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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3>장기표와 권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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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3>장기표와 권영길

어느덧 후배들에게 술 사주는 나이

사람들은 나에게 선배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 동안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 총애를 받고 술을 함께 하면서 교훈이 되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제 그런 선배들은 몇 분 남고는 거의 고인이 되었다. 이제 내가 후배들을 아낄 차례이다. 내 식으로 값싼 대포집에서 술 마시는 것이 고작이지만 말이다.

그 가운데 장기표(張璂杓) 후배와 권영길(權永吉) 후배를 더욱 아낀다.

***깡마른 용모에 뜨거운 정열을 지닌 장기표**

장 후배는 서울법대 후배일뿐더러 거기서 유명한 동아리인 사회법학회(社會法學會)의 같은 멤버이다. 학생운동으로, 노동운동으로, 정치운동으로 이제 50줄에 들어선 지금까지 평생을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의 신념 운동이다.

전태일 사업에 앞장섰으며, 민중당 정책위의장을 했고, 동작에서 국회의원에 두 번 고배를 마시기도 하였다. 내가 5선 도전에 낙선하였을 때 몇몇 잡지에서 낙선기를 써달라기에 나는 내가 낙선한 것은 그렇다치고 장기표씨 같은 혁신계가 하나쯤 국회에 진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랬다가 같은 선거구 출신 의원으로부터 핏대를 세우는 반격을 받았다.

장 후배는 요즘은 신문명정책연구원의 원장으로 정보화 시대의 정치사회 원리를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같이 민중당을 하던 이우재(李佑宰) 당수와 이재오(李在五) 사무총장은 한나라당으로 가서 모두 국회의원이 되었다.

철저한 운동권이고 혁신계지만, 그동안 대우재벌의 김우중(金宇中) 회장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등 많이 변모했다. 얼마 전에 술을 했더니 아주 작은 규모의 기업을 경영하는 경험을 쌓고 싶다고 간절하게 말하였다. 진보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착상이라고 본다. 역시 경제를, 기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만, 진보 정치도 땅에 발을 딛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장 후배와 대포집에 자리를 함께 하고 앉으면 끊임없이 그의 말이 계속된다. 오랫동안 정치를 한 내가 오히려 듣는 입장이다. 주로 이제 정보화 사회가 되었으니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운동도, 진보정치도 모두 모두 말이다. 깡마른 용모에 정열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역시 저런 정열이 있어야 진보 정치도 하고 사회도 개혁할 수 있겠구나 했다.

그런 장 후배가 요즘은 더욱 성숙해진 것 같다. 최근에 빈대떡집에서 자리를 같이 하니 “내가 원래 감투를 좋아한다 아닙니까. 그래서 원장 감투를 하나 쓴 것이지요”(그는 밀양출신이다.)

자기를 객관화하고 자기를 조롱할 줄 아는 것이 인간적 성숙이 아닌가. 그런 정치인은 큰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술마시며 영 말이 없는 권영길**

장 후배와 비슷한 연배인 권영길(權永吉)후배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하튼 걸물이다. 내가 1972년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겨가 보니 그는 사회부 기자로 있었다. 편집국장이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돌려가며 술을 사주는 일이다. 기자들의 사기도 올려주고 의견도 친밀히 듣고···.

그때 30명쯤 되는 사회부 기자와 술을 마시면 끝까지 따라붙어 “국장, 2차 사시오”하는 것이, 권영길 기자다. 술이 장사였다. 산청 출신으로 서울 농대를 나왔다. 그는 그후 파리 특파원을 거쳐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언론노동조합연맹의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의 위원장이 되었다.

내가 노동부장관일 때 그가 민노총 위원장이어서 그때 정부의 입장은 희극적이게도 실세인 민노총을 법적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와 빈번히 만나 술을 마셨다. 민노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사막의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쳐박고 “없다”하며,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이 김영삼 정권까지의 민주화의 한계였다.

그 후로도 권 후배와 술을 자주 한다. 임수경씨의 부친 임판호씨(언론계 때 사회부장)와 함께 하는 때가 많다. 인사동에 있는 혜림이네집으로 알려진 ‘평화만들기’나 종로의 ‘감촌 순두부’가 잘 가는 곳이다. 권후배는 지금도 술이 세다. 마치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듣기만 하지 영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과묵은 생각해 보면 이해할 만하다.

그 쟁쟁한 신문기자들의 운동체인 언노련이 아닌가. 또 진보를 표방하는 억센 노동운동가들의 다양한 세력의 집합체인 민주노총이 아닌가. 진보정치 그룹인 국민승리21도 그 다양성은 두말할 것 없다. 그리고 요즘 진보세력이 모두 모여 진보신당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동서양의 역사로 볼 때 진보정당만큼 이념적인 분파싸움이 심한 곳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지도급 인사는 되도록 과묵할 수밖에 없다.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종합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그에게 습성화된 것 같다. 괜찮다.

아끼는 후배들에게 싼 술만 사주며 이야기를 할 뿐, 물질적 도움을 못 주는 것이 안타깝지만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터에 돈이 별로 없으니 어쩌겠는가.

(다음 회부터는 운치와 격조를 갖춘 술집 마담들에 관한 얘기, '현대의 황진이들'이 이어집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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