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나림 이병주(那林 李炳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잘 써서 북한산 입구에 나림의 어록비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나림의 기념물인데 북한산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림의 글 가운데 북한산 예찬론이 있어 그 어록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돌을 놓은 것이다. 북한산 예찬론은 북한산을 알기 전과 북한산을 안 후의 자기 인생이 달라졌다는 얼마간 과장이 심한 글이다.
제막식에 친했던 송남헌, 박진목씨와 소설가 한운사(韓雲史)씨가 먼 길을 찾아왔었는데 의외로 최지희씨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기는 최지희씨는 서울대학 병원 영안실에서 있은 나림의 영결식에도 참석했었다. 경남 하동군의 한 동네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하기 전에 나림이 최지희씨를 모델로 소설을 쓰겠다고 이야기 해왔는데 소설을 보지 못한 게 몹시 서운한 모양, 그 이야기를 아쉬운 표정으로 했다.
1966년부터 1년반 동안 내가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있을 때 최지희씨는 '말띠 여대생'등 영화에 출연한 신진 여배우였다. 영화평 담당 정영일 기자 이야기로는 영화감독이나 제작진이 최씨를 '고꼬로'라고 별명을 지었다는 것이다. '고꼬로'는 마음(心)의 일본어인데 아마 지킬 것 잘 안지켜 제작진의 속을 썩인 것 같다. 속이 탈 때마다 "아이고,고꼬로"라고 햇을 듯하다.
70년대초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을 때 아까사까 미쓰께(赤坂見付)에 있는 '지희살롱'에 많이 들렀다. 대부분의 한국 정치인·언론인들은 긴자(銀座)에 있던 바 '센(千)'과 '지희살롱'이 단골이었던 것이다.'센'바는 지난 날의 재무장관 천병규씨가 한국은행의 동경지점장으로 있을 때 신세를 진 여성이 감사의 뜻으로 '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2층에 있던 '지희살롱'에 들어가면 스크린에 젊은 날의 최지희씨가 큼직하게 나타난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몸도 크고...... 모든 게 시원시원하게 큼직한 미인이다. 특히 코는 약간 스키코랄 만큼 높다. '고꼬로' 이야기 등 배우시절 이야기를 했더니 서로가 바로 구면처럼 되었다.
한번은 우리가 일본 언론간부와 술을 마시는데 조총련의 쟁쟁한 간부가 따라붙어 애를 먹었다. '센'에 따라붙는 것 같아 '지희살롱'으로 옮기니 즉각 이동해 온다.
자주 가다 보니 최지희씨가 다른 가게에 가서 한잔 사겠단다.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이우세(李禹世), 일본에 있는 통일일보 사장을 지낸 이승목(李承牧)씨 등 일행이 5명쯤이었는데 나에게 바가지 쓰려 하지 말라고 말하며 하나씩 모두 꽁무니를 뺐다. 나는 영화판에서 최지희씨가 '기마에'(일본말로 통이 크다는 뜻) 좋기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결국 최지희씨 일행 여성 5명과 나만 달랑 록본기(六番木)에 있는 한국 여성 '경성' 살롱에 가서 늦게까지 마셨다.
그 다음에는 멀리 가지 말고 가까이 있는 역시 한국여성 '경영'살롱에서 한턱 내겠단다. 이번에는 아무도 내빼지 않아 흥겹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자기 가게가 아닌 다른 가게에 가니 최지희씨는 참 신나게 놀아댄다. 과장을 섞어 말하면 영화에서 리타 헤이워드가 춤을 추는 모습을 눈앞에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서울에 돌아온 최지희씨는 신문에도 가끔 기사꺼리가 되었다. 쟈니 윤과 염문도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서울서도 '지희살롱'을 경영해서 몇 번 가 보았으나 그 후로는 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하여 자주 못갔다.
지희씨는 엑조틱한 서양적인 미인형이다. 마침 '말띠 여대생'에 출연하기도 하였지만 몸매가 커서 한국 사람들 일반 기준으로는 팔자가 드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고꼬로'는, '기마에' 있는 화끈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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