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벌어질 때는 "우리 한번 즐겁게 놀아봅시다"하고 놀이를 강조하는 박진목(朴進穆)씨와는 대조적으로 이영근(李榮根)씨는 술마시는 것이 한 의식(儀式)인 것처럼 근엄하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머는 주제를 보완하는 자극제 정도이지, 항상 술과 그리고 사명감을 가진 주제는 분리되지를 않는다. 일본의 다도(茶道)는 엄숙한 의식인데, 본래가 그런가 일본에 오래 살아 그런가, 그의 주도(酒道)도 다도와 비슷하다.
그가 일본에서 별세한 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의 장남인 이경섭(李經燮)씨는 한양대학의 금속공학과 교수인데 얼마 전 한 언론기관이 그의 선친에 관하여 문의하자 나에게 물어보라고 소개했다 한다.
간단히 이씨를 소개해야겠다. 그는 충북 청원군의 지주 집안(형님이 한민당 소속 제헌의원 李萬根씨)에서 태어나 청주고·경복고를 거쳐 연희전문을 나와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씨를 따랐으며, 해방 후는 건준(建國準備委員會)의 치안대 창설에 브레인으로 활약하였다.
***죽산 조봉암의 비서실장**
그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씨가 농림부장관일 때는 사실상의 비서실장으로 일했고, 진보당사건이 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립계로 조국통일운동에 진력하였다. 일간지 통일일보(統一日報)를 어려운 가운데 꾸준히 내어 통일운동에 앞장선 것도 큰 업적.
특기할 것은 박 대통령 말기에 마침 김재규(金載圭)씨의 동서인 주일본 공사를 통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박 대통령에 다리를 놓아 외치(外治)와 내치(內治)를 나누는 내각책임제 개헌운동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일(그때 나는 '정경연구'라는 월간 잡지에 그의 이름은 가린 채 그의 주장을 소개했었다)이 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때에 송지영(宋志英)씨의 소개로 동경에서 이 선생을 만났더니 청주의 후배라고 대단히 반긴다. 함께 하꼬네(箱根)의 온천에 가기도 하였다. 자동차로 후지산 밑에 있는 큰 호수가로 가서 기선을 타고 호수를 횡단하며 경관을 즐긴다.
계곡에 있는 고풍스런 모텔로 갔는데 겉은 전원풍이지만 안은 현대식이다. 방마다 탕이 있지만 온천은 대중탕이 좋다고 넓은 공동탕을 간다. 그리고 유까다(浴衣)만을 걸치고 각각으로 된 일본식 술상을 받고 청주를 기울인다.
유까다만 입었기에 서로의 중요한 부분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청주를 기울이며 밤늦도록 국내의 정치개혁을 말하고 민족의 통일문제를 논한다. 그 분위기는 마치 이른바 해방공간이라고 하는, 해방 직후 정부수립 전야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 선생은 그 시대의 추억 속에 살고 있다고도 하겠다.
하꼬네 말고는 아따미(熱海)의 온천에도 갔었는데 아따미는 동경에서 교통이 더 편리하여 사람이 몰려들고 여러 가지로 하꼬네만은 못하다.
***해방 공간의 기억 속에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 애국지사**
동경에서는 교(京)요리라고 하는 교토(京都) 요리집에 자주 갔다. 술 마시는 법도는 같다. 천천히 청주를 마시며 끊임없이 민족 문제에 열을 올린다. 거기서는 스미에(墨枝)라는 웨이트리스가 단골이었는데 이 선생은 한국의 지사(志士) 기풍으로 웨이트리스도 깎듯이 대우한다. 천천히 그러나 매우 정확하게 일본어를 구사하여 한국인의 금도를 보여준다.
한번은 신문을 내느라 어려운 가운데도 국내의 독립운동의 선배 10여분(劉錫鉉, 金載浩, 宋南憲 씨 등)을 일본에 초청하여 융숭히 대접한 일이 있다.
그런 이 선생이니 소설가 이병주(李炳注)씨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창정(蒼丁: 이영근의 아호)과 나림(那林: 이병주씨 아호)은 나이도 얼추 같고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나림이 동경에 와서 술을 무절제하게 마시고 여자들과만 사귀고 돌아다니니 그럴 수가 있느냐고 갈라서게 된 것이다.
나림쯤 되면 민족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일본에 와서 교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기는커녕 주지육림의 생활이니..... 작풍(作風-그는 작풍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이 틀렸다는 것이다.
나는 나림을 도덕·부도덕을 초월하였거나 벗어난 사람이라고 표현했었다. 소설가가 아닌가. 고은 시인이 나림은 이데올로기를 멜로드라마화 한다고 비꼰 것을 읽은 일이 있는데, 나는 거꾸로 그러기에 나림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다. 창정과 나림의 화해를 위해 애써도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 선생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러 몇 번 서울에 왔었으나 서울의 술집에 모시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윤길중(尹吉重)씨 등과 호텔방에서 약간 마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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