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지도로 보는 중동분쟁 약사 <상>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지도로 보는 중동분쟁 약사 <상>

美ㆍ英 비호 속에 이스라엘 건국

지도1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1차대전 도중인 1916년 5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 분할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비밀협정이다. 이 협정의 결과 오스만 터키 제국이 갖고 있었던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들은 영국 및 프랑스의 보호령 등으로 분할된다. 이 협정의 이름은 협상 대표였던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전쟁의 근원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 깔려 있다. 미국은 일면 아프간을 응징하면서도 아랍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팔레스타인인의 국가 주권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는 등 평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측의 이러한 평화 제스처는 일부 팔레스타인 세력의 거센 반발로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등 서방의 비판적 지성들은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방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유태인들에 의한 팔레스타인 식민화의 과정이라고 지적하면서 서방 언론들의 극단적 편파 보도로 이같은 진실이 가려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그 증거로 미국 언론에 중동 분쟁에 관한 지도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 건국 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도의 변화를 보면 이스라엘에 의한 식민화의 과정이 한눈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 지도의 변화의 중동 분쟁의 실상을 2차례로 나누어 점검해 본다. 이 지도는 영국 BBC 방송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편집자

유태인들의 환고향운동, 즉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됐다. 이들의 환고향운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19세기 유럽금융을 주물렀던 로스차일드 가문과 와버그 가문을 비롯하여 지배 엘리트 내부에 유태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른바 ‘크리스찬 시오니즘’이라 하여 기독교를 믿는 서구 지배층, 또는 문화계의 인사들 중에서도 유태인들의 환고향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폴레옹을 비롯하여 파머스턴, 로이드 조지 등의 정치가가 그러했고 밀튼, 로크, 뉴튼, 피히테, 브라우닝, 조지 엘리오트 등도 ‘크리스찬 시오니즘’에 속했다.

지도2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며 예루살렘은 국제도시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팔레스타인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태인들의 환고향운동이 본격화된 계기는 발푸어 선언이었다. 1917년 영국은 발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프랑스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영국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러시아에 있는 유태인들의 전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혁명 직후의 러시아는 전쟁 불참을 선언했고 미국은 아직 참전하기 전이었다. 당시 독일 등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펼치고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미국 등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 싸움에서 프랑스에 대한 선제권을 잡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1차대전 당시까지 이 지역은 독일과 한편 이었던 오스만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대영제국 비호 속에 유태인 이주 급속 증가**

1918년 이 지역에는 아랍인이 70만명, 유태인이 6만명이었다. 20년후 아랍인은 1백7만명으로 50% 늘어났으나 유태인은 46만명으로 7배 가까이 증가했다. 유태인의 이주가 이토록 급속히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1차대전 이후 이 지역을 장악한 영국의 보호 덕택이었다. 영국 군대와 경찰의 보호가 없었다면 이 지역 인구의 90%를 차지했던 아랍인들은 유태인들의 이주를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시오니즘은 대영제국의 폭력에 의지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들의 급속한 이주에 경각심을 느낀 아랍인들은 마침내 1936년 4월부터 1939년 9월까지 대규모 저항운동을 펼쳤다. 아마도 사상 최초이자 최대인 이 인티파다(아랍어로 ‘봉기’라는 뜻)를 진압하기 위해 영국은 전투기와 함께 2만5천의 병력을 이 지역에 파견했다.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중(1919-1939년) 영국이 치른 최대의 식민지전쟁이었다. 2차대전이 발발할 즈음 영국은 팔레스타인 정치사회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2차대전후 시오니즘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리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이 지역 인구의 35%를 차지했던 유태인에게는 전체 면적의 55%를, 65% 인구의 아랍인에게는 45%를 할당한 불평등한 조치였다. 향후 더 많은 유태인들의 이주를 예상한 조치라는 설명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같은 결정에 대해 당시 아랍 국가들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반발했으나 미국은 뇌물과 협박 등을 통해 유엔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냈다. 미국은 프랑스에 대해서는 모든 미국 원조의 중단을, 라이베리아에 대해서는 주요 수출품인 고무의 수입금지 조치를 위협하며 찬성표를 이끌어냈다. 또 쿠바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대가로 7만5천달러를 뇌물로 주었다.

