고르지요? 모양이나 질감, 색상, 무늬 등을 보고 고릅니다. 말하자면 유(有)를 보고 고르는 셈이지요.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저변을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商品)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소모(消耗)와 비효용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자'의 이 장을 읽으면서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았던 '환희의 동상'을 떠올립니다. 최초로 금광(金鑛)을 발견한 조지 헤리슨이 금광석을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동상입니다.
남아프리카가 캐낸 것이 전 세계의 금과 다이아몬드의 70%라는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그 환희의 크기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상을 지나 바로 골드리프시티 광산의 지하갱도에서 그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고는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렵기 짝이 없는 지하 3천3백m, 숨막힐 듯한 갱도에서 섭씨 60도의 고열 속에서 금광석을 캐고 있는 흑인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하갱도의 흑인 소년과 '환희의 동상'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처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상이 '노자'를 매우 천박하게 읽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모르지 않습니다. 현학(玄學)을 사회학(社會學)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가치란 바로 소유(所有)와 소비(消費)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리고 이 유(有)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치열한 실천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으로부터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예찬은 자칫 사회의 억압구조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진 장삼 한 벌과 볼펜 두 자루만 남기고 입적하신 노스님의 모습은 무소유에 대한 무언의 설법입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소유의 탑을 쌓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설법은 매우 중요한 각성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소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종단의 거대한 소유(所有)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無所有)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유(所有)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無), 숨겨진 억압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話頭)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人間像)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 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뜨이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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