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청 앞에, 그러니까 전날의 수송초등학교 앞에, ‘장원’이라는 유명한 한정식집이 있었다. 마침 위치도 중앙청과 가깝고(과천 청사가 생기기 전이다) 국회(조선일보 옆에 있었다)나 신문사들과도 가까워 질이 좋은 손님들이 많이 모였다. 한옥을 잇대어 사들여 연결했기에 방도 많았다.
거기에다가 한국에서는 가장 솜씨좋다는 전남음식이다. 광주를 중심한 전남음식이 팔도에서 가장 맛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대지주생활의 유산이다. 전국에서 논이 제일 넓은 곳은 전남이고, 따라서 대지주제도가 가장 굳건히 자리잡았다. 반면 소작인도 가장 많아 빈부격차가 심했지만 말이다. 그 대지주들이 차려먹은 음식들이 지금의 전남음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이 역시 논이 넓어 지주제도가 발달한 전북. 전주음식을 쳐준다.
다른 곳의 음식은 떨어진다. 내 고향 충청도는 특색이 없고, 경상도는 대지주는 별로 없고 자영농민만 많았기에 음식사치가 없이 더운 지방이니까 맵고 짜기만 하고, 이북은 본래 척박한 지방이니까 평안도의 냉면과 빈대떡, 함경도의 가재미식혜와 순대를 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장원의 음식은 그 전남음식의 모범이니까 맛이 있을 수밖에 없고 게다가 더하여 주인인 주 여사가 대단한 인물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여서(아마 권사일 것이다) 일요일은 꼭 주일이라고 영업을 쉴 뿐만 아니라 50명쯤은 충분히 될 아가씨들(20대초 처녀들로 요즘은 언니라고 부르는 게 유행이다)의 행동거지 단속에도 철저하여 ‘엠피’(MP=헌병)라고 불리우고 있다. 엠피마담으로 통한다.
주 여사는 일제말에 광주에서 정통 기생으로 있었다 한다. 그때의 기생은 노래·악기·춤·법도 등 모두를 특별히 배운, 말하자면 예인(藝人)이다. 일본에서는 게이샤(藝者)라고 하는데 부합되는 호칭이다. 그 당시 일본 고등문관시험(高文)을 합격하여 전남의 강진군수 등을 지낸 청곡(靑谷) 윤길중(尹吉重)씨가 주 여사를 그때 이미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때의 한국인 군수는 20대 초반도 많았다. 전에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령(李恒寧)씨가 고문(高文)을 합격하여 약관의 군수가 되어 부임하니 역에 마중 나와 있던 기관장들이 “아버님은 어디 계시니”하고 묻더라는 유명한 에피소드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정책의 간판이고 한국인 군수 뒤에는 진짜 실력자인 일본인 경찰서장이 있었다.
주 여사는 참 훌륭한 분이다. 종업원 아가씨들을 엄선하여 뽑았겠지만 풍기단속도 엄하게 하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하나씩 한정식집을 분가를 시켜준다. ‘목련’은 신문로파출소 뒤에 있었고, ‘늘 만나’는 조계사 옆에 있었고... 그렇게 독립을 시켜준 여성이 열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주 여사는 다른 사정으로 장원을 팔고 사직공원옆 필운동쪽에서 ‘향원’이라는 한정식집을 다시 문열었다.(사직공원 앞에 ‘장원’이라는 밥집이 있는데 소문으로는 주 여사에게 명의사용을 허락받고 한다고 한다) 거기서 만난 여인이 신수정씨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신수정씨는 나와 같은 청주출신으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데 같은 이름인 신수정이니 화제가 될 수밖에.
신수정씨는 영업규칙대로 물론 항상 한복이지만 한복이 어울린다. 키는 약간 작은 듯한데 인상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과 같다. 미인이라면 과찬이 되겠고 전형적 한국여성의 용모로 분위기가 회화적이다.
향원은 얼마 후 근처로 이사했다. 사직공원에서 가깝지만 거기서 신문로파출소쪽으로 뚫린 언덕길의 사직공원쪽이다. 지금은 성곡(省谷)기념관이 된 김성곤(金成坤)씨 집 아래라는 설명이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쉬울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서 손꼽히는 한정식집으로 소문이 나있다.