지도3
<1949년 제1차 중동전쟁의 결과,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점령한다. 이 지역들은 유엔 결정에 의해 팔레스타인인들의 국가가 세워져야 할 땅이었다. 한편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을 합병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한다는 유엔 결의의 소식이 전해지자 아랍인들의 즉각적인 봉기가 있었으나 이는 현지 유태인과 영국군에 의해 6개월만에 진압됐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자 이튿날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등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제 1차 중동전쟁).

1949년 8월 마무리된 이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주변국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 점령이었다. 이 전쟁 결과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이스라엘을 서예루살렘을 합병했다. 또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점령했다. 이는 전쟁의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이스라엘측의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초래된 결과였다.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통과되기 12일전에 이스라엘 지도부는 요르단에 대해 비밀 거래를 제안했다. 요르단이 서안 지구를 갖는 대신 향후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눈감아달라는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팔레스타인 국가의 탄생을 원치 않았다는 점에서 이같은 비밀 거래는 성사됐다. 당시 요르단 국왕 압둘라는 이같은 제안을 들고 찾아온 이스라엘측 특사에게 “취하기를 원하는 자는 술잔의 수를 세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라를 세우기 원한다면 응분의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당시 이스라엘측은 이같은 제안과 함께 거액의 현금을 뇌물로 주었다고 한다.

***6월 전쟁 이후 이스라엘, 미의 주요 동맹국으로 부상**

이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70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이다. 이스라엘 영토 등에서 살았던 이들 중 대부분은 요르단(이제는 요르단 영토가 된 서안 지구를 포함하여)과 가자 지구로 피해갔으며 레바논과 시리아 등으로도 옮겨갔다. 이러한 대규모 난민의 발생은 사실상 이스라엘에 의한 인종청소였다.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을 자국 영토에서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소유의 땅도 급속한 속도로 유태인 것으로 만들었다. 건국 직전인 1947년 초 팔레스타인 지역의 7%만이 유태인 소유였으나 1950년말이 되면 이스라엘 영토 내 땅 중 92%가 유태인 소유가 된다.

지도4
<67년 6월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영토를 획득한다.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장악한다. 이후 이스라엘은 ‘땅과 평화의 교환’을 외교 원칙으로 내세우며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 체결 이후 시나이반도를 반환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 민족주의 탄생의 자극제가 된다.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탄생 등 1950년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는 아랍 민족주의가 뜨겁게 불타오른다. 1956년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자 운하의 원 소유주였던 영국,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한다(제2차 중동전쟁). 그러나 미국과의 상의 없이 단행된 이 침공에 대해 아이젠하워 정권은 대노, 국제적 압력을 넣어 3국 군을 철수시킨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에는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이 소련의 품에 안기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작용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번에는 미국의 사전 묵인을 받아내 이른바 6일전쟁을 일으켜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공군력을 철저히 궤멸시킨다(제3차 중동전쟁).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장악하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며,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시킨다. 이리하여 근대 역사상 최장의 군사점령(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대한)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은 올해로 35년째가 된다. 전쟁 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점령 영토를 반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한다.

***아랍의 분열-이집트의 대이스라엘 단독 강화**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맹국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집트 나세르의 민족주의적 정권을 격파했으며 주변의 모든 아랍국가들을 합친 것보다도 강력한 무력을 소유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對) 이스라엘 원조 총액 중 99%가 1967년 이후에 제공됐다는 사실이 이같은 미.이스라엘 관계의 결정적 변화를 잘 말해준다.

6일 전쟁의 참패로 절치부심하던 이집트와 시리아 등은 1973년 10월 6일, 유태교의 명절인 욤 키푸르에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제4차 중동전쟁). 예기치 않은 기습 공격으로 전쟁 초반 이스라엘은 곤경에 처했으나 공중, 해상을 통한 미국의 어마어마한 군수물자 조달과 전투기, 탱크 등의 지원에 힘입어 10월 말경에는 아랍측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게 됐다. 욤 키푸르 전쟁, 또는 라마단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또한 제1차 석유 쇼크의 계기가 됐다.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미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평화조약을 맺는다.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평화조약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미국의 대외 군사 및 경제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 된다. 특히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체 대외 원조중 40%를 받고 있다. 최근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 원조액은 연간 35억 달러에 이르며 이밖에 다른 루트를 통해 약 10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받고 있다. 3년후인 1981년 사다트는 이집트의 대 이스라엘 단독 강화에 반대하는 이집트인에 의해 암살당한고 만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