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일 때 노무현 후보가 지난 해 술자리에서 했다는 '언론사 폐간' 등의 발언을 근거로 노 후보의 언론관 논쟁이 한창이더니 이번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언론관이 도마위에 올랐다.
최근 발행된 월간중앙 6월호는 이연홍 중앙일보 정치전문기자의 취재수첩 '정치인과 술자리 실언'을 통해 세간에 떠돌던 이회창 후보의 "창자를 뽑아버리겠다"는 발언을 기사화했다. 이 후보의 '창자' 발언은 그동안 97년 중앙일보 대선문건 파동 등으로 월간 말이나 한겨레 미디어오늘 기자협회보 등을 통해 보도된 적은 있으나 '조중동' 등의 유력일간지들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보도한 게 대부분이었다.
<사진 이회창: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의 언론관 공방에 이어 '기자의 창자를 뽑아버리겠다'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5년전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연홍 기자는 취재수첩을 통해 97년 이 후보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직후 당시 여당 출입기자들과 가졌던 술자리 신고식의 전후 배경을 설명하며 이 후보가 한 기자에게 농담으로 "잘 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자네 창자를 뽑아버릴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엄청난 뉴스"라며 "미국식 시각에서 보면 폐간 운운보다 더 심각한 발언일 수 있다"고 썼다. 이 기자는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던 20여명의 기자들 누구도 그것을 보도하지 않았다"며 "현장의 분위기 그것을 문제삼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회창 후보도 지난 22일 열렸던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나와 "언론에 대한 험악한 발언이 술자리 발언이라고 했는데 추미애 의원 발언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 부분은 잘못됐다. 술자리에서 한 발언이라고 해서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며 사실임을 시인하기도 했다.
이 후보는 또 "추미애 민주당 의원의 술자리 발언은 언론의 비판을 받았는데 이 후보는 그러지 않았다"는 패널의 질문에 "추미애 의원 발언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 경우는 싸우는 발언이 아니었다. 농담으로 얘기하는 발언이었다"며 농담임을 강조했다.
정치인들의 술자리 발언은 대부분 기자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나 비보도를 전제로 이뤄지기 때문에 기사화되지 않을 경우 일반 국민들은 그 발언의 진위나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결국 기자 개인의 판단, 혹은 정보보고를 받은 데스크의 판단이 기사화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기사화 결정 기준에 각 언론의 자사이기주의나 실리적 판단, 사주에 대한 눈치보기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99년 10월 중앙일보 세무조사 당시 퇴사를 각오하고 내부비판을 했던 '참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이 글도 찢지 맙시다'라는 대자보의 주인공 오동명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는 지난해 발행한 '당신 기자 맞아?'라는 책을 통해 이회창 후보의 세칭 '창자론' 발언을 다뤘다.
오동명씨는 이 책에서 98년에 이뤄졌던 한 택시기사와의 대화를 소개하며 이회창 후보가 했다는 '창자론'을 들먹이자 택시기사로부터 "당신 기자 맞아?... 기자들이 그런 사실을 신문에 밝히지 않으면 우리 국민들이 뭘 알겠어...너희들이 더 나쁜 놈이야"라는 비판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사사로운 것도 아니고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정치인의 언론관인데 국민이 당연히 알아야 했을 정보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지난 4월 노 후보가 지난 해 여름 술자리에서 했다는 언론관련 발언이 한때 국민들의 눈과 귀를 독점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의 발언에 대해서는 술자리 농담에 불과한 것이라며 그냥 넘어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노 후보의 경우에는 유력 정치인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 후보의 경우에는 그러한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노 후보와 술자리를 가졌던 기자들은 그의 '유력 일간지 폐간 발언' 등도 술자리 농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처음 들었을 때는 기사꺼리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의 발언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이 후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언론 아닌 정치권이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까지를 떠맡은 형국이 된 셈이다.
술자리 농담은 물론 있을 수 있으며 기사화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기자의 몫이다. 문제는 언론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가 갈수록 급전직하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언론사가 보도하는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크며, 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의 이면에 대해 언론이 갖은 이유로 침묵하기 때문이다.
