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예는 