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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9>현대의 황진이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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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9>현대의 황진이들-6

대학물에 총명했던 채기정 여사

대학‘물’을 먹었다고 한다. 이 ‘물’을 먹었다는 말이 새삼 뜻있게 생각된다.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거기서 공부하였다는 뜻만 아니다. 대학에서 동료들과 어울렸고 그 분위기를 맛보았다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의 성장에 있어서 이 동료, 또는 친구(peer)와의 어울림을 사회학자들은 매우 중요시한다.

내가 쓰는 '현대판 황진이’에 있어서 채기정 여사는 이화여자대학 교육학과를 다녔다는 점에서 대학물을 먹은 드문 경우이다. 몇 년 동안을 다녔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는데 다닌 것만은 틀림없어 그런 분위기가 물씬하다. 매우 똑똑하다. 이지적이고 세련되어 있다. 가냘픈 편으로 평균의 미모를 약간 웃도는 정도이나 한복보다는 양장이 어울리는 서구화된 여성상이다.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경영하는 무교동의 다방 ‘그린필드’에서이다. 마침 내가 다니던 서울신문에서 가까워 점심을 동료들과 함께 하고는 들르곤 하였다. 그러면 으레 가까이 있는 동아일보 패들과 만나게 된다. 동아일보에서는 권오기(權五琦) 주필을 비롯하여 대거 모여들어 서울신문의 세가 항상 눌리었다.

채여사는 이들 신문기자들 사이에서 재치있는 대화와 이지적인 표정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때 린다 김의 안경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채 여사도 영화배우들에 어울리는 안경을 선택해 멋지게 쓸 줄 알았다.

따지고 보면 이른바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물장사든 영화배우든 모두 자기의 미를 상품화한다고 할 수 있다. 미모를 그냥 썩히기는 아깝고 어떻게 하면 최대의 효과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여 때로는 배우가 되고, 때로는 로비스트가 되고, 때로는 물장사를 하고 하는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 결국 자기의 재능을 상품화 또는 상업화하는 게 아닌가.

채 여사는 ‘그린필드’후에 관철동에서 ‘청윤(靑輪)’이라는 비어홀을 열었다. 청윤이 아니고 청륜이라고 해야한다고들 하여도 고유명사니까 관계없다며 굳이 ‘청윤’을 고집하였다. 불교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그는 대학까지 기독교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불교로 개종하여 비교적 열심히 절을 다니고 있으며 청윤의 륜자도 불교서 딴 듯했다.

채기정이라는 이름도 그런 관계인 것 같은데 기정(箕井)이라는 글자가 기자의 우물이라는 뜻도 되어 외기가 쉬운 것이다. 그 비어홀에 역시 동아일보 식구들이 주된 손님이었다. 권오기씨등 편집국패들은 물론이고 백인수(白寅洙) 화백 등과 가끔은 김병관(金炳琯) 당시 전무(2001년까지 회장)도 왔다.

김병관씨는 용모가 나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가끔 술집여자들이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뜻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 적도 있다. 하기야 문교부장관을 지낸 문홍주(文鴻柱)씨도 마찬가지. 술집에서 형제간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홍승면(洪承勉)씨는 맛기행을 연재하기도 하는 식도락가인데 채 여사가 함경도 출신인 것을 알자 바로 가재미식혜를 부탁한다. 동아일보 이야기가 난 김에 더 이야기하면 채 여사가 여러 가지로 너무 세련되어 있어 일민(一民) 김상만(金相萬) 회장이 집에서 큰 파티를 할 때에는 호스테스의 총감독으로 채 여사를 초청해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학물을 먹어서 똑똑한 데다가 손님들이 쟁쟁한 신문사 사람들(때로는 박필수 장관등 관계 인물도 왔다)이니까 거기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산 교육이 되어 더욱 총명해지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한번은 겨울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눈이 엄청 많이 쏟아졌다. 그랬더니 그는 “이럴 때는 통금시간을 늦추는 게 순리인데......”하는 게 아닌가. 과연 좀 있다 방송에서 통금을 늦춘다는 발표가 나왔다.

비어홀을 하던 채 여사는 살롱으로 발전하였다. 오장동에 같은 ‘청윤’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역시 동아일보 사람들이 주력이고 나는 김종인(金鍾仁) 박사와 자주 갔다. 민음사 박맹호 (朴孟浩)사장과도 어울렸다. 살롱을 하니 주인 마담도 손님의 청을 받아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면 그는 ‘눈이 나리네’를 특히 좋아했고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를 잘 불렀다. 그렁저렁 수준급이었다.

채 여사는 그후 장사가 잘 안 되어 강남의 살롱에 동업마담으로 전전하다가 결국은 미국 이민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래도 끝까지 손님으로 따라다닌 것은 신문기자들이었다. 역시 말상대가 되어서이다. 세상 물정이나 시사문제에 탁 트여 어떤 화제가 나와도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다.

술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작심하고 마실 때에는 양주를 고집하는 데 한병쯤에는 취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애교가 있고 또 스스로 자기는 “눈으로 말한다”고 자주 말해왔었는데 서울의 나이든 언론인들 많이는 지금도 비어홀 같은 데서 채 여사를 보기를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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