이연홍 기자가 취재수첩 말미에서 지적했듯이 "결국 중요한 것은 말 자체보다 말의 진의"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한국 언론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론의 보도 속에 진실과 진의는 없고 '꼼수'만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다음은 월간중앙 6월호 정치전문기자 이연홍의 취재수첩 '정치인과 술자리 실언' 전문.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지난해 여름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얘기를 두고 말이 많다. 어떤 한 언론사 폐간 운운했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논란이 그것이다. 아직 진위여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모두 말이 다르다. 그것을 여기서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가려질 사안도 아니다. 문제는 술자리 발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다.
사실 우리나라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인의 술자리 발언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술에 취해 한 얘기이니만큼 한 수 접어주는 것이다. 솔직한 면도 있지만 과장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보통 술자리 발언을 밑천삼아 보충취재를 한다. 중요한 얘기라면 발언 당사자가 술에서 깼을 때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상례다.
술자리 실언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음직하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마찬가지다. 1997년 선거 때의 일이다. 그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직후였다.
당시 이 총재는 여당을 출입하는 차장급 기자들과 신고식을 겸한 술자리를 가졌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 1층의 '상해'라는 중식당이었다. 그곳에는 매ㆍ란ㆍ국ㆍ죽이라고 이름붙은 몇 개의 룸이 있었다.
우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총재측은 당시 죽실을 예약했다. 이 총재가 한창 '대쪽'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 총재는 무슨 술을 시킬까 하고 기자들에게 물었다. 한 기자가 "대쪽(이회창 후보)이 죽실을 예약했으니 '죽엽청주'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 총재도 좋다고 해서 50도 짜리 죽엽청주를 시켰다. 보통 독한 술이 아니었다. 얼마 뒤 누군가가 폭탄주를 마시자고 제의했다. 폭탄주용 양주를 따로 시키려 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이 총재는 죽엽청주로 폭탄주를 만들고 있었다. 보통 폭탄주보다 두 배는 독했다.
세잔째인가 돌았을 때였다. 한 언론사 기자에게 이 총재가 말했다.
"내 기사 똑바로 써줘. 그렇지 않으면 재미 없어."
순전히 농담이었다. 그 기자도 말을 받아 농을 던졌다.
"그렇게 하면 대통령 안돼요." 필자를 비롯해 옆에 있던 기자들 모두 웃었다. 이 총재의 농담은 계속됐다.
"잘 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자네 창자를 뽑을 거야."
옆에 있던 한 기자가 "아이구 무서워라"고 했고, 다른 기자가 "몸조심하자"고 거들었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뒤였다. 한 월간지가 그 때의 일을 보도했다. 정색하고 문제를 삼았다.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만약 미국이었다면 분명 대서특필됐을 것이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엄청난 뉴스다. 미국식 시각에서 보면 폐간 운운보다 더 심각한 발언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던 20여명의 기자들 누구도 그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현장의 분위기가 그것을 문제삼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식'이라면 지나친 자기합리화일까. 그러나 현장에는 이회창 총재를 싫어하는 기자들도 꽤 있었다. 미국과 비교했으니 말인데 미국에서는 기자들이 집권당 대통령 후보와 폭탄주를 마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 자체가 엄청난 뉴스일 수 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정치인들의 실언을 알아서 봐준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술자리 실언에는 너그러워도 맨정신 실언에는 가차없다. 설사 취재원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었어도 말이다.
6공때 박철언씨가 한창 잘 나갈 때 였다. 그는 자기 집에서 기자들을 만나 비보도를 전제로 이런 말을 했다.
"내 말 한마디면 YS는 끝장이다."
그 얘기를 들은 기자들은 그 날짜 석간 1면톱으로 그것을 보도했다. 결국 박철언씨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두고두고 말값을 치러야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 자체보다 말의 진의다. 그 배경과 의지 말이다. 그것은 현장의 기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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