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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8>'잡놈성 거물'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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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8>'잡놈성 거물' 김상현

10.26 직후 청와대에 홀연히 나타난 後農

김상현(金相賢) 전 의원을 잡놈성이라 한다면 아마 그는 명예훼손이라고 펄펄 뛸 것이다. 그러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그래도 좋다고 할 것이다.

내가 가장 친밀감을 느끼는, 그러니까 접촉도 많이 했던, 소설가 이병주(李炳注)씨와 김상현 의원을 ‘잡놈’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다. 술을 잘하고 말도 유창하며 잡기에도 능한, 그러면서도 통도 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병주씨와 김상현 의원이다. 고은 시인은 김상현 의원을 “감동 있는 사람”이라고 시인답게 압축해 말했는데 나는 상상력의 부족으로 “잡놈”으로 친밀감을 나타낸다.

그가 형님이라 부르는 김대중(金大中)씨가 미국에 본의 아닌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후농(後農)은 그의 대리인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김상현 의원은 고은 시인이 후농이란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만 말하는데 내 짐작으로는 김대중씨의 아호가 後廣이니까 그를 존경하는 뜻으로 거기서 한자를 따서 후농이라고 자기 아호를 지은 것 같다)

그중 하나로 언론인 공작을 한 것이다. 조용중(趙庸中)ㆍ정종식(鄭宗植)ㆍ이웅희(李雄熙)씨 등 각 사의 언론인 10명쯤을 대상으로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밥집에서 술을 사며 유대를 굳혔다. 어떤 때는 조상현ㆍ안숙선씨등 일급 국악인도 초청하여 국악감상의 시간도 가졌다.

그때 후농은 그렇게 돈의 여유가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재주 좋게 돈을 마련하여 많은 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언론인들에게 포석도 하는 것이다.

술좌석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는 판소리도 하고(역시 전남출신이기에 수준급이다) 재담도 하고, 말하자면 광대처럼 노력하는 것이다. 남도 소리꾼이 소리 중간 중간 재담으로 익살을 떠는 방식을 그는 익히고 있다. 판소리에다 살짝 에로티시즘을 섞어 하면 참 재미있다. 후농은 그런 에로 판소리에도 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그때에 “후농 같은 사람 다섯쯤만 있으면 정권을 도모할 수 있겠다”고 나중에는 적중하게 되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정권이 바뀌는 것은 민심이 밑둥서부터 움직이면 이루어지는 것이고 정치인은 그 물꼬를 트거나 계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 술자리 모임이 오래 계속된 후 그는 슬쩍 모임의 이름을 ‘한의 모임’으로 하자고 제안하였으며 그렇게 통하게 되었다. 결국 김대중씨와 관련된 모임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한의 모임’은 90년대까지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는데 이종찬(李鍾贊)ㆍ박종율(朴鍾律) 등 정치인이나 버그하르트 주한 미국공사도 게스트로 초대되기도 하였다.

박 대통령이 저격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공화당 의원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청와대 빈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홀연히 후농이 나타나 나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 때의 삼엄했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후농의 청와대 출현은 ‘홀연히’란 느낌이다.

그는 나에게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하겠다고 하니 계엄당국에 건의하여 가택연금을 풀어 청와대로 올 수 있게 해 달라. 지난날의 최대 정적이 고인이 된 이 마당에 김대중씨가 조문을 한다는 것은 역사의 한 장을 닫는 것으로 미담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교섭을 제의하는 것이다.

유혁인(柳赫仁) 정무수석과 유족측인 장덕진(張德鎭) 전 장관에게 그 뜻을 전하고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의 결정권은 계엄당국이 갖고 있었다. 답은 부정적이었고 후농이 청와대를 다녀간 후 그에게 통고가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난 후 후농과 그 이야기를 하니 그는 그 아이디어는 자기것으로 김대중씨와는 상의 없이 한 제안이며 만약에 계엄당국이 허락하면 김대중씨를 설득하여 그렇게 밀어붙이려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일이 성사가 되었더라면 권력측과 김대중씨간의 관계에 전향적인 큰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다리’ 잡지 필화사건이라는 게 있다. 30여년전에 후농이 그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김대중계로 몰려 필화사건으로 걸렸으나 결국 무죄가 선고된 일이다. 그때의 판사가 목요상(睦堯相)의원, 피고인이 필자 임중빈(任重彬), 편집인 윤형두(尹炯斗) 현 범우사 사장, 돈줄인 후농이고 변호사는 한승헌(韓承憲) 전 감사원장, 그리고 피고측 감정증인은 나였다.

이들이 매년 한번씩 윤형두 사장의 주선으로 기념모임을 갖고 술을 나누며 그때를 회상한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한 후농이 후광에 의해 공천에서 제쳐지고 지금 빈 들판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정치 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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