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장례식 기사로 사람들의 심금 울린 명 사회부기자**
언론계에서 조대감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조덕송씨는 6.25전의 이른바 해방 공간에 신문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타고난 사회부 기자라 할 만큼 연파 기사로 필명을 날렸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을 때는, 특히 그 장례식 기사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듯, 그 이야기가 가끔 입에 오른다. 여러 회사의 사회부장을 거쳐 조선일보에 정착해서는 사회부장, 논설위원 등으로 정년퇴직까리 오랫동안 있었다.
되글을 배워 말글로 쓰는 사람. 조대감은 요새식으로는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인데 대졸 뺨치는 지식과 필력을 갖고 있어 사람들이 더욱 감탄했다. 많은 기자들의 모범이었기에 나는 그와 친해지고서는 "신문기자의 모범은 조대감이며, 만약 정치를 한다면, 정치인의 모범은 송남헌씨"라고 내놓고 이야기했었다.
또 공교롭게 송·조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 조대감은 송남헌씨를 스승처럼 모시는 처지이다. 경심(耕心) 송남헌 씨는 해방 후 우사 김규식 선생의 비서실장도 한 바 있고 4.19 후에는 통일사회당의 당무위원장을 하는 등 혁신계의 중신으로 활약했는데 학처럼 깨끗한 인품을 갖고 있다. 최근에 '해방 3년사' 1·2권의 저술로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념하는 심산상을 타기도 하였다.
명 사회부 기자답게 조대감의 술 실력도 대단하다.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데 특히 막걸리 소주 등 대포집을 좋아한다. 그와 어지간히 술자리를 자주 한 셈인데 그는 안주파가 아닌 비안주파다. 심한 주당은 소금만 좀 먹는다고 하는데 그도 거의 그런 급으로 술을 많이 마시지만 안주는 무나 김치 몇 조각이다.
신문 기자 초년 시절에 어울려 보니 주당 선배중에 몇은 냉면 대접에 청주 큰 병 한 병을 모두 부어 넣고, 소독저를 걸친 후에, 그것을 몇 번에 걸쳐 꿀꺽꿀꺽 다 마시는 게 아닌가. 이른바 경음(鯨飮)이다. 고래가 마시듯 하는 것이다.
조대감은 술이 강한 특이체질인 것 같다. 그렇게 마시고도 50이 넘어 종합진찰을 하니 간이 말짱하다는 것이다.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레이하운드를 연상시키는 체구이다.
***"아이고 이제 술을 마시는 것 같군."**
신문사 간부 때는 요정 초청도 많이 받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청운각 같은 곳을 좋은 요정으로 꼽았다. 그런데 말이다. 조대감은 고관의 초청으로 청운각 기생파티에 참석하고서도 나와서는 꼭 허름한 대포집에서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이제 술을 마시는 것 같군."
조대감과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합류한 나는 김성두 위원과 트리오를 이루어 거의 매일 함께 돌아다녔다. 우리들의 합창곡은 일본군가인 '동기의 벚꽃'이다. "너와 나는 동기의 벚꽃/같은 항공대의 뜰에서 핀다/그토록 서로 맹서한/그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너는 왜 저버렸느냐/너는 왜 죽어갔느냐." 군가라지만 어찌 보면 염전(厭戰) 또는 반전의 애조띤 노래로 일본 군가이지만 마음의 거리낌 없이 소리 높이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이른바 18번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면/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에 밤을 잊지 못하네/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는 것/그 옛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이 6.25 직후 폐허인 서울 명동에서 문화인들이 모이던 '은성' 대포집(탤런트 최불암 자당이 경영)에서 술이 거나해지자 담배갑 뒷면에 쓴 즉흥시를, 방송인 이진섭이 샹송 비슷이 곡을 붙였고, 배우이자 가수인 나애심이 처음 부른 것이다.
오랜 후 나애심 자매가 충무로에서 '뚜리바'라는 까페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송지영 선생을 따라가면, 송 선생 인격 때문일 것이지만, 막판에 나애심씨가 이 '세월이 가면'을 불러주었다. 자주 가서 그 노래를 익혔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주흥을 못이겨 의원들이 출신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를 불렀다. 부산은 '돌아와요 부산항', 전남은 '목포의 눈물' 그런 식이다. 서울 차례가 왔는데 '서울찬가'를 부르는 것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고 하여 서울 출신답게 샹송조의 '세월이 가면'을 한 곡 했다. 그랬더니 두말할 것 없이 장내의 감탄, 감탄. 명동에서 탄생하였으니 서울의 노래로 하여도 좋을 듯하다. 박인환 시인은 그 얼마 후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 시가 마지막 시가 되었다.
술자리는 내 노래 다음에 조대감의 '부용산'으로 끝난다. "부용산 오리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회오리 바람타고/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 '부용산'이 작년(1998년. 편집자)부터 언론에 화제가 되고 리바이벌이다. 얼마 전에는 여배우 손숙(환경부장관 잠깐)씨의 남편 김성옥씨가 주도하여 목포에서 '부용산'을 위한 음악회도 열었고 남도에는 그 노래비도 세워졌단다. 그만큼 유명해진 노래인데 조대감이 부를 때에는 잘 몰랐다. 조대감의 성량이 그렇게 좋아 나는 자주 그에게 '부용산'을 청하였다. 나도 '부용산'의 애창자가 되어 버렸다.
***신군부 앞에서 노래 사절**
술에 그렇게 강한 조대감도 여자 문제에는 허하여 그럴 듯한 일이 없었다. 한번은 미모의 여교수가 접근하기에 흥분하여 나에게까지 경과 보고를 하기도 하였으나 종당에는 참담한 꼴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아니고, 조대감을 출세길에 교묘히 이용하려 했던 것.
5.18 사태 후에 사회 각계 간부들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주일씩 합숙 교육을 받은 일이 있었다(연찬이라 했다). 조대감과 내가 함께 갔더니 정호용 당시 육군 참모차장 등 신군부의 실세도 많이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 밤 모두 모여 송별파티를 흥겹게 가졌다.
나는 멋도 모르고 조대감에게 예의 '부용산'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끝내 거절. 그 파티에서 함구로 일관했다.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신군부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그 심정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조대감의 고향은 순천이다. 처음부터 그는 지역색을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런 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국에서 농토가 제일 넓은 곳이 호남, 그러니 대지주제가 발달하였고 그것은 또 소작인이 가장 많다는 뜻도 되지. 그 대지주와 가난한 소작인 사이에서 이른바 호남기질을 운운하는 게 생겨난 게 아니겠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자 조대감은 남쪽 자문위원으로 활약했으며, 그 해박한 지식과 호감 주는 목소리로 하여 일약 텔레비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박 대통령을 만날 기회도 있었다. 그때 언론계에서는 조대감이 박 대통령과 기분 좋게 술 마시던 끝에 2차를 가자고 의기가 투합하여 돈암동쪽 밀주집, 이른바 '석굴암'에 같이 갔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본인은 "뭘"하고만 말할 뿐 시인도 부인도 안하는데 두 사람의 술마시는 방식이 비슷한 것으로 미뤄 보아 같이 간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둘 다 생래적인 막걸리 타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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