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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를 아름답다고 하나 사실은 추한 것”

신영복 고전강독 <87> 제8강 노자(老子)-7

2) 노자 예제(例題)-3

다음 제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장도 널리 읽히는 장이며 또 번역상 논란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원문을 보지요.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제2장)爲美(위미) : 美라고 한다(謂). 또는 僞美 즉 거짓 아름다움.
惡(악, 오) : 나쁘다. 추하다. 증오하다.
爲善(위선) : 이 경우의 爲 역시 謂 또는 僞로 읽을 수 있다.
無爲之事(무위지사) : 함이 없음. 또는 꾸밈없음(無僞)
作(작) : 자라다. 만들다.
辭(사) : 말하다. 거들다. 자랑하다.
生而不有(생이불유) :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는다. 없는 듯이 살다.
恃(시) : 기대다. 의존하다.
不去(불거) : 사라지지 않다.
‘爲而不志也’(帛書 甲本)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반되는 주를 달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 장은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선언이며, 이 장의 기본 코드는 무위(無爲)입니다.

상대주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무위가 핵심이 됩니다. 따라서 위(爲)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제2장에 대해서도 다른 번역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차이들에 관해서는 설명하면서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美)를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善)을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의 번역은 주에서 달아놓았듯이 爲를 僞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아름다움(僞美)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또 위선(爲善)을 위선(僞善)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의 해석에 앞서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적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無爲)의 사상과 상대주의(相對主義)사상입니다.

무위란 거짓없음(無僞)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작위(作爲)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自然)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과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작위(作爲)가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장 유(有)와 무(無)의 통일적 인식에서 이미 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美)와 선(善)의 개념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미와 선에 이어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등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대립적인 것, 고정 불변한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만물은 변화 발전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따라서 위(爲)를, 여기서는 물론이며, ‘노자’ 텍스트에서는 대부분 인위(人爲), 작위(作爲)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介入)이란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儒家)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예악(禮樂) 명분(名分) 문물(文物)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2장을 읽을 때에도 먼저 노자의 이러한 기본적 관점에서 읽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위(爲)를 거짓, 허식(虛飾)등의 의미로 읽는 것은 노자의 철학을 도리어 유가(儒家)의 윤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며, 좁은 틀 속에 가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최고(最高), 최선(最善), 최미(最美)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美)와 선(善)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연스러움을 외면한 인위적인 미나 선은 그것이 진정한 미나 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도리어 그것은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미(美)와 인위적인 선(善)에 길들여진 우리의 기존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위적인 개념과 가치로 길들여진 의식을 반성하고 마찬가지로 실천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위(僞)’는 인(人) + 위(爲)입니다. 거짓(僞)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人爲)’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법칙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人爲)와 작위(作爲)가 바로 거짓(僞)인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이 구절에서는 유무(有無) 난이(難易) 등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수월함, 김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의 개념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구분이며 불필요한 ‘차이(差異)’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특히 ‘어려움’ ‘없음’ ‘짧음’ ‘낮음’ 등의 의미를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가치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성인(聖人) 이하의 구절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성인(聖人)은 마땅히 무위(無爲)하고 무언(無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성인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노자는 유가(儒家)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하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하였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세우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功)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똑 같은 문장이 제10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生之畜之는 낳고 기른다는 뜻이며, 그 다음의 生而不有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爲而不恃는 長而不宰(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다)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 즉 성인이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이러한 작풍이 곧 현덕(玄德)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덕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주인공 유현덕을 연상할 수 있지요? 현덕의 이미지가 이와 유사합니다. 조조(曹操)처럼 철저히 자기가 주도하는 방식과는 다르지요.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등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玄) 일하는(德) 스타일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해석상의 이론(理論)때문에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노자’ 제2장은 인식론(認識論)이며 실천론(實踐論)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善惡)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OX식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장단(高低長短)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自然)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倫理的)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美意識)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전환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배하는 갇힌 인식을 반성하고 조급한 실천을 지양하자는 것이지요.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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