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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컴플렉스'는 과연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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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컴플렉스'는 과연 사라졌나

<데스크 칼럼> 월드컵 축구와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한 단상

지난 14일 포르투갈전에서 결승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를 소개하면서 공영방송 KBS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오늘의 붉은 별'

TV 화면 속의 그 헤드라인을 보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또 다른 구절이 그 위를 덮었다.

'중국의 붉은 별'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1930년대 초 권위있다는 뉴욕타임스까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 군에 의해 완전히 궤멸됐다고 보도하고 있을 때, 스노는 단신으로 장정의 종착연인 연안에 들어가 모택동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의 건재를 세계 최초로 알린 책이 '중국의 붉은 별'이다.

이 책은 87년 6월 시민항쟁 이전까지는 금서였다. 대학생이던 70년대 후반 '중국의 붉은 별이란 책이 있다며...' '스노의 부인 님 웨일스는 조선인 혁명가 장지락을 모델로 아리랑이라는 책도 썼다는데...' 라며 친구들과 소근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책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중국의 붉은 별' 따위의 책을 갖고 있었다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빨갱이 콤플렉스(Red Complex)가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청군 홍군이 청군 백군으로 바뀐 것도, 상가집 부조에나 쓰이던 흰 봉투가 결혼식, 회갑연 등의 부조에 쓰이게 된 것도(예전엔 경사 때 부조에는 붉은 봉투를 썼다고 한다) 모두 빨갱이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영방송의 메인뉴스에 '오늘의 붉은 별'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나오다니, '세상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 색이 대인기다. 붉은 색 상의를 입지 않고서는 응원단에 낄 수도 없다고 한다. 붉은 색 옷감이 동이 났다는 말이 들릴 정도다. 붉은 악마의 공식 T셔츠에는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라는 구절이 씌어 있다. 대단한 '빨갱이 열풍'이다.

일부 언론은 이번 월드컵이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사라지게 했다는 기사를 내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분석까지 곁들여서...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언론사 소유지분을 제한하자'는 주장을 '좌파적 발상'이라고 비난하고,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를 띤 신문을 '좌파적 언론'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의약분업과 같은 가당치 않은 이유로 현 정부를 '좌파적 정권'이라고 몰아붙이는 세력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단순히 이념적 지향성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다. 주장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검증 없이, 나아가 합리적 토론을 거치지 않고도 상대방을 단칼에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편리한 무기다. 이른바 주류 세력들은 아직도 이 무기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건 지금까지의 얘기고 앞으로는 차차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물론 두고 지켜 볼 일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월드컵은 온 국민이 함께 즐기는 축제이자 유희다.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적 의사결정의 과정, 즉 정치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월드컵에서는 붉은 악마를 비롯한 국민들은 관객에 불과한 반면 정치의 장에서는 국민 하나하나가 선수라는 점이다.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하나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반면 정치의 장에서는 각 사회세력간 이해관계의 갈등과 대립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이의 합리적 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협상과 조정의 과정에서 '좌파'라는 딱지, 즉 비합리적이지만 편리한 정치적 무기를 사용하고픈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번 월드컵은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하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16강 진입을 하고 8강, 4강에 오른다 해도 그건 축구대회에서의 성적일 뿐이다. 축구대회 성적이 우리 삶의 질을 바꿔 놓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진정 우리가 세계에서 존경받는 국민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삶을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롭게 만드는 일에 진전을 보여야 한다. 월드컵을 계기로 결집된 국민적 에너지에 자유, 정의, 평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의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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