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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와 無는 이름이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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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와 無는 이름이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신영복 고전강독 <86> 제8강 노자(老子)-6

2) 노자 예제(例題)-2

우리가 ‘노자’ 제1장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묘(妙)와 교(徼), 시(始)와 모(母), 그리고 무(無)와 유(有)를 대치시키고 있는 노자의 서술방식은 결코 그것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취한 서술방식입니다.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결론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지요. 제1장은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범주로 대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도입니다.

도(道)---무(無)---천지지시(天地之始)---묘(妙)---현(玄)
명(名)---유(有)---만물지모(萬物之母)---교(徼)---현(玄)

그리고 이 2가지 범주는 같은 것이며 다같이 현(玄)한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 2), 3)의 번역이 전체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조점이 놓이는 곳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자동 출이이명)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띄어쓰기를 달리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此兩者 同 出而異 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다르게(異) 보이는(出) 것은 그 이름뿐이다”라는 의미가 되고, 此兩者同 出而 異名으로 띄어 쓰면 “이 양자는 같으나 (사람의 앎으로) 나와(出), 이름만 달리(異名)했을 뿐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것을 취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도 마찬가지입니다.

1) “(도 이전과 이후는)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다.”
2) “그 같은 것(同)을 일컬어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든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이 경우 현(玄)은 묘(妙)보다는 더 근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로하시(諸橋)는 현(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자의 입을 빌려서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만 도(道)의 본체를 무(無)라고 설명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유에 대한 무로구나!”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도의 본체는 유에 대한 대립하는 상대적인 무(無)가 아니라 절대적인 ‘무(無)’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현(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이란 ‘검을 현’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과 붉은 색을 혼합한 색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무와 유를 합한 근원적인 무(無)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글자라는 것입니다.

검은 색은 무를, 그리고 붉은 색은 유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玄)에는 현묘불가식(玄妙不可識)의 의미 즉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道를 설명하는 말로서 가장 적합한 글자라는 것이지요.

번역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너무 번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제1장의 의미를 풀어서 이야기해보지요.

도(道)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法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윤리적인 강상(綱常)의 도(道)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道)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名)의 경우도 도(道)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約束)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붙인 표지(標識)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記號)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言語)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의 풀이도 이와 같습니다. 도(道)를 도(道)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寫眞)이라는 것이지요. 참도(眞道)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1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도(道)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思惟),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同體)이며 통일체(統一體)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자의 제1장은 무(無)와 유(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接近路)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無)는 ‘제로(0)’가 아닙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대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無)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無)라는 것이지요.

도(道)는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인 일체의 생성(生成)과 변화(變化)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도(道)가 작용(作用)하여 만물이 생성(生成)되고 변화 발전합니다. 그것이 유(有)입니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본체(本體)는 무(無)이지만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작용(作用)은 유(有)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道無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無形)인 도체(道體)가 유형(有形)인 도용(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道)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比喩)로써 도(道)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無)의 세계든 유(有)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玄妙)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노자’와 노자(老子)를 소개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또 제1장을 설명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번역상의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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