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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은 무엇일까”

신영복 고전강독 <90> 제8강 노자(老子)-10

2) 노자 예제(例題)-6

이야기를 바꾸어서 질문을 하나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무엇입니까?

얼른 대답을 못하지요?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61장)
대국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천하가 만나는 곳이 되며, 모든 가능성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곧 우리의 당면한 문제의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변혁운동의 문제점은 전체 역량이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열, 분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당면한 과제는 단연 연대(連帶)문제라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사회교육원 노동대학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만 나는 연대(連帶)의 이유를 ‘노자’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노자’의 정치론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는 의미에서 그 강의안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강독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노자’의 생환(生還)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변혁운동에 있어서 연대문제가 당면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혁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체 변혁 역량이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중심 역량인 노동운동 역량 역시 취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량의 강약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입니다. 양적(量的) 기준과 질적(質的) 기준이 그것입니다.

양적 역량이란 것은 수량적 개념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질적 역량입니다.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組織性)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조직 역량은 비록 그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엄청난 증폭(增幅)의 핵(核)이 됩니다. 따라서 질적 역량은 역량의 조직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의 단결과 결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질적 문제를 조직 내부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지요.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두는 경우에는 2가지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하나는 조직이 경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 자체가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존재론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기본 구조에 있어서 자본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에 내거는 기치에 관계없이 이러한 방식은 근대사회의 틀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조직을 최우선 단위로 하는 존재론적 논리는 필연적으로 좌우편향을 낳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량주의적 경향으로 후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모험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존재론적 논리는 결국 강철(鋼鐵)에 대항하여 또 하나의 강철을 만들어 내는 모순입니다. ‘노자’의 전략전술과는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적 역량을 조직 내부문제로 가둘 경우에 나타나는 두 번째의 문제는 그러한 질적 역량은 양적 증폭의 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경우에는 연대문제가 성급한 견인론(牽引論)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한 집단이기주의가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며 더러는 선진성(先進性)이 대중성(大衆性)을 밀어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 경향입니다. 개량주의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우편향(右偏向)입니다.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적이라는 모순을 안게 됩니다. 역량이 취약하고 조건이 미성숙한 단계에서 숱하게 경험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당면 과제인 연대문제가 내부의 조직문제로 후퇴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현 단계 우리 사회의 역량이 그 양적 측면에서나 질적 측면에서 매우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상황에 있어서도 수세적 국면으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실천적 과제가 바로 연대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연대는 물론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실천적으로는 약한 자의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방법론과 철학이 바로 ‘노자’이지요. 노자(老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설파합니다. 노자에 있어서 최선은 최강(最强)의 의미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노자사상은 기본적으로 민초(民草)들의 전략전술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귀중한 담론을 노자에서 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방법론이 노자사상입니다. 약한 물이 강고한 것을 이기는 힘을 노자는 무엇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물의 특성에서 찾습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특성 때문에 물은 반드시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고 그리고 수많은 물들이 모이기 때문에 결국 바다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물의 철학은 한마디로 하방지향(下方指向)의 연대성에 있습니다. 모든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바다’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뜻이지요.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하방지향의 연대는 그 아픔에 다가가서 그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그야말로 열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도 많지만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기준의 하나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오만하다거나 강자에게 비굴하면서 약자에게 관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연대의 원칙은 낮은 곳, 약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처럼.

강한 것,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연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과 타협입니다. 결국 흡수되거나 복속(服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연대해야 할 방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안으로는 대기업 노동현장보다는 중소의 열악한 현장과 연대하고,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밖으로는 역량이 취약한 부문과 연대해야 합니다. 비조직 사회운동부문, 농민, 실업자, 빈민, 소시민 등과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물처럼 하방지향적 연대에 충실해야 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글은 연대문제에 관한 강의안의 일부입니다. 연대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방금 살펴본 ‘노자의 물’ 외에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목표와 과정’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가치실현의 문제’ ‘화동(和同)과 공존(共存)’에 관한 논의들을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경제학 강좌’에서 다루는 게 옳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문법적으로 선(善)을 형용사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부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地) 연(淵) 인(仁) 신(信) 치(治) 능(能) 시(時)를 동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문법 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전 독법의 요체는 일관성입니다. 전체의 의미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시도하고 있듯이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민초들의 연대론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전위조직의 과학적 실천방법에 관한 강령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에 합의하는 현실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나 과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與善仁의 與와 仁은 인간관계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하든 그 인간관계를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言善信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正善治의 正은 政입니다. 바로 잡는 것 즉 개혁,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治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은 웅덩이(科)를 만나면 건너뛰는 법이 없고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나아가는 것이지요(盈科後進).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방식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科學的) 방법(方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唯不爭 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노자’를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이유와 그것의 현대적 의미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무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남대문 시장에 갔었어요. 거기 좌판에 피켓을 꽂아 두었는데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싸다고 물로 보지마!”라고 썼습니다. 파는 것이 ‘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T셔츠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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