신수정씨는 그리로 옮긴 지 얼마 안돼서 독립하게 된다. 주여사는 “얘가 새로 밥집을 내니 많이 팔아 주시오. 이제 마지막이요” 한정식집 분가 마지막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위원회 건너편 골목 아래에 있는 ‘수정’을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중 향원에 갔더니 주 여사 “내가 팔아주라고 했다고 그 집만 가면 쓰간”한다.
새로 시작한 ‘수정’은 금방 향원과 비견되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정치인들이 선호하였다. 아마 그 전남음식의 맛 때문일 것이다. 장원이나 향원과 마찬가지 이치에서다. 그리고 신수정씨가 만들어 내는 동양화적 안정된 분위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신수정씨는 목포 출신이다. 그래서 강서구의 신안 출신 대기업가 우경선(禹炅仙)씨를 일부러 안내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목포 출신의 야당당수 김대중씨가 그 집을 단골로 삼게 되었다. 한번은 김상현(金相賢), 이종찬(李鍾贊) 등 정치인들과 1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2층에 후광(後廣·김대중씨 아호) 선생이 왔단다. 김상현씨는 당수에 대한 예의상 인사 간다고 하며 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종찬씨가 불려 올라갔다. 그때 아마 한시간 이상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과정 때부터의 중용을 짐작케하는 일이다.
향원이나 수정이나 공통된 전남음식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전라도의 돌김과 이른바 삼합이다. 그리고 전라도의 유명한 젓갈들이다. 돌김은 양식김이 아니고 바위에 붙은 자연김. 삼합은 홍어 작은 토막을 돼지고기와 긴 배추김치와 합쳐서 먹는 것으로 셋을 합쳤다 해서 삼합이다. 맛이 괜찮다. 특히 긴 배추김치를 찢어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잘 가는 빈대떡집에 교보빌딩 뒤의 ‘경원집’이 있다. 빈대떡도 좋지만 알이 작은 어리국젓과 잔 조개로 끓인 국이 일품이다. 거기서 나는 내 식대로 삼합을 먹는다. 빈대떡에 어리굴젓과 간장에 살짝 담갔던 양파의 삼합인데 맛이 기막히다. 비결은 어리굴젓이 크면 안 되고 잘아야만 되는 것이다. 김종필씨와 함께 가서 안 사실이지만 경원집이 부여사람이니 충청도 삼합이라 해둘까.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니 신수정씨와 수정은 매스미디어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신수정씨는 텔레비전 인터뷰의 대상이 되었다. 한번은 우연히 TV를 보니 신수정씨가 김 대통령이 수정에 다니던 이야기, 영국에 가 있을때 포를 포함한 마른 안주 등을 보내준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정치를 그만둔 후 수정을 거의 못 갔다. 후원회비도 없는 터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이다. 요정이 아닌 밥집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부담이 크다. 한번은 친구 초청으로 모처럼 갔더니 토하젓하고 누룽지를 선물로 준다. 토하젓은 전남의 민물서 나는 거무스름한 작은 새우의 젓갈, 흙 토(土)자, 새우 하(鰕)자해서 토하이다. 밥을 비벼 먹으면 좋다. 누룽지는 담양 죽세공 바구니에 담은 것으로 별미로 누른밥을 먹으라는 것.
요즘 들으니 신수정씨가 정치인들과 골프장에도 자주 나가고 실력도 대단하여 최고급인 싱글이라는 것이다. 장사가 잘 된다는 이야기이다. 김대중씨의 후광이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림이 잘 맞지 않는다. 월전 장우성 화백 그림에 나오는 여인같다 하지 않았는가. 그 여인이 양장을 하고 골프채를 휘두른다... 성춘향이 양장하고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는 평생 골프를 친 적이 없다. 골프반대가 아니다. 어떻든 바빠서이다. 신수정씨의 동양화 이미지가 언제 어떻게 다시 조화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