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雲流水-“내겐 축제가 없어요”**
노작가(老作家)에게서 새해를 살아갈 지혜를 구해 보겠다는 기대는 단박 무너졌다. 토지문화관 옆 그의 거실에서 다소 긴 수인사 끝에 원주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니 박경리(朴景利.76)씨는 “내겐 축제가 없어요”라고 답한다. “정초에 다짐하는 일도 없고, 설이라고 특별한 날도 아니고, 그저 그날이 그날”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 해가 가고 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축제라는 것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과장일 수도 있고 하나의 시끄러운 몸짓일 수도 있다”는 것. 6.25 이후로는 설에 떡 한 적도 없다는 노작가는 자기 생일도 거의 모르고 지나갔다고 말한다. “이번에 생일이라고 꽃이 참 많이 들어왔어요. 그게 그렇게 낯선 거예요”라고.
작가는 “내가 손주를 그렇게 이뻐하고 그래도 손주 생일도 잘 몰라요. 딸한테도 한번도 생일 축하를 안 해줬다구요”라고 말한다. 하긴 손주 생일도 모를 정도라면...
경남 통영이 고향인 그가 아무 연고도 없는 원주로 내려와 20년을 산 것은 순전히 외손주 원보 때문이라고 한다. 외동딸 김영주씨와 김지하 시인과의 맏아들인 원보를 못 보게 될 것같아 20년전 딸 내외가 살고 있는 원주로 훠이훠이 내려 왔다는 것이다.(이 말은 작가를 만나기 직전, 김영주씨가 해준 것이다. 그는 지난 해부터 토지문화관 관장을 맡아 일주일에 절반은 어머니 곁에서 지낸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거실 북쪽 벽에는 ‘행운유수(行雲流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달리는 구름, 흐르는 물‘이라. 그래, 산다는 것이 행운유수지, 세월에 금을 긋는다는 게 무에 큰 의미가 있을까.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땅바닥에 내려와 두 발을 딛고 실상을 보라”**
‘그래도 신년기획이랍시고 원주까지 내려왔는데 한 말씀 듣고 가야지’
‘희망’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이 지난 9월 창간하면서 ‘희망을 말한다’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비슷한 무렵, ‘먼저 절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희망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현실이 너무 비참하지 않아요, 꼭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작가는 우리 주위에서 무너져 가는 것들-인간다움, 생명 존중 같은 정신적 가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꼭 소돔과 고모라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욕망의 충족을 사랑이고 자유라고 착각하면서 거짓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욕망은 자유를 저당잡히고 자기를 얽어맨다는 점에서 현실은 분명히 절망적이라는 말이었다.
“현실이 지나치게 희망으로 과장돼 있어요. 또 거기에는 선동적 요소도 있구요. 그래서 실체를 보라는 말이죠. 땅바닥에 내려와 두 발을 딛고 실상을 보라는 말이죠. 거기서 가능성을 찾아야지”
작가는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 편안한가요”
“가난하게 살 때는 행길을 팔자걸음으로 걷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 팔자걸음으로 어떻게 살아요. 전부 뛰어가기 바쁘고. 편안하게 살려고 문명이 발달했는데 지금은 편안하게 살기보다는 전부 사람들이 더 바쁘고 힘들고. 세탁기, 냉장고 있다고 편안합니까. 그게 모순이지요. 편안하려면 지불해야 할 게 생기거든요”
***이광수와 최남선, 그리고 치악산**
“나는 우리가 서구사상을 상당히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합리주의를 맹신하는 것,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주의는 본질 상실일 수 있습니다”
작가가 보기에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는 2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그 첫째는 이광수, 최남선 등 개화파 지식인들의 주체성 상실. “이광수와 최남선이 친일한 거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건 계몽주의입니다” 이그러진 계몽주의에 사로잡혀 우리 전통이라면 무조건 배격한 것, 그것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했다. 삶의 주체인 ‘나’를, ‘우리’를 버렸으므로.
“그때 상황을 보면 기독교와 일본이 우리 전통을 없애려고 했어요. 근데 참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것에 협력한 게 동경 유학파 지식인이었어요” 그러한 식민지적 지식인의 전통은 오늘도 도미 유학파 지식인들을 통해 연면히 내려오고 있다.
