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니찌 특파원으로 60년대 후반 서울 부임**
일본 마이니찌(每日)신문의 특파원으로 요시오까 다다오(吉岡忠雄)씨가 부임한 것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직후였다. 마침 조선일보의 방우영(方又榮) 상무(현 회장)가 간부들을 집에 초청하는 기회에 조선일보와 제휴관계에 있던 마이니찌의 요시오까 특파원도 함께 불렀다.
밴 자동차에 여럿이 타고 가는데 조덕송 논설위원이 요시오까를 처음 보고 "거, 원숭이처럼 생겼는데···."한다. 정치부 차장이던 나는 요시오까가 한국말을 배우고 왔으니 조심하라고 조대감의 옆구리를 찔렀다. 술자리가 거나해진 다음 요시오까는 조대감을 향하여 "논설위원이라는 것은 신문기자의 파장같은 종착역"이라고 슬며시 반격을 했다.
요시오까는 유명한 언론인 신상초(申相楚)씨와 일본 동경제국대학의 엇비슷한 연배인 학생으로 있다가 학도병으로 중국에 갔고, 전쟁이 끝날 때는 해병대 장교로 해남도까지 가 있었다 한다. 거기서 일본 농촌 출신의 무학력의 한 병사가 옷 속을 온통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누벼 입고, 귀국하면 조그마한 농토라도 장만하겠다고 희망에 들뜬 모습을 보았다 한다. 장교이기에 패전이 임박했음을 안 요시오까는 "무엇보다도 몸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요시오까를 나는 '추악한 일본인'이라는 별명으로 사람들에 소개했다. 유진 버딕이 쓴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소설을 보면 동남아의 풍습에 빠져 들어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는 미국인을 반어법으로 '추악한 미국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추장, 된장, 낙지볶음까지 좋아했던 '추악한 일본인'**
요시오까는 한국음식만 먹었다. 고추장, 된장은 말할 것 없고 맵기로 유명한 서린동의 낙지볶음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좋다고 먹으러 다녔다. 술은 주로 대포집으로 사직동에 있던 명월네집, 세종로 귀퉁이 골목에 있던 도라지위스키 시음장 등을 즐겨 찾았다.
도라지위스키 시음장은 해방전의 판을 유성기에 트는 것을 특색으로 하였다. 낡아지자 판에 금이 가서 어떤 때는 "돌아, 돌아, 돌아, 돌아"하다가 손으로 건드려 주면 "간다"고 넘어가기도 하였다. 조그만 잔으로 한 잔 홀짝하면 박가분(朴家粉)을 바른 듯한 여자가 성냥개비 하나를 셈에 보탠다. 그는 그 집을 그렇게 좋아했다. 명동의 뒷골목을 뒤져 해방전 판을 사다가 주기도 하면서···.
서울특파원 다음에는 뉴델리, 모스크바의 특파원도 했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는 한국 라면을 영국에서 사 가지고 타시켄트의 고려인 콜호즈를 찾아 가기도 했다. 그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를 때 고려인들은 "노방초신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것이 조선 고유의 노래며 곡이라고 고집을 부렸단다.
"나는 이 세상의 마른 갈대다. 똑같이 너도 마른 갈대다."로 시작되는 '도네가와 노 우다'라고 해도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고. 그쪽에 사는 카레이스키(고려인) 이야기를 거의 처음 국내에 전한 것이 요시오까가 아닌가 한다.
그 중간에 잠깐 서울에 들렀을 때 장관이 된 언론계 친구가 그를 요정에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명월네 집을 고집하여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본사로 돌아간 그는 마이니찌가 경영난에 빠지자 퇴직 순서가 아닌데도 후배들을 위해 자퇴하고, 다시 한국에 와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더 공부하였다. 그 후 부산에 있는 전문대의 일어 선생을 오래 했고 '부산유정(釜山有情)'이라는 수필집도 냈다.
***요정보다는 대포집**
대포집 아주머니 이야기, "모닥불 피워 놓고···"를 함께 부르며 어울리던 한국 학생들의 애환, 골목시장의 풍경 같은 것은 왕년의 민완 사회부 기자다운 묘사이다.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그는 모스크바 생활을 마치며 환송파티에 모인 러시아 친구들에게 이런 고별의 말을 했다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배웠다.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 하니 강 건너, 산 넘어 그 저 쪽에 있다 한다. 강 건너 산 넘어 가 보니 다시 강 건너 산 넘어 그 저 쪽에 있다 하더라.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니겠는가.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인내하며 살아 갑시다."
70년대 초의 모스크바는 그때 이미 답답하고 희망을 갖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모스크바 특파원을 하기 전까지 그는 일본 사회당 후보에 투표했다 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은 그를 사회당에서 떠나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치밀하다는 것이다. 요시오까가 뉴델리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갈 때 미 국무부는 그를 한 달쯤 미국에 초청을 한 것이다. 그는 그때에 마침 니만 언론연구원으로 하바드 대학에 있던 나를 찾아 왔었다.
요시오까 특파원은 당시의 한국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전설이었다. 살아서 전설의 인물이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역시 그는 끝내 전설이었다. 몇 년전 서울의 친구들은 일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요시오까씨가 별세하고 장례를 잘 치렀다는 부인의 편지와 함께, 죽기 전에 요시오까씨가 모든 정들었던 친구들을 향해 쓴 세상을 하직하는 인사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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