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알렉산드리아’, ‘지리산’, ‘관부 연락선’, ‘쥘부채’ 등 비교적 진지한 작품에서 시작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설을 대량 생산한 나림 이병주(那林 李炳注). 요즘 그를 잘 알던 사람들과 회고담을 나누게 될 때 나는 그를 ‘잡놈’이라고 표현한다.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 도덕, 무도덕, 비도덕, 부도덕의 모든 차원을 넘나들며 만물상과 같은 모습을 갖고 살아온 인물이기에 친밀감 가는 뜻으로 ‘잡놈’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도덕의 경계를 넘나든 '잡놈'**
간단히 그의 이력을 보면 하동의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억지로 중매결혼 시켰다. 일본에 건너가 두 대학에서 불문학 공부를 하다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다. 귀국하여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편집국장, 주필 등으로 문명을 날렸다.
중간에 6.25때 인민군에 끌려가 문예공작반으로 특히 ‘살로메’를 연출하기도 하였다고 자랑한다. 또 그가 숨기는 것은 4.19 후 혁신계로 고향 하동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 한 일.
그 나림이 혁신계라고 5. 16 후 2년여 형무소살이를 하였다. 거기서 구상하여 출옥 후 발표해 주목을 끈 것이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이다. 나는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있었기에 그 소설을 지면에 크게 소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맺어진 것이 나림과 나와의 술과 잡설의 인연. 어지간히 어울려 다니며 마시고 떠들었다.
나림은 글 쓴 수입으로 한껏 사치를 했다. 옷도 고급. 빨간색 계통의 넥타이에다 양말. 스웨덴제 볼보 차를 타고 다니며 고급 스테레오로 베토벤을 듣는다. 화식집에서 회에 청주를 마시고는 2,3차는 카페에서 주로 코냑. 물론 맥주홀도 가지만 말이다.
***4.19 직후 혁신계 활동, 5.16으로 2년간 옥고**
그래서 나는 은근히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2년여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출옥하면 마음껏 사치를 하겠다고 작심했다는 것. 하동 소지주 집안의 도련님 같은 발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있을 때는 그에 대한 감정을 숨기기만 한 것 같다. 오히려 김현옥 서울시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과 밀착하였고, 때로는 박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박 대통령이 죽은 후에는 예를 들어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처럼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나림이 국제신문 주필로 있을 때 부산일보 주필은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씨였고, 마침 박 대통령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어서 셋은 죽이 맞는 술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형무소에 2년여 처박아 넣다니… 절치 부심했을 것이다.
관철동에 있는 ‘사슴’도 자주 갔는데 나림의 진주 자랑은 대단하다. 재계에 구인회, 관계에 김현옥, 과학계에 최형섭, 시단에 설창수 씨 등 진주가 제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소설에는 이병주가 있고…”하고 받는다. 그때 그는 “놀리지 마!”하지만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림에게 “나림은 언론, 소설, 술, 여자, 사업, 정치 등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데 나는 겨우 언론과 술 정도만 따라가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탄식 겸 익살로 말하기도 했었다.
***하룻밤에 여성들 '도덕 무장 해제'시켜**
여자. 그 문제는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그야말로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중 탈이 적은 한 가지 에피소드만.
조덕송씨는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위지만 같은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속 함께 몰려다니던 술친구다. 그 조덕송, 별명이 조대감인데, 그 조대감이 3.1 빌딩 뒤 인삼 찻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세금 때문에 찻집이라 하지만 밤에는 어엿한 양주집이다. 중년 마담이 미모나 품위에 수준급이어서 나는 조대감을 격려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조대감은 맥주를 기울이며 “이병주, 그럴 수가 있어”하고 원망을 한다.
사연인즉, 조대감, 천려의 일실로 그 찻집에 나림을 데리고 술을 마시러 갔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나림, 빨간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홀로 나타났고 그가 익살로 말했던 대로 ‘도덕재무장’이 아니고 ‘도덕 무장 해제’. 끝이다.
한번은 각각 해외여행을 하다가 동경 제국호텔에서 함께 묵은 일이 있다. 함께 투숙했대야 나림과 아침 식사를 함께 할 정도이지, 그 후는 밤중까지 각각 바빴다.
나림과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호텔 매점에 들렀다. 우선 아사히신문,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까지는 각자가 집어드는데 나림이 한발 더 나간다. 그가 르 몽드까지 집어드는데 나는 프랑스어가 턱없이 모자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 서점에서 미셸 푸코의 책을 여러 권 샀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푸코가 누군가 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그가 그렇게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느강에 오줌 갈기기 위해' 프랑스 유학 신청**
일본에서 대학시절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으며 프랑스 여행도 했던 나림은 로제 상바르 한국 주재 프랑스대사와 요정 교제를 하던 중 프랑스 국비로 유학을 갈 수 없겠느냐고 말을 건냈다.
상바르 대사는 새삼 프랑스 유학이냐고 의아해 한다. 나림, “아름답다는 세느강에 한번 오줌을 갈기는 쾌감을 위해서…”라고 재치로 대답한다. 상바르 대사도 역시 프랑스 사람다운 약간 비꼬인 익살로 “내가 들은 제일 그럴 듯한 유학이유”라고 프랑스 공부를 주선해 주었다. 나림은 자기가 아끼는 국제신보 때부터 후배인 이종호 조선일보 부장을 유학길에 떠나 보냈다.
프랑스 이야기에 생각나는 게 있다. 내가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한 학년 유학하고 5백권쯤의 책을 사와 그에게 구경시키면서 한 권만 선물로 주겠다고 하니 그중 아주 얇은 책인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집는다. 반년쯤 후 그 책으로 베케트는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나림의 그 안목이여!
그렇게 나림과 술과 잡설로 어울린 인연으로 나는 나림이 70세에 병사했을 때 그를 위한 추도사를 했다. 유명한 소설가인데도 그는 문단 교제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자주 그에게 소설을 너무 대량 생산하지 말고 정성을 들여 문학성 높은 작품을 쓰라고 충고했다. 환갑이 지나면 그러마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러 집 살림과 호화생활 습관 때문에 원고료를 위해 글을 양산해야 했다. 정성을 쏟았더라면 그가 원했던 대로 한국의 시바 료타로에 가까이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만한 체험의 양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소설가를 나는 아직 발견 못했다.
그 후 북한산 기슭에 그의 어록비를 세웠다. 그가 좋아했던 북한산에 관한 수필 구절을 따서 각자(刻字)했다. 송남헌, 박진목, 한운사씨 등과 함께 술을 따랐는데 특히 한 동네 출신인 여배우 최지희씨가 애석해 했다.
“나를 모델로 소설을 쓰겠다고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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