두 번째는 합리주의가 은연중 자행하는 삶의 전체성에 대한 부정. “합리주의는 다양성을 다 생략해 버리고 편리한 것만 가지고 좁혀 버리거든요” 작가는 치악산을 예로 들어 서구의 분석적 인식틀의 한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남에서 본 치악산도, 북에서 본 치악산도, 빙 둘러가며 본 치악산도 치악산의 본 모습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지질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치악산의 모든 지질과 생태계를 모두 분석한다고 해서 그것도 분명 치악산은 아니라고 했다. 개념일 뿐이지. 내가 치악산과 직접 온몸으로 부딪쳤을 때 비로소 치악산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일생동안 흙을 만져 온 촌로와 촌부들이 알고 있는 삶의 진실이 학자,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지식보다 훨씬 값지다고 했다. 지난 50여년간 세계가 부러워 할 만큼의 발전을 이룬 것도 바로 이런 보통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가 절반은 기여했다고도 했다.
작가는 삶은 부조리하고 모순에 가득찬 것이라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절망이 있는 거고. 탄생하기 때문에 죽는 거잖아요. 이게 다 등과 배 같은 건데.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고, 이게 누구나 다 겪는 것이거든”
“나는 절망은 안 합니다. 영원히 산다는 건 완성인데 그거는 곧 죽음이다. 왜냐, 영원히 살면은 죽음이 없는데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완성이라는 것은 그냥 정체한다는 거죠”
***예술가와 농사꾼-일과 생명**
“저는 흙을 안 만지면 못 살아요”
‘토지’의 작가답게 그는 “농사는 베테랑이에요”라고 자랑한다. 원주 내려와 20년은 물론 서울 정릉에 살 때도 줄곧 텃밭을 가꿔 왔다고 했다. 흙에 대한 욕심도 대단한 모양이다. 이곳 매지리로 옮겨오기 이전 17년동안 살며 가꾸었던 단구동의 흙이 아까워 ‘내 갈 때 이 흙 모두 가져갈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일할 때 제일 생각을 정직하게 할 수 있어요”라며 “다시 태어난다면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뭔가 손으로 만드는 거, 끊임없이 생각하며 무언가를 키워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농사꾼과 예술가는 가장 통하는 직업이다. 농사꾼이 씨를 뿌려 생명을 기르듯이, 예술가도 자신의 느낌이라는 씨앗에 성의와 애정을 기울여 작품으로 키워가기 때문이란다.
“옛말에 제일 듣기 좋은 게 내 자식 젖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라고 그랬습니다. 땅 자체가 자식 같잖아요. 이게 옛날 분들의 시적인 감수성이고 비유죠. 또 현실을 그렇게 봐 왔고”
오늘의 상황이 절망스러운 것은 바로 그런 예술이 쇠퇴하고, 바로 그런 농사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예술가에게는 정면으로 대항해 나가야 할 것이죠. 유물주의와도 상통인데 물질이라는 거는 실체는 있지만 운동성이 없잖아요. 운동성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물질만 가지고 자꾸 강요를 하는 현실에서 예술이 쇠퇴해 가는 거죠”
농사는 어떤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어졌어요” 생명이 돈으로, 이윤으로만 환산되는 자본주의적 현실,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정치지도자들의 단견으로 우리 농민들도 생명에 대한 외경이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농민들도 농약 뿌리고, 속에 독이 들었건 말건 겉으로는 미끈해 가지고 많이 팔리는 게 최고잖아요. 자본주의로 간 거죠. 위정자들이 농산물을 자본주의로 본 거죠. 이게 농민들의 정신을 파괴했고 농촌의 피폐화로 나타난 거지요”
작가는 20년전부터 한국 기업가들이 할 일로 유기농업을 꼽았다면서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또 어떤 경제학자라는 이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농사를 줄이고 부족한 식량은 외국에서 사다 먹자고 했다는 말에 대해 “돈을 산더미같이 줘도 사 올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며 “그럴 땐 돈 씹어 먹고 삽니까”라고 반문했다.
