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상 동아일보 화백이 갑자기 사표를 제출하고 10일부터 만평게재를 중단했다. 특히 손 화백의 '동아희평' 은 지난 해 이후 정언(政言)간 갈등, 여야의 치열한 정치공방 속에서도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는 점에서 그의 사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 9일자 동아희평과 사설>
동아일보는 10일자 6면 알림을 통해 "손문상 화백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10일자부터 '동아희평' 집필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새 작가가 맡을 때까지 '동아희평' 게재가 일단 중단됩니다"라고 밝히고 '루리의 세계'란 만평으로 대체했다.
***동아일보 "공부하겠다고 사표 제출했다"**
손 화백의 사표제출과 관련한 동아일보측의 공식입장은 "본인이 한 교수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위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고자 한다며 8일 사표를 제출해 9일 수리됐다"는 것이다.
김용정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손 화백이 갑자기 사표를 제출해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스칼라십을 얻어 공부할 계획'이라는 의사를 피력해 사표를 받아들였다"며 "회사로부터 손 화백에 대한 사표 권유나 압력 등은 일체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아일보 내에서도 손 화백의 갑작스런 사표제출은 의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난 3년간 손 화백의 만평이 동아일보의 보도나 논설방향과 엇갈리기도 했지만 별다른 마찰 없이 잘 지내왔기 때문이다.
한 중견기자는 10일 "손 화백의 사표제출을 오늘 알았다. 너무 전격적으로 이뤄져 말리지도 못했다"며 "그 동안 편집국의 보도방향과 손 화백의 만평방향이 다를 때가 많아 손 화백 스스로 일하기 힘든 분위기라고 파악한 것 같다. 일단은 노조 공정보도위원회(공보위) 활동 등을 통해 전후사정을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편집국의 한 고위간부도 "사내에서 만평에 대해 너무 '드라이하다'라든가 '무슨 그림인지 잘 모르겠다' 등의 말들이 종종 나와 본인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한번도 만평에 대해 '안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손문상 화백은 사표제출 이유를 묻자 "그냥 그만 둔다고 사표를 낸 것이다. 할 말 없다"라고만 답변했다.
***"동아일보와 손 화백의 지향점 달라 고민 많았다"**
손 화백의 '동아희평'은 그동안 언론계에서 세무조사 등으로 인해 현 정부와 대립각을 분명히 세우고 있는 동아일보의 논조와는 달리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동아일보내의 일부 기자들도 "손 화백의 만평이 동아일보 내에서 보도방향과 배치될 때가 있어 가끔 화제가 되곤 한다"며 "손 화백이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한편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손 화백이 소속 신문사의 논조나 보도방향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는 '동아희평'을 계속 집필하는 것을 보고 "그래도 동아일보가 포용력이 있는 신문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손 화백의 사표제출에 대해 손 화백과 절친한 한 일간지 화백은 "손 화백의 사표제출은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인한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진 고민의 결과로 본다"며 "특히 지난해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본인과 동아일보의 지향점이 달라 많은 고민을 해왔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최근에는 동아일보의 여당 대선후보 경선과정 보도에 대해 손 화백이 이념공방 등을 그대로 중계하는 노무현 관련 기사 등에서 불편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사설은 "노무현 자격없다", 만평은 "이인제, 박찬종 되나" 대조**
무엇이 동아일보의 보도방향과 손 화백 만평방향의 차이점인지는 9일자 동아일보에 잘 드러난다.
9일자 동아일보 '노무현 후보 도덕성 문제있다'는 사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노무현 후보의 도덕성과 정직성에 대한 의문이 부풀고 있다"며 최근 이인제 후보측의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킨 노 후보의 언론관련 발언들을 비판하고 있다.
사설은 이 후보측이 노 후보가 말했다고 주장한 동아일보 폐간발언과 노 후보의 재벌해체나 주한미군 철수 발언 등을 지적하며 말바꾸기로 핵심을 벗어나려 한다고 노 후보를 비판했다.
사설은 또 "우리처럼 남북이 분단된 나라에서 새 세기를 이끌어 갈 대통령이 되려면 우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며 "노 후보는 그런 선택의 기준과 원칙에 비춰볼 때 과연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게재된 손 화백의 '동아희평'은 "황사"('노풍'을 암시한 듯)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못 잡고 있는 이인제 후보의 차가 "대선가도"와 "박찬종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73년 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박찬종 전 의원은 지난 92년 단기필마로 대선에 출마해 신선한 '바바리 바람'을 일으켰다가 96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 상임고문을 역임했고, 97년 대선때는 이인제 후보가 창당한 국민신당 선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은 최근 '한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며 다시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손 화백의 '동아희평'이 이인제 후보가 황사(노풍)로 희뿌옇게 보이는 박 전 의원의 모습을 보며 "누구더라?"고 묻고 '대선가도'보다는 '박찬종의 길'쪽으로 노선을 잡았다는 메시지는 이 후보가 최근 제기하고 있는 노 후보에 대한 이념이나 언론관 공격 등이 한나라당 복당까지도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는 풍자로 해석된다.
즉 동아일보 사설은 노무현 후보의 도덕성이 의심스럽다고 비판하며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반면, 만평은 노 후보를 공격하고 있는 이인제 후보의 행보가 철새 정치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박찬종의 길'과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지면을 하나의 통합적 유기체로 볼 때 앞뒤가 전혀 다른 비판대상과 메시지가 동아일보라는 동일한 지면상에서 어우러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손 화백의 사표제출이 그저 단순한 공부목적으로만 비쳐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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