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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의 중심개념은 無와 有”

신영복 고전강독 <85> 제8강 노자(老子)-5

2) 노자 예제(例題)-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1장)常(상) : 참다운. 변함 없는. 항상.
欲(욕) : 하고자 하다. (will, must)
徼(교, 요) : 변두리(邊), 광대 무변함. 샛길, 實相界.
曒(교)로 보아 밝다, 명백하다.

노자 제1장입니다. 널리 알려진 만큼 해석상의 논란도 적지 않은 장입니다. 몇 가지 번역을 같이 소개해서 서로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無欲)으로 그 신묘함을 바라보고, 항상 유욕(有欲)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신묘함의 문(門)이 된다.”

2)“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3)“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1)과 2)의 번역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3)번역이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에 나오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주를 달았습니다만 상(常) 욕(欲) 묘(妙) 교(徼) 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한 다음 전체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장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장의 중심 개념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러 번 읽으면 가능합니다. 道? 名?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와 명은 중심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든 것입니다. 핵심적인 개념은 무(無)와 유(有)입니다. 노자의 철학을 ‘무(無)의 철학(哲學)’이라고도 합니다.

이 점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에 대한 3)의 번역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무와 유의 설명과 동떨어지게 되지요.

이 장은 핵심은 무와 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제1장의 핵심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그 서술구조는 “무(無)는 ······(을 이름하는 것)이며, 유(有)는 ······(을 이름하는 것)이다”라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로 띄어 쓰기를 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無는 天地之始를 이름함이며 有는 萬物之母를 이름함이다”가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의 번역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2)의 경우는 無名 有名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경우와 이름이 있는 경우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3)도 다르지 않습니다.

3)은 자신의 번역이 2)와 다름을 강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무명을 ‘이름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유명(有名)을 ‘이름을 붙인 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이름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2)와 3)은 다같이 첫 글자인 道와 名에 집착하여 無를 名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격하시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무(無)란 없음 즉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無)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해방된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를 의미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1) 2) 3)의 번역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명과 유명은 번역1)과 같이 떼어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명 무명으로 붙여서 읽는다면 제1장 마지막 구절인 此兩者同出而異名에서 兩者란 ‘無名’과 ‘有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 이 양자가 서로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똑 같은 문제가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무욕이관기묘 유욕이관기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도 무와 유를 중심개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는 항상(常: always) ···을 하여야(欲: will) 하고, 유는 항상 ···을 하여야 한다”라는 구조입니다.

1)에서는 無欲 有欲으로 붙여서 읽고 있습니다. 무욕으로서는 묘를 보고, 유욕으로서는 교를 본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욕(欲)을 의지(意志)나 입장(立場)의 의미로 읽는다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묘를 보기도 하고 교를 보기도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현학이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무욕을 가치판단이 없거나 입장이 없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치판단이나 입장이 배제된 그러한 관점(觀點)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러한 관점이 있다면 무욕과 유욕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2)에서는 無欲을 無慾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근본적 사유를 논하는 이 장(章)의 의미를 無慾과 有慾이라는 윤리적 문제로 격하시킬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묘와 교에 관한 사유가 이 장의 본령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를 강상(綱常)의 도(道)로 격하시키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3)에서는 無를 無名으로 그리고 有를 有名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묘함을 보아야 하고, 이름을 붙인 후에는 요(徼) 즉 실상계(實相界)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無로서 보는 것’과 ‘이름 붙이기 전에(無名) 보는 것’은 그 사유의 내용에 있어서 다르지 않습니다. 3)의 번역에서 괄호를 쳐서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묘함이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無名은 인식의 주체가 아닌 인식 대상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관(觀)의 주어가 되기 어렵습니다. 무와 무명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심정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구(字句)의 해석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전체의 의미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해석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번역을 시비하지 않았나 마음에 걸립니다, 더구나 ‘노자’에 대한 관점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장절(章節)에 대한 해석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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