***작가와 고양이, 담배, 그리고 구멍지기**
인터뷰가 한시간쯤 됐을 즈음, 작가는 “아휴 내가...” 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젯밤 창여연대 박원순 변호사, 환경연합 최열 사무총장 등과 토지문화관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다고 새벽 3시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한 딸을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는 작가는 도라지 담배 한 갑을 들고 자리로 돌아 왔다. “담배들 피우시나요”
우리가 혹 금연파일지도 몰라 그동안 참으셨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작가를 찾았던 우리 모두는 흡연파였다. “XX대 모 교수는 담배를 안 피워, 그 사람만 보면 밉다”며 작가는 한 개피를 꺼내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불을 붙였다. 덕택에 우리도 담배맛을 볼 수 있었다.
인터뷰 첫머리에 작가는 “사실은 제가 남 앞에 서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라고 했다. “상을 받을 때도 단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제가 견딜 수가 없어요. 심지어 아무 단체에도 가입이 안 돼 있거든요. 예술원에도 계속 들어오라고 하는데 모인다는 게 싫어 가지고 ... 성격도 있지만 글을 쓰니까 남하고 만나는 시간은 날아가는 시간입니다.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글을 못 써요”
그는 “나를 미워하는 독자들도 많을 꺼예요”라며 “근데 요즘은 나이도 들고 하니까 뭔가 좀 베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토지문화관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나를 뺏기는 거죠. 아주 그냥 고통스러울 정도로 뺏기는 거죠”라고 털어 놓았다.
작가는 자신을 ‘구멍지기’라고 했다. 나돌아다니지 않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외골수로 파는 사람을 이르는 옛말인 모양이다. 아직 제주도에도 가보지 않았다는 그는 작품을 쓸 때도 작품 무대에 가보지 않고 지도 한 장 가지고 썼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중에 가보면 이상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마침 ‘行雲流水’ 액자 밑으로 엄청나게 살이 찐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학문하는 태도, 구도하는 자세를 묘심(猫心)이라 했다던가. 혼자 있기 좋아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호기심이 많아야 학문이나 수도를 할 수 있다고 했다는데 ‘구멍지기 작가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그런 공통점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작가는 지난 여름부터 소설 하나를 “매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40매 분량까지 나갔는데,
처음에는 수채화처럼 간결하게 쓰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 된다고 했다. ‘장편으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해방 이후 고도로 압축적인 성장을 해 온 우리 사회를 그리려다 보니 목가적으로 깨끗한, 수채화 같은 글이 잘 안 써지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뭐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 많죠. 내 주변에 이야기거리가 많다는 얘기가 아니고, 안에서... 토지를 그렇게 썼는데도 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하긴 전날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제가 기자들을 잘 안 만나요” “토지문화관 얘기나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씀하시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달변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직한 말투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털어놓고 있었다. 마치 옛 아낙이 실타래를 풀 듯이, 아니면 멀리서 들려오는 단소 소리처럼 끊일 듯 이어지며 내면에 잠긴 것들을 하나씩 드러내고 있었다.
서울길이 조급해진 우리는 예정시간을 30분 이상 넘긴 끝에 마지막으로 의례적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계획은.
“칠십이 넘으면 계획같은 거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거지”
***인터뷰 주요 내용(정리-전홍기혜 기자)**
프레시안 : 기자들이 자주 찾아와 바쁘시죠. 저희가 뵙고자 한 것은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도 오는데 선생님께서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어서입니다.
박경리 : 난 연초에 뭐 다짐하는 일도 없고, 설이 특별한 날도 아니고, 생일이라고 특별한 날도 아니고..그저 그날이 그날인 거, 축제가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축제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하나의 과장이나 시끄러운 몸짓일 수 있고.
프레시안 : 한 해가 가고 오는 것에 대해서 별로 큰 의미를 두고 계시지 않는다...
박경리 : 네, 난 추석이라고 송편 만들고 설이라고 떡하고 이런 것들도 6.25 이후에는 안 했어요. 생일도 거의 모르고 지나가고. 내가 손주를 참 이뻐하는데 손주 생일도 잘 몰라요.
