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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1>오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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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21>오종식

술의 맛과 멋을 아는 酒仙

***마시며 청담(淸談)을 하는 것이 술마시는 재미**

술 마시는 일을 도(道)의 경지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한 사람이 언론인 석천 오종식(昔泉 吳宗植)선생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술 마시는 것은 하나의 도와 같았다고나 할까. 만약에 주객(酒客)에도 주선(酒仙)이 있다면, 그리고 또 내가 주선을 만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주선은 틀림없이 석천 선생이었을 것이다.

석천은 일본유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한때는 건국초 전진한(錢鎭漢)장관 밑에서 사회부 차관으로 관에도 잠깐 몸 담은 바 있지만, 해방 후 우리의 언론 제1세대 중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논설을 써온 상징적 인물이다. 홍박(洪博)으로 통하던 홍종인(洪鍾仁)씨와 동년배이며 라이벌이나 석천의 학문이 윗길이다. ‘연북만필’, ‘원숭이와 문명’등 철학적 깊이 있는 평론집도 남겼다.

나는 석천의 노년에 그의 귀여움을 받아 마치 수행비서처럼 술자리에 낄 수 있었다. 석천은 우선 술집부터 이리저리 몹시 가린다. 대포집이라도 전시한 음식의 배열 솜씨를 보고 주모(酒母)의 품위를 살펴본다.

술은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서양식으로 가급적 칵테일을 해서 마신다. 청주는 빼고. 여럿이 단체여행을 할 때 석천이 법주에 맥주를 약간 섞어 마셨는데 그것에 석천주라는 이름이 붙었었다. 비율은 1대1이다. 전에 파라다이스가 흔했을 때는 거기에도 3대 1로 진을 넣어 ‘진파라’라고 즐거워했다.

양주는 대개 스카치여서 얼음하고 물이나 소다를 쓰기에 다르지만 우리 술의 경우 적절한 온도에도 신경을 쓴다. 청주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예부터 술에는 거냉(去冷)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이치이다.

안주가 호화스러울 필요는 없다. 꽁치구이도 좋다. 다만 석천은 주모에게 꽁치에 기름을 살짝 발라 자주 뒤집으면서 구워 달라는 식으로 주문이 까다롭다.

술마시는 데는 속도가 중요하다. 너무 빨리 마시는 것은 주도가 아니다. 석천은 천천히 술맛을 혀로 음미하면서 마신다. 전에 수필로 유명한 마해송(馬海松)씨가 마시는 것을 보니 데운 청주 한 글라스를 한 시간 가까이에 걸쳐서 혀로 핥듯이 마시던데, 석천은 그보다는 약간 빨랐다. 연세가 드셔서였겠지만 작은 청주 잔으로 한 잔을 7~8분 또는 10분 걸려 마신다.

***석천의 서울사람 분류법**

제일 중요한 것은 대화이다. 술을 마시며 청담(淸談)을 하는 것이 술마시는 재미다. 그 청담에 석천의 주도는 빛을 발한다. 그렇게 박학하고 구수할 수가 있을까. 모두 거기에 반하여 빨려 들어간다.

“서울 사람이 옛날에는 다섯 분류가 있었지. 재조(在朝)양반이 살던 북촌 사람. 고려대 영문학 교수이던 조용만(趙容萬)씨 같은 사람이다. 재야 양반이 살던 남촌 사람. 남산 딸깍발이라던 이희승(李熙昇)교수 있지 않나. 어물이 들어 오던 마포권 사람. 소설가 박종화(朴鍾和)씨가 거기에 속하는데 어물은 신선도가 중요하니 감각이 발달했지. 그리고 한강 위쪽 말죽거리까지의 사람들. 그곳은 삼남으로부터 오는 곡물의 루트야. 그래서 거기 사람들은 계량에 밝지. 부총리를 했던 장기영(張基榮)씨가 거기지. 마지막으로 서울 한가운데 살던 중인들. 이들이 시골 사람들에게 자기가 권세가와 줄이 닿는다고 아주 능변으로 떠들어대면서 그들의 혼을 빼던 사람이야. 서울 깍정이라고 불리우는···. 말이 청산유수이던 언론인 조풍연(趙豊衍)씨가 거기에 들어가지.”

