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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5>노태우와 곽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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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5>노태우와 곽정출

노태우, 술잔을 날리다

민정당시절 국회의원들 가운데 술이 가장 강한 사람은 곽정출(郭正出·부산출신), 고원준(高源駿·울산출신)의 두 사람으로 둘은 막상막하의 실력이라는 것이 출입기자들의 평이었다. 주당 K·K다. 곽 의원과 가끔 술을 마셔 보았는데 과연 그의 술 실력과 호기는 대단하여 판을 휩쓸었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야간총무, 줄여서 야총이다.

삼성그룹 출신으로 이병철씨의 귀여움을 받았다는 주변의 이야기인데 그는 단순한 주당이나 주호가 아니라 협기(俠氣)도 있는 남아대장부의 면모도 보였다. 술만 잘 마신대서야 될 말인가.

***야간총무 곽정출**

역시 술을 잘 마실 때는 남자다운 기개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영웅호걸은 주색을 좋아한다는 말이 예부터 있어 왔는데, 영웅호걸인 체 하느라고 먼저 주색에만 빠져서는 큰일이다. 역(逆)은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는 논리학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전두환 대통령이 7년 단임이기 때문에 후임이 누가 될 것인가로 신경이 쓰였었다. 민정당의 서울출신 의원들은 자주 모였고, 유권자들 앞에서는 서로 입을 맞추어 모인 지역 출신의원을 추켜올리곤 하였다.

특히 이종찬(李鐘贊) 의원의 선거구에 가서는 이 의원이 차세대 지도자감이라고 칭찬하였다. 내가 서울지부장을 3년임 했으니까 대개 추켜올리는 발언을 내가 먼저 시작한다. 그러면 통 큰 누님으로 불리는 김정례(金正禮) 의원이 매우 웅변조로 뒷받침을 하곤 했다. 선거구 행사에서는 하나의 관례였다.

그런데 타 지역 출신 의원 한 사람이 서울의 행사에 와보고는 놀란 듯했다. 아니 얼마간 착각을 한 모양이다. 서울 출신들이 이종찬 의원을 차세대 지도자로 옹립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말이다. 하기는 이 의원의 그 후 행적을 볼 때, 주변의 칭찬이 그가 큰 뜻을 갖게 일조하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후계자 지명시기가 가까워 올 무렵, 나는 장세동(張世東) 안전기획부장이 만나자기에 안기부로 가서 이종찬 의원을 단념하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나는 선거구 행사에서의 관행이 그렇게 칭찬하는 것인데 착각들 한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전 대통령에게 불려가 같은 설득을 당하였다. 나는 그 때 이종찬씨를 문교부 장관을 시키면 학생 설득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엉뚱하게 역으로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서울 의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 말고는 김정례 의원이 설득을 당한 것이 밝혀졌다. 그럴 법하다. 김 의원은 안현태(安賢泰) 청와대 경호실장과 전 대통령의 순서였다.

여하튼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후계자로 내정이 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리고 종로구청앞 한정식집 장원에서 시도 지부장들의 회식이 있게 되었다.

***"왜 군인끼리 해먹느냐 말이야"**

노 대표가 오기 전인데 곽정출 부산 지부장이 무언가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얼 구덜대나 하고 귀를 기울이니 “왜 군인끼리 대통령을 해먹느냐 말이야. 설혹 그렇다 할 때도 왜 동기끼리냔 말이야.” 라고 대담한 불만을 말하는 게 아닌가. 참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노 대표가 오고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노 대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며 잘 부탁한다는 뜻을 표한다. 술잔을 비우고는 가까이 있는 사람은 두 손으로 반배를 하였고, 먼 데 있는 사람은 가까이로 가서 허리를 굽혀 반배를 하였다.

그런데 계속 떫은 표정이던 곽 의원은 반배를 하지 않는 것같다. 아마 옆 사람과 볼멘소리를 계속했는지 모르겠다. 또 있다. 모두가 일어서서 축배를 들 때도 일어서지 않았다.

갑자기 노 대표의 술잔(작은 잔이었다)이 곽 의원에게 날라 모두들 깜짝 놀랐다. 술잔은 옆에 있던 고건(高建) 전북 지부장의 어깨를 스치고 떨어졌고, 모두는 모르는 척했다. 흥이 식은 채 술자리는 잠시 계속되다 끝났다. 곽 의원의 무슨 사과발언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만약에 곽 의원의 주장이 공론화 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상당한 파문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민정당 창당 때 정책위의장으로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가 많았다. 그때 나는 민정당은 군과 민의 동반자 관계인데 처음은 군이 상위 동반자, 민이 하위 동반자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민이 상위 동반자, 군이 하위 동반자가 되는 변화와 함께 정치가 발전할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런 이야기가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매우 크게 보도되어 민정당안 군 출신 강경파의 눈총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나도 미처 곽 의원과 같이 민으로 옮기든지, 군의 후배기로 내려가든지 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나는 그 후로 곽 의원을 만나면 항상 찬사를 보냈으며 부산사람들을 마주치면 부산에 인물났다고 선전을 해왔다. 그 후 곽 의원은 공천에 불이익을 당해 국회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14대 선거에 내가 낙선하니 위로 술을 사준다. 곽 의원은 법대의 후배인데, 육법전서만 왼다고 하는 법대에서 그런 협객이 나온 것은 특기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론 국회의원 열전(列傳)에 올라야 할 인물이다.

곽 의원의 용기를 두고두고 생각해 본다. 물론 본인의 성격이 제일 첫째다. 그것 말고 정치를 하기 전, 곽 의원이 삼성그룹에 있을 때 설립자의 총애를 받았었다는 것이고 보면 그로 인해 배짱도 두둑해졌을 것이다.

곽 의원의 출신 선거구가 부산이라는 것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부산은 한국 제2의 항구도시. 항구사람들은 통이 크다고들 말한다. 또 무역업·해운업·어업등 돈 버는 방식도 내륙지방과는 달리 손이 커서 정치인들에의 자금후원도 두둑하다.

그러기에 그런 곳 출신 의원들은 상대적으로 볼 때 통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곽 의원의 호쾌한 음주도 여러 사람들의 속마음을 파악하는 데, 그러니까 여론수집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부러운 상상이다.

***노태우 대통령과 대포집 불발**

노 대통령과는 여럿이 술마신 적은 많아도 조촐하게 마신 적은 없다. 그가 체육부 장관일 때 나는 국회 문공위원으로 있었다. 위원회가 정회하였을 때 한가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린동 대포집 이야기를 하였다.

재개발 전의 서린동에는 대포집이 많았고, 그중 한집은 드럼통 위에 끓이는 조그만 뚝배기로 유명하였다. 그 당시는 막걸리였고 북어포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광주출신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성태 의원은 특히 그집을 좋아하여 함께 막걸리를 즐겼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노 장관 꼭 한 번 같이 가잔다. 약속을 한 셈이다.

그 후 무소식. 나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 어느 날 마주쳤더니 “참, 내가 남 의원과 약속 안 지킨 것 있어요. 서린동 대포집….”하고 말한다. 약속은 안 지켰지만 대단한 기억력이고, 그것도 성의이다.

대포집을 갈 줄 아는 정치지도자. 나는 그런 지도자를 바란다.

('남재희 회고 - 文酒 40년'은 이번 주부터 월·수·금 연재 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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