프레시안 : 저희가 지난 9월에 창간하면서 유기농을 하는 울진 왕피골이라는 마을에 갔다 와서 ‘희망을 말한다’라는 특집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최근 선생님께서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말할 때’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경리 : 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 희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수식적인 요소가 많지요. 또 절망이 있기에 희망도 있는 거고. 이게 다 등과 배 같은 건데...
내가 절망적이라는 얘기를 왜 했냐면 오늘날 현실이 지나치게 희망으로 과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체를, 땅바닥에 내려와 발을 딛고 실상을 보라는 말이죠. 거기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죠.
희망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현실이 어떤 의미에선 너무 비참하죠. 개발한답시고 무슨 호텔 들어가고 골프장 만들고..이렇게 무너져가는 걸 보면 꼭 소돔과 고모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완전히 이건 소비거든요. 소비는 또 부패고. 그걸 가지고 대한민국이 굉장히 부자나라고 모두가 즐길 수 있다, 이런 것을 희망으로 본다면 참 눈 가리고 아웅이죠.
이게 삶의 진실이 아니잖아요. 인간다움이라든가 생명의 존중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은 전부 퇴화하고....향락이나 쾌락에는 진실이 없거든요. 이건 사랑이 썩어가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거니까. 절대로 사랑은 욕망이 아니거든요. 사랑은 어떤 뜻에서는 희생이고, 희생을 즐거워하는 거죠. 근데 지금 보면 욕망을 사랑이고 자유라고 생각해요. 욕망은 자유를 저당잡히고 자기를 얽어매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절망적이라는 얘기를 한거죠.
프레시안 : 잡지 <녹색평론>에서 ‘참된 문명이라는 것은 자제할 줄 아는 것’이라는 간디의 말을 읽었는데, 이처럼 물질만능주의, 소비만능주의로 흘러가는 것이 우리가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박경리 : 나는 우리가 서구 사상을 상당히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합리주의를 맹신하는 것.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주의는 본질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산업사회의 위정자나 학자, 예술가들이 어거지로 만든 것이 합리화입니다.
예를 들면 치악산을 북쪽에서 보는 사람은 그것만 치악산이다, 남쪽에서 보는 사람도 남쪽에서 보이는 것만 치악산이다, 이렇게 말하죠 그렇다면 영상으로 빙 둘러가며 찍어서 본다고 합시다. 그럼 그게 치악산의 본질이겠는가. 또 치악산에 들어가서 지질이나 생태계를 전부 분석한다고 해서 그게 치악산의 본질인가. 어떤 것을 조합해도 우리는 치악산을 모르는 겁니다. 개념일 뿐이지.
그런데 합리주의는 다양성을 다 생략해버리고 편리한 것만 가지고 좁혀버리거든요. 어떤 면에서 예술가는 합리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해 나가야 합니다. 합리주의는 유물주의와 상동인데, 물질은 실체는 있지만 운동성이 없고 운동성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이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얘기하지만 이광수나 최남선이 친일한 거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건 계몽주의입니다. 일본 유학생들이 돌아와 굉장히 이그러진 계몽주의에 사로잡혀 우리 전통이라면 무조건 배격하고. 그때 상황을 보면 기독교 문화와 일본이 우리 전통을 없애려고 했어요. 근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에 협력한 게 동경 유학파 지식인들이었어요.
프레시안 : 그런 식민지성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고 보십니까.
박경리 : 아직도 있죠. 오늘날 합리주의로 일변하는 것도 그렇지.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식사회에 이런 흐름이 있다면 우리 민중들은 보이지 않게 몸에 있는 창조적인 한류를 뿜어내서 오늘날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합리주의만 가지고 달라진 거라고 절대 볼 수 없죠.
전에 <동양철학과 물리>를 쓴 카프라가 화엄경, 일본의 선, 노자, 장자를 과학적으로 접근해 서구 문명을 극복할 뭔가를 찾으려고 했는데, 우리 산중에 가면 농사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연과 합치되 가면서 획득한 선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인생관이 있는데 머리로 깨달은 것이 아니고 세월이 넣어준 거죠. 카프라는 인식일 뿐이지만 촌로들은 내부에서 녹아나온 것이니까 훨씬 생명력이 있죠.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오늘날 발전에 절반 정도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텃밭을 오랫동안 가꿔 오셨다던데.