이런 류의 이야기가 술좌석마다 계속된다.

석천의 주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술집 주모를 어떻게 대하느냐하는 것이다. 주모를 깍듯이 대하면 그대로 되돌아와 그 분위기는 예의 바르고 정중한 것이 된다. 주모를 함부로 대하면 반대로 거칠고 상스러운 분위기가 된다. 요즘 사람들에게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항목이다.

전에 설악산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초입의 아담한 음식점에서 석천은 중년의 주모를 깍듯한 예로 대하였다. 그리고는 술을 마시던 도중 “이 정도의 범절이 있는 집이면 특별한 가양주가 있을 법한데···”하고 넌지시 말해 보았다. 잣술이 은주전자에 나와 잘 마셨음은 물론 그것은 무료였다. 주모는 “점잖은 손님인데 가양주에 어떻게 돈을 받겠습니까”하고 사양했다. 나오면서 석천, “이럴 때 계산 얼마요 하는게 아니야. 사례는 할까요 하는 것이지.”사례란 말이 무료가 된 것 같다.

***“말랐서도 다시 샘솟는 석천이런가”**

동경에 여행을 갔을 때 한국 특파원들이 요쓰야(四谷)에 있는 됫박술집으로 안내했다. 삼나무 됫박에 큰 삼나무 나무통에 든 청주를 따라 마시는데 삼나무 향기가 섞여 향기롭다. 단골에게는 고유됫박을 주는데, 초행이지만 석천에게도 됫박 하나가 지정되었다.

석천, 주인에게 붓과 먹물을 부탁하더니 그 하얀 됫박에 일필휘지 하는게 아닌가. “말랐서도 다시 샘솟는 석천이런가.” 옛 샘이라는 석천 아호의 일본 하이꾸(俳句)를 본뜬 풀이인 것이다. 일본어로는 참 멋이 있는 시구이다.

내가 조선일보에서 정부 신문인 서울신문으로 옮겼을 때 술집 스탠드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 원고와 피고에 모두 변호사가 있어 법적 다툼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게 되는 이치를 아나. 정부 신문은 말하자면 정부측 변호사야. 잘 해 보게. 나라의 발전에는 양쪽이 모두 필요한 거야.”

한번은 속리산에 세미나가 있어 갔다. 캡, 레인코트에 스틱을 든 은근한 멋쟁이인 그는 거기서도 농촌 동네의 대포집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비 개인 후의 산을 바라보더니 불쑥 “자네, 아호 있나. 없으면 청강(晴岡)이 좋은데 어떤가”한다. 미술가 아호 같아 싫다고 되돌리며 석천 같은 운치 있는 아호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러면 나중에 내 호를 쓰게”하고 허락한다. 그래서 여러 증인들이 있는 가운데 내가 석천 아호를 승계하기로 공인이 된 것이다.

석천은 지사적 언론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비록 신채호나 장지연(張志淵 )선생 같은 지사 언론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올바르게 살며 곧은 논지를 펴나가기 위해 애쓴 논객이라 할 수 있다.

4·19 전야 마산에서 소요가 났을 때 당시 한국일보 주필이던 석천은 1면 편집자인 내 앞에서 장기영 사장에게 '마산에 의거(義擧)'라고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객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문장에 관하여 몹시 까다로웠다. 특히 단어는 정확하게 써야만 했다. 각종 큰 사전을 옆에 두고 노년에도 사전을 펼친다. 그리고 할애(割愛)가 “아까운 지면을 내어준다.”고 흔히 쓰는 게 틀렸고, “아깝지만 지면을 내어 넣어 줄 수가 없다.”는 정반대의 뜻이라고 후배를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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