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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이름을 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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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이름을 팔지 말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

프레시안은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인 김기협씨의 칼럼 '페리스코프'를 시작한다.
필자는 80년대 대학에 있을 때는 공부의 깊이에 매달렸고 90년대 신문사 일을 하면서는 공부의 폭을 앞세웠다. 이제 양쪽을 아울러 시사를 역사로 보고, 역사를 시사로 읽는 눈을 다듬고 싶다는 게 필자의 생각. 동서교섭사를 연구하며 신간 외서를 폭넓게 섭렵하는 필자의 안목이 시사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야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넓혀 줄 것으로 기대한다. 물 속에 잠겨서도 세상을 두루 둘러본다는 뜻에서 문패를 '페리스코프(잠망경)'로 단다. 편집자

지난 달 궁지에 몰린 야세르 아라파트를 보호하러 나선 '인간방패' 속에는 62세의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드 샤브페르 부인이 있었다. 부인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61년 전 나치의 손에 죽은 유태인이다.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도망왔지만, 독일의 프랑스 점령 후 온 가족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부인의 어머니만은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체포를 모면했다고 한다.

한 쪽만이 유태계인 샤브페르 부인은 스스로를 유태인보다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유태인의 고통에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이스라엘로 날아간 것이다.

아리엘 샤론이 유태인의 이름으로 자기를 대표해서는 안된다고 부인은 분개한다.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희생자들을 팔아 이스라엘을 나치 독일과 같은 나라로 만드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인간방패 노릇을 자원한 것이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자손이 시오니즘의 총알을 가로막고 나서다니, 참으로 아이러닉한 상황이다. 아라파트의 인간방패 속에는 샤브페르 부인 외에도 프랑스 유태인이 여러 명 있었다.

집권당인 리쿠드당이 팔레스타인 독립을 반대하는 당론을 정한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국민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독립을 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엄청난 국론의 괴리는 시오니즘의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프리 휫크로프트의 '시오니즘 논쟁(The Controversy over Zion)'(1997)에는 시오니즘의 세 가지 모순이 지적되어 있다. 첫번째는 구조의 모순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이념적 배경이 된 시오니즘을 앞서 제창한 것은 주변사회에 동화한 서유럽과 미국의 유태인들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에 실제 정착하러 간 것은 대부분이 중부와 동부유럽의 게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바란 반면 후자는 '힘있는 조국'을 원했다.

두번째는 논리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은 유럽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응하면서 그 배타성을 본받았다.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에서 현지 아랍인 주민의 입장은 식민지의 원주민 정도로밖에 고려되지 않았다. "그들은 선진문명을 전달해주는 우리를 환영할 것"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식민주의 논리 그대로였다.

세번째 모순은 상징성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이 유태인사회의 전폭적 단결을 이룬 것은 나치의 대학살 덕분이었다.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참상이 시오니즘의 어떤 극단성도 정당화해 주는 상징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 in Jerusalem)'(1963)에서 나치범죄의 본질을 '악마성' 아닌 '비속성'으로 논해 호전적 시오니스트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이 상징성을 손상시킨 때문이었다. 악마성에 대항한다는 명분 없이는 극단적 호전성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모순이 근년의 이스라엘에서는 모두 더욱 심화되어 왔다. 구조의 모순을 심화시킨 것은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유태인의 대거 이민이다. 이스라엘 인구의 15%를 점하게 된 이들은 히브리어도 할 줄 몰라 러시아어 신문과 방송이 생길 정도다. 더 많은 땅을 원하는 이들은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자는 온건파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며 서안지구의 정착촌에 앞장서 자리잡고 있다.

논리의 모순은 유럽의 탈(脫)민족주의 변화로 부각되고 있다. 시오니즘의 배경이던 유럽 민족주의가 유럽연합의 그림자에 덮이면서 시오니즘은 민족주의보다 인종주의의 틀로 옮겨가는 것이다. 상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 강경파의 입장은 온건파와의 대화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은 상징성의 모순을 심화시킨다. 자살폭탄이 담은 극단적 증오를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반(反)인간적 현상이 악마성으로 보일 수밖에 수 없다. 폭력만으로 이에 대응하는 자신들이 얼마나 악마적으로 보일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40년 전 영화 '엑소더스'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바탕으로 한 그 감동은 시오니즘의 모순을 가려줄 수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약자도 아니고 시오니즘의 모순은 이념으로서 시오니즘의 효용성까지 위협할 정도로 심화되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탄압이 나치의 유태인 탄압을 닮아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유태인 나치 희생자의 후손들에게서까지 나오고 있다.

<필자 소개>
1950년 서울 생. 연세대 문학박사(동양사). 계명대 교수, 중앙일보 전문위원 역임.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들녘출판사 편집고문(코기토 편집인).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인식과 선교노선' 등 논문 다수. '용비어천가' 등 역서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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