박경리 : 저는 농사에는 베테랑이예요. 제가 고추밭을 20년을 가꿨어요. 내가 원주 단구동에서 17년 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일체 화학비료나 농약을 안 썼습니다. 처음에는 수확이 참 적었는데 17년 지나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수확하더라구요. 고추밭이 숲이 되요. 따려면 또랑으로 기어들어가요. 그렇게 고추를 따고 나면 몸이 흠뻑 젖는데 힘들어도 참 좋아요.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겠다고, 뭔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해요. 일할 때 제일 생각을 정직하게 할 수 있어요.
프레시안 : 좀 엉뚱한 질문이긴 한데 쌀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한 방송국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자기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낮은 사람이 농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는데 이런 세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 : 세태를 역행할 수는 없지만 참 안타깝죠. 농사꾼은 감정 자체가 가장 예술가들하고 통해요. 예술가도 기르는 사람이거든요. 농민들이 씨를 뿌려 곡식을 만들어 내듯이 예술가도 없는 것을 만들어 내잖아요. 또 씨를 뿌리고 자랄 동안 애정을 쏟거든요. 그러니까 땅 자체가 자식 같기도 하고. 옛말에 제일 듣기 좋은 게 내 자식 젖 넘어가는 소리와 내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라고 했어요. 이게 우리 조상들의 시적인 감수성이고, 또 그들은 현실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융합으로 봐왔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위정자들은 정치철학이 없어요. 이조 5백년동안 당파 싸움만 했다고 비판하는데 전세계적으로 5백년이나 지속된 왕조가 드뭅니다. 신라 천년, 이조 5백년이 유지된 에너지가 뭔가 살펴볼 생각들은 못하고...
일년쯤 과잉생산을 하면 야단법석이 나잖아요. 또 좀 생산이 줄면 외국에서 들여온다고 콩닥콩닥 난리고...모두 1회전입니다. 3년, 5년, 10년을 내다보지 않아요.
이런 정책으로 농민들 정신이 파괴됐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어졌습니다. 농민들도 농약 뿌리고 속에 독약이 들었건 말건 겉으로는 미끈해 가지고 많이 팔리는 게 최고잖아요. 자본주의로 간 거죠. 위정자들이 농산물을 자본주의로 본거죠. 이게 농민들의 정신을 파괴했고 농촌의 피폐화로 나타나는 거지요.
언젠가 경제학 교수라는 분이 한국의 농토는 천수답이 많기 때문에 기계화가 안 되니까 농사를 줄이고 외국에서 사먹자고 주장합디다. 공업화, 산업화라는 것이 뭡니까. 이 땅을 죽이는 거지요. 지금 지구 온난화로 언제 사막화가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해요. 이런 문제에 요만큼도 대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돈을 산더미같이 줘도 식량을 사들여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돈 씹어 먹고 삽니까, 금 씹어 먹고 삽니까. 썩은 땅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20년 전에 그랬어요. 한국 기업가가 앞으로 할일을 유기 농업을 해라. 유기농업이야 말로 외국에 비싸게 팔 수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멀리 내다보는 대계로 농촌을 생각해야지. 지금 말해봐야 뭐합니까, 다 소용없어요.
프레시안 : 저희가 내년에는 지도자를 뽑습니다. 이 민족 집단에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치러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경리 : 우리가 지도자를 뽑을 때 보면 그 사람이 힘이 있다고 뽑기도 하지만 어떤 환상에 의해서 뽑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건 실체가 아니거든요. 이 사람이 좀 낫다, 덜 썩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점수를 매겨봐야 합니다. 완벽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되죠.
프레시안 : 그동안 선거 때마다 투표는 하셨습니까.
박경리 : 맘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안 할 때가 많았죠. 또 고향사람들은 고향이니까 해달라, 출신고는 출신고니까 해달라, 원주에 와서는 원주 사람이니까 해달라, 이건 작가를 불편하게 하는 거죠. 작가는 어떤 의미에선 코스모폴리탄이거든요. 민족주의까지도 극복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글을 쓰고 공간은 우주적이어야 하고.
