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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생님들 파이팅!"

한 게으른 학부모가 드리는 편지

지난 주말, 딸아이의 고교 졸업식에 갔습니다. 입시 준비로 힘든 줄 알면서도 애비라고 변변히 도와준 것도 없으니 졸업식에만은 참례를 하는 게 부모된 도리겠지요.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사진 찍느라 바빴던 딸아이는 졸업앨범 등을 제게 맡겼습니다. 그 가운데 파란 색 표지 위에 '추억이란 이름으로'라고 씌어진 대학노트 크기의 책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딸아이 반 아이들이 함께 만든 학급문집이라고 했습니다. '수험 공부만도 벅찼을 텐데 어떻게 학급문집을 다 만들었을꼬'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딸아이는 담임선생님이 주신 선물들을 자랑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이 씌어진 깔개와 무언지 잘 모를 쬐끄만 화장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또 그림엽서에 편지를 일일이 써서 반 아이 모두에게 나눠주셨다고 했습니다. '참, 괜찮은 선생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이 그 학급문집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자기는 그걸 읽으면서 몇 번이나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면서 말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학급문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정말로 책에 폭 빠져 들었습니다.

만들기도 참 잘 만들었습니다. 반 친구 42명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친구를 잘 챙겨주는 사람' '궂은 일에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 '유머감각이 뛰어난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이성 친구를 밝히는 사람' 등등의 베스트2를 골라냈는가 하면('그것이 알고 싶다') 급우 전원의 캐리커쳐와 함께 친구들의 개성을 일일이 적어 넣었으며('끼리끼리 우리끼리') 각자의 장래 소망들을 빠짐없이 수록했습니다.

별명이 '마시마로' 또는 '모스키토'라는 담임선생님에 얽힌 일화들을 4단컷 만화로 그렸는가 하면('숨겨진 모기의 비화') 글솜씨 있는 급우들의 글을 모아 싣기도('우리 글 뽐내기')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가슴에 와 닿은 것은 반 친구 42명이 함께 선정한 우리 반 5대 뉴스('기억 속으로 베스트5')와 학급일기였습니다.

여고 3년생이 뽑은 최대 뉴스는 졸업여행이었습니다. 그중의 한 구절만 옮겨볼까요.

"여행 출발 전부터 소주 한 박스를 들고 가 모든 반의 주목을 받았었는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늘 무뚝뚝하시던 선생님이 그렇게 흥분하시며 술을 드시는 모습은 아이들 모두 처음 봤으며 구XX와 내기까지 하시며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본 우리들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반 전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이XX양의 술주정!! XX는 그동안 쌓였던 한이 뭐 그리 많았는지... 술을 마시는 내내 울고 또 울고 우리 모두 대학 가야 한다며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다"

고등학생이, 그것도 여고생이 술을 마셨다고 탓하자는 게 아닙니다. 저희 세대 때도 수학여행은 적당한 일탈의 기회가 아니었습니까. 술 정도는 다들 했지요. 게다가 고2도 아니고 졸업을 앞둔 졸업여행인데 뭐 어떻겠습니까. 또 자고로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멋쟁이 선생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참고로 담임선생님은 여자 분입니다).

하지만 대학 간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울고 또 울면서 '우리 모두 대학 가자'고 술주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들이 뽑은 2위, 3위 뉴스는 모두 공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야자'라고 하더군요)을 학교에서 하라는 선생님과 독서실에서 하겠다고 우기는 아이들이 맞서다 결국은 선생님은 반원 전체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두 손을 들게 하는 단체벌을 30분이나 내렸답니다. 또 지각한 아이들에게는 5대만 맞아도 눈물이 찔끔찔끔 날 만큼 아픈 매를 때렸다는군요.

학년 초에 선생님은 노트 한 권을 학급에 비치해 두고 누구나 자기 생각을 적으라고 했답니다. 그게 학급일기지요. 아마도 가장 먼저 썼을 것으로 보이는 선생님의 글에서 선생님은 학급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누구나 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고민들을 갖고 있을 터인데 그것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서로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학급일기를 통해 그런 능력을 쌓을 수 있다.

셋째, 우리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서.

학급 문집 맨 뒤에 실린 편집후기('끝난 줄 알았지?')를 읽으면서 학급문집을 내자고 부추긴 배후조종인물도 담임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문집 앞머리에 쓴 이별사('처음처럼')에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시를 인용할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풍부한 분이었습니다. 그 시를 옮겨볼까요.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히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딸아이에게 물어보니 선생님의 교과과목은 지구과학이라고 합니다. 참.

선생님은 결혼기념일 날 아이들과 졸업여행을 떠날 정도로 학급에 열심이었습니다.

학급문집을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나서 참 고마운 선생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뒤늦게라도 딸아이의 학창생활을 엿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기야 제 자식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특별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그런 선생님이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쌀밥에 아무리 뉘가 많아도 제대로 된 밥알이 훨씬 많은 것처럼, 저도 몸담고 있는 언론의 과장ㆍ선정ㆍ추측보도로 모든 선생님들이 촌지교사.폭력교사.부패교사인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래도 아직은 진정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참스승이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가만히 이렇게 외쳐 봅니다(이제 그 선생님의 이름을 밝혀도 되겠지요).

"김현진 선생님 파이팅!"

"대한민국 모든 선생님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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