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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7>유진산의 기자 접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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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7>유진산의 기자 접대법

평기자 딱 한명을 요정에 불러

“진산(珍山) 선생이 비 오는 일요일 오후 조용히 갔다.

‘진산은 앞에서 보면 빈틈없이 꽉 짜여 있는데 뒷모습을 보면 허하다’는 전 기자협회 사무국장 은종관(殷鍾琯)씨의 인상평이 시각화되어 떠오른다.

허전해 보이는 진산의 뒷모습이 빗속을 사라져 간다. 스핑크스처럼.

진산은 스핑크스. 그를 가리켜 마피아 두목이라고 욕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현실주의적인 타협 정객이라고 긍정적으로 평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산이 던지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다만 지나친 찬사만을 자제하고 있을 줄 안다.

적어도 야당 진영 안에 있어서는 진산은 항상 승리한다는 신호가 계속되어 왔다. 그의 단결력 있는 행동부대 때문에 모두들 진산과는 대결하기를 꺼렸다.

대결에 앞서 심리적으로 위압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진산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 것 같다....“

1974년 4월에 유진산씨가 별세하였을 때 나는 위에 인용한 내용으로 시작되는 추모의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진산(본명은 柳永弼이고, 珍山은 아호인데 珍山이 본명처럼 되었다)은 그만한 거물이었으며, 타계 후에 시일이 지날수록 그가 부정축재는 안 했다는 심증을 갖게 되어 평가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일본의 자민당 구세대 보수정객들은 대개는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리의 구세대 보수 정객도 비교적 그러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위로 김도연(金度演) 유진오(兪鎭午) 박순천(朴順天) 등 당수를 모시고 2인자일 때도 그는 항상 야당진영의 절대적 실력자로 군림했었다. 요즘에는 그런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민주당으로 말하면 권노갑 한화갑에 당외에 있는 김상현씨 등을 모두 합친 정도라고 할까.

진산 선생을 회상하니 생시에 더욱 접촉하여 많이 알아둘 것을 잘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조선일보의 야당출입기자일 때다. 항상 등거리(等距離) 취재를 원칙으로 삼아온 나는 진산에 대하여서도 자주 비판적이었다. 그런 비판적인 일개 기자를 진산이 어떻게 다루었나하는 것이 재미있다.

하루는 당주동에 있는 요정 ‘유성장’에서 만나잔다. 갔더니 진산이 김상흠(金相欽)의원과 둘이서 나 한 사람만을 접대하려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 시간쯤 술을 들며 이야기하던 끝에 진산은 “나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술 마시기 거북할 터이니 젊은 사람끼리 자유롭게 마시게”하고 자리를 뜬다.

십여 일 후 같은 ‘유성장’에서 유치송(柳致松) 의원이 대타로 나왔을 뿐, 같은 형식의 술자리다. 그리고 또 한 시간쯤 후 진산은 같은 말을 하며 자리를 뜬다.

천하의 야당실력자가 평기자 딱 한사람을 요정에 초청하여 대접하는 그 치밀하고도 겸손한 포용술. 꼭 젊은 의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왔다가 한 시간쯤 후 자리를 비켜주는 배려. 모범교본으로 배울 만하다.

1963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산은 출입기자들을 초청하여 상도동 자기 집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가졌다. 전깃불을 나무에 내다 걸고 그 아래서 마시고 담소하는 것은 정취가 있었다. 진산도 여름한복으로 느긋하였다. 그러다가 야당의 대통령후보 문제에 “여론조사 결과를 존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슬쩍 한마디 한다.

나는 조선일보에 ‘진산, 후보에 윤보선씨 지지’라고 단독으로 보도하였다. 그 보도로 김도연씨의 후보사무실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여하간 윤보선씨가 후보가 되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진산이 그때 허정(許政)씨를 의중에 두고 한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진산이 별세하기 1년 전쯤 신범식(申範植)씨가 마련한 술자리에 끼일 수 있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김대중씨가 한반도의 4대국 안전보장안을 내놓아 히트를 치고 있었는데, 내가 그 4대국 보장안의 창안자는 진산이 아니었더냐라고 말을 던지자 그는 아연 활기를 띠고 정열적으로 시국관을 쏟아 놓는다.

흔히 진산은 비전이 없는 것으로 격하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5.16 쿠데타 후에 만난 진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군인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나섰으니, 우리들은 광목을 몇 필이고 풀어 그 시퍼런 칼을 둘둘 감아 무디게 해야 되지.”

그것도 한 지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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