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회고-文酒 40년'을 마치면서 음주문화에 관한 글 한편을 싣는다. 이 글은 남재희씨가 지난 1995년 노동부장관을 마치고 펴낸 저서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에 실렸던 글이다. 편집자
나는 요즘 한 가지 자그마한 운동이라면 운동을 펴고 있다.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가급적 빈대떡집으로 가는 운동이다. 광화문 근처에, 대학을 갓 나온 월급쟁이 초년 때부터 즐겨 다니던 빈대떡집 거리가 있다. 그후로도 가끔 들러 빈대떡 맛을 즐겼는데 요즘은 부쩍 자주 가고 있다.
얼마전에는 운정(雲庭) 선생(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아호)을 모시고 가서 유쾌한 담소를 나눴으며 그후 후농(後農ㆍ김상현씨 아호)과도 함께 가서 호쾌하게 시국담을 하였다. 계속 명사들과의 풍류놀이다.
빈대떡에 소주는 우선 싸서 좋다. 살롱에서 술을 마시려면 두당 20만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개혁의 시대가 아니라고 해도 이게 어디 말이 될 법한 일인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바보스럽다. 호화롭게 술을 마시는 것이 아마 부정부패 원인의 절반은 차지할 것으로 짐작된다.
빈대떡집은 서민적 운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곳이기에 허세가 없고 차분한 진실만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옛날 풍류객들도 그런 수준의 음주를 즐겼을 것이다.
그곳은 대화의 마당이기도 하다. 서로 부담이 없으니까 이야기하기도 느긋하기만 하다. 음식 자체도 또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다. 빈대떡집만큼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불고기집 주인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불고기에 소주가 대화하고는 상극이라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타기가 쉬운 불고기는 먹기가 매우 급하고 그러다 보니 소주도 급속도로 마시게 되어 대화는 별로 나누지 못한 채 취해 리고 만다. 우리 민족이 세련도가 부족하다는 느낌인데, 이런 비대화적 음주방법을 극복하지 않고는 민족의 세련도를 눞이기란 요원할 것같다.
또 2차, 3차의 술은 피해야겠다. <아직도ㆍㆍㆍ> 농담시리즈 중에 <아직도 술 드실 때 2차 가십니까>가 있다. 본래 우리 주법은 한 곳에서만 마시는 것이었는데 일보 침략때 대륙낭인들이 2차, 3차 하는 못된 버릇을 전파했다는 그럴듯한 설명이 있다.
옛날에 마해송 선생과 술을 마셔본 일이 있다. 그 분은 청주 한 글라스를 30분 정도에 걸쳐 마신다. 입에 한 모금 넣고는 빙빙 굴려 그 향기를 음미하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옳은 주법이 아닐까.
술 마시는 양식도 분명 문화이다. 그 음주문화의 세련 없이는 우리 사회의 성숙이나 세련도 쉽사리 이루어질 것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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