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있던 이야기는 내가 전에 다른 곳에 쓴 적도 있고 또한 신문에도 난 적이 있었지만 한 곳에 모은다는 뜻으로 재탕을 하여 보겠다.
민주정의당을 발기하던 때의 이야기다. 각 시도당의 조직책들은 청와대 옆에 있는 이른바 안가에서 전대통령과 상견례를 겸해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마침 나는 서울특별시의 조직책이어서 순서상 전 대통령과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초면이라 처음엔 긴장하였으나 술이 들어감에 따라 분위기가 부드럽게 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주고 받게 되었다. 전 대통령의 호방한 보스기질이 그렇게 유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전 대통령과 마주 앉았기에 자연 나도 많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분위기에는 좀 엉뚱하게 “각하, 김지하 시인을 석방해 주십시오”라고 불쑥 청을 하였다.
나는 조선일보 문화부장 시절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신교수의 부인’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기에 박경리 여사를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김지하 시인은 박 여사 무남독녀 외동딸의 남편.
그 며칠 전 신문에 보니 박 여사의 수필이 실렸는데, 그런 사위가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자연 비장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좋은 분위기를 틈타 좀 뜻밖이라 생각될 요청을 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 김지하 시인이라…”
“아, ‘토지’라는 소설로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박경리 여사의 무남독녀 외딸의 남편입니다. 최근 신문에 보니 박 여사가 비감한 내용의 수필을 썼던데 마음이 안 되었습니다.”
“‘토지’말이요. 우리 애들도 읽고 있던데…. (주변을 보며) 석방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 전에 박 여사를 한 번 나도 뵙고 싶은데 그렇게 해보세요.”
그러자 군 출신으로 정당에 참여한 실세가 “각하, 우리도 검토해 보았는데 아직은 이릅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고 비틀어 버린다.
“석방하라면 해. 박 여사도 만나게 하고….”
역시 전대통령은 듣던 대로 화끈하고 시원하다. 정치적 판단은 별개로 하고 성격만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김지하 시인은 석방되었다. 물론 가까운 시일 안에 석방될 것이었지만 그 술자리에서의 청으로 석방이 당겨진 것은 틀림없다.
그 후 몇 번 김지하 시인을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만났지만 나도 그런 이야기는 안했고 김 시인도 별말이 없었다. 저항의 시인이 혹시 그 일을 알았다 한들 무어라 말하겠는가.
상당히 오랜 후에 그 일이 신문의 5공 시절 회고 기획기사에 나왔다. 그리고 한국일보 김성우 고문의 출판기념회에서 박경리 여사를 마주쳤더니 “내가 남 선생에게 인사도 못하고 이제까지 지내왔어요.”하고 조용히 말씀하신다.
조그마한 뱃심으로 화제가 될 일을 남긴 것이다.
한 가지 더 정치연구에 참고가 될 일화를 덧붙이면…. 호방한 전대통령은 술자리에서 대단히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한번은 청와대 상춘원에서의 몇몇 당간부와의 술자리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박 대통령 시대후에 김종필씨의 공화당과 유정회가 최규하 대통령을 굳게 뒷받침했으면 군이 거사를 했겠습니까. 공화당과 유정회 따로, 최대통령 따로, 따로 논 게 아니요. 그러니…. 그런 때에는 대통령을 뒷받침했어야지요.”
여하튼 정치역학상은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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