프레시안 : 고향에는 가끔 내려가십니까.
박경리 : 아뇨. 어디 다니는 것을 싫어해서. 아직 제주도에도 안 가봤어요. 소설을 쓸 때도 그 무대에 안 가봤어요. 지도 한장 가지고 썼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이상스럽게 맞아떨어졌어요. 여기 원주도 우리 딸 시집보내고 손주 보고 싶어서 아무 연고도 없는데 내려왔어요. 그리고 이십년 살았죠.
프레시안 : 대개 작가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들이 있던데.
박경리 : 있죠. 고향은 감성의 모체죠. 거기서 기본적인 감성은 가져온 것 아닙니까.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들 말입니다. 내 고향 통영은 참 아름다운 곳이죠. 자연하고 예술가는 참 인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 게 전국적으로 예술가가 통영에서 제일 많이 나왔어요. 시인 김춘수, 유치환, 유치진,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
예부터 통영이 공예가 발달했거든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들어가서 거북선을 만들기 위해 팔도에 장인들을 다 모았거든요. 이 사람들이 전쟁 끝나고 나서 그대로 정착해서 목공예, 나전칠기 등이 전국 최고였죠.
또 있죠. 통영갓. 갓 문화를 보면 우리의 미의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어요. 서양에는 베일을 여성에게 했는데 우리는 남자에게 한 거죠. 우리 문화는 투명을 추구했거든요. 흰색을 좋아한 것은 염색술이 발달 못해서가 아니라 투명을 추구해서입니다. 또 전부 날리죠. 갓끈, 도포끈, 치마...외국 양복에 날리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본 옷은 땅에 깔리라고 기모노 밑에 솜을 넣습니다. 모두 지상주의죠.
근데 우리 옷은 모두 날리잖아요. 이건 천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투명하다는 것은 날리는 것과 동의어지요.
이는 우리 국민성이 신비주의라는 것과 연관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샤머니즘의 바탕이죠. 일본은 그 바탕이 공리주의고, 중국은 합리주의입니다.
샤머니즘을 무속이라고 보는 건 잘못입니다. 지금 현대 의학도 생명이라는 신비를 연구한다,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도 그걸 추구한 것입니다. 천년된 나무 속에는 분명히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능동적인 것이며 능동적인 것은 영성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생명과 대화하려는 거죠. 천년이라는 생명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니까. 기복 사상이니까 미신이라지만 종교 자체가 기복 신앙 아닙니까.
프레시안 : 건강은 어떠십니까.
박경리 : 제가 봄에 넘어졌어요. 여기 내려가다가. 그래서 한 2주일 입원했었고 지금까지도 일종의 후유증이 남았는데.
프레시안 : 요즘 소설을 하나 쓰고 계시다면서요.
박경리 : 지금 단편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냥 만지고 있는 거죠. 체질적으로 짧게 쓰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까 장편으로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처음에는 수채화처럼 간결하게 쓰려했는데 그게 우리 한국 현실이잖아요. 식민지 지배도 경험했고, 6.25도 겪었고, 유신시대도 그렇고 의식이나 생활이나 모두 급변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목가적으로 깨끗한 수채화같이 써지지가 않아요. 한 40매까지 나갔는데 매일 들여다보는 거죠.
프레시안 : 몇년만에 다시 쓰시는 겁니까.
박경리 : 그 동안에 에세이는 많이 썼습니다. 소설은 토지 완간하고 처음이죠. 뭐 하고 싶은 거는 너무 많죠. 내 주변에 이야기 거리가 많다는 얘기가 아니고 안에서... 토지를 그렇게 썼는데도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한 것 같아요.
프레시안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는지.
박경리 : 지금은 일 못하지만 봄에는 아침에 다섯시 쯤 일어나서 배추밭에 물 다주고 나면 딱 한 시간 반이 걸려요.
글 쓸 때는 독자들이 너무하다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못 쓰니까. 나이 들어서는 나도 뭔가 베풀어야 하지 않나 해서 토지문화관도 만든 건데... 저한테 짐이죠, 어디 도망도 못 가고... 아유 이제 고만하지, 다 쓰지도 못하잖아,
프레시안 : 긴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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