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간 신문 기자가 단명한 이유**
나는 언론인들의 수명과 관련하여 나 나름대로 공식을 만들었다. 석간 신문 기자들은 조간 신문 기자들에 비해 단명하기 쉽다라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신문이 조간으로 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간과 석간이 비슷했다. 석간신문 기자들은 신문을 내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다음에 기사를 추가하고 바꾸는 일은 있으나 오후 1시 전에 석간이 나오고 나면 그 날의 일은 사실상 끝난 셈인 것이다.
그래서 점심에 대개 반주를 곁들이게 되는데, 한국일보, 동아일보에서 필명을 날린 현대 감각파 홍승면씨는 대개 소주 2병이고, 천관우씨는 2병이 보통이지만 초과하는 경우도 있다. 그와 같이 석간 기자들 가운데 많이는 점심 반주를 하는 것이기에 저녁 술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니 과음하는 경우가 많고 수명이 단축되기 십상인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조간신문 기자는 낮에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조간이 나오고 나면 대개 저녁 7, 8시부터 술을 시작한다. 나도 언론계에선 주당 당수급으로 손꼽혔는데 아직도 건재한 것은 주로 조간신문에서 일한 덕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낮술은 거의 안하는 조간의 습성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 천관우 선생이 나의 고교 9년 선배여서 나는 자주 그와 술을 했다. 낮에는 설렁탕에 소주 2병쯤, 저녁에는 허름한 대중음식점에서 소주 4, 5병, 대중음식점이면 되었지 어느 곳이냐는 까다롭지 않다. 소주도 마시는 게 아니라 입안에 한 번에 털어 넣는다.
거구인 그에게 소주 한 잔은 코끼리 비스켓인 것이다. 너무나 조숙하게 35세쯤부터 성주가 된 것 같다. 성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집에 버티고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온다는 것이다. 명절 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명절 때 천 선생 댁에 가는 것이 언론계의 풍속도였다.
***천관우는 城主, 선우휘는 浪人 같아**
설에 그는 일석(一石) 이희승, 각천(覺泉) 최두선 선생 정도만 잠깐 세배 갔다 와서 성주로서 집에 버티고 있다. 그의 아호는 후석(後石)인데 일석에서 한 자 빌린 것이 틀림없다. 집에서 손님과의 주량은 셈을 할 수가 없다. 손님이 갈 때까지, 또는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때까지다. 아마 상한선은 소주 10병쯤 되지 않을까.
한번은 설날 선우휘 씨와 언론계 세배를 돌다가 헤어지려 하니 다음은 어디에 갈 것이냐고 물었다. 천 선생 집이라고 했더니 그도 동행하겠다 한다. 정중하게 맞 세배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이 이야기가 나오니 선우 선생이 몇 살 위인 것이 밝혀졌다. 선우 선생의 그 쑥스러워함이여. 천 선생은 성주, 선우 선생은 낭인 같았다.
천선생은 제천군 청풍의 부잣집 출신이다. 해방 직후 당시 경성대 예과에 들어가서 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니 현상윤 선생님이 "국사를 하려면 오래 걸려서 집이 먹고 살 만해야 하는데…"하고 물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데 흥미롭다.
마침 외삼촌댁이 청풍에 있어 한번 갔더니 천 선생은 미국 유학중이어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그가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런 촌에서 미국 유학생이 나왔다고 국민학교 악대까지 동원되는 행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들이다. 그가 그 때 쓴 그랜드캐년 기행문은 대단한 명문으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천방지축마골피**
천 선생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편집국장, 주필까지 지낸 일급 언론인이자 재야 국사학자이다. 특히 그의 실학 연구는 알찬 것이고, 반계 유형원 연구는 대단한 업적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의 전형이다. 그 강직함은 소문이 나 있다. 동아일보의 언론 자유 투쟁을 시발점으로 그는 재야 반유신 투쟁의 지도자가 된다.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도 맡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을 연상케 하는 강직하고 당당한 투쟁이었다.
그런 강직함이 주석에서는 가끔 호통으로 나타났다. 한번은 이름있는 칼럼니스트 수탑(須搭) 심연섭(수탑은 영어의 스톱을 한자화 한 것이다)씨가 어느 자리에서 "천방지축마골피라는데 천관우씨도 양반이 아닐 것이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천 선생은 심씨를 술집으로 유인한 끝에 자기 집으로 데려 갔다. 그리고는 벼슬을 한 조상들이 적지 않은 족보를 보여 주었다. 그 다음 "이 놈, 네가 나를 능멸했겠다"하고 한 방 날렸다. 그런 호통친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다. 언론계에서 대개 알고 있는 일이다.
그 강직한 선비 천 선생이 전두환 대통령의 간고한 설득에 그만 넘어가 버렸다. 통일문제는 여야가 없는 민족적 과업이라는 명분에 넘어가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자리를 맡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사회에 있어서 통일 문제에도 여야는 있는 것이어서 그후 인산인해를 이루던 재야의 방문객들은 발을 뚝 끊었고 그는 외로운 말년을 마치게 된 것이다.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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