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999년이(이 글은 1999년에 씌어진 것임. 편집자) 죽산 조봉암 선생의 탄신 1백주년이자 사법살인(法殺이라 한다) 40주년이다. 얼마 전 그 기념행사에서 만난 청곡(靑谷) 윤길중(尹吉重) 선생은 그 장사 같던 건강은 어디 가고 병색이 짙다.
진보당 사건이 났을 때 그 간사장이던 청곡은 그러니까 45세가 채 안 된 홍안의 미청년이었다. 진보당 간사장을 한 데 대해 자기는 죽산 선생을 좋아하여 따른 것이지 스스로는 '털이 난 보수'(박경석 전 동아일보 정치부장· 국회의원의 전언)라 말했다는 것이다. 하기는 일제 때 고문(高文)을 합격하여 여러 군의 군수를 지내지 않았는가.
홍안의 미청년 소리를 들을 만했다. 어떤 언론인은 청곡을 여진의 후예라고 판단했다.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각이 지고, 황인종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불그레한 색깔이고… 그런 것이 여진족의 특색인데 청곡은 어느 쪽이냐 하면 그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실 청곡의 고향은 기록상 원주군 문막이지만 그는 어렸을 때 북청에서 그리로 이사했다. 구한말까지 여진족이 취락을 이룬 곳이 더러 있던 지방 출신인 것이다. 청곡은 그 이야기가 나오면 대범하게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마는 것이다.
여하간 청곡은 불그레하니 몸이 장사였다. 단전호흡으로 배와 허벅지가 쇠덩어리 같아 사람들에게 자주 쳐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니 술 실력도 대단할 수밖에. 국회부의장으로 있을 때는 서울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유명한 살롱 마담에게 드러내 놓고 호감을 보여 후배들이 슬슬 놀리기도 하였다.
후배들에게 가끔 술도 샀다. 한정식집에서이다. 한번은 붙임성이 대단한 후농 김상현 의원 등과 어울렸다. 다재다능하고 잡기에도 능한 김 의원은 아호를 후농(後農)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존경하고 형님으로 모시는 김대중 선생의 아호가 후광(後廣)이니 거기서 한 자를 빌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어려서 신동 소리도 들었음직한 청곡은 한학에도 수준 높은 학자급이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후배들을 지도하기 위해 "자네들, 서두현령(鼠頭懸鈴)을 아는가"하고 나온다. 묘두현령(猫頭懸鈴)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알지만 '쥐 목에 방울 달기'를 어찌 알겠는가.
이야기인즉,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해결 못한 묘두현령의 난사를 어린 쥐가 자기 목에 방울을 달고 큰 고양이에게 잡아 먹혀 그 방울이 고양이 배 속에서 소리나게 함으로써 해결했다는 것이다. 청곡은 그런 식의 수준 높은 이야기로 후배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청곡에서 딴 것인지 북청에서 딴 것인지 모르나 청곡 좋아하는 모임인 청우회라는 게 있다. 가끔 선생을 모시고 술대접을 하는데 술이 알맞게 돌면 선생을 지필묵을 준비해 둔 옆방으로 모셔 일필휘지를 부탁한다.
청곡의 붓글씨와 문인화는 높은 경지이다. 청곡은 자기의 붓글씨와 그림을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는 방식으로 많은 덕을 쌓았다. 드물지만 서예전을 열어 거금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청곡이 민정당인 여당에 들어가고부터는 글씨 값이 반 이상 뚝 떨어졌다.
역시 붓글씨는 글씨와 인격이 함께 가는 것이다. 화곡동의 유지인 박시언씨는 북청 출신인데 그가 마련한 청우회 모임에서 나도 '서두현령'을 써달래서 갖고 있는데, 선생의 유명한 진달래꽃 문인화는 염치가 없어 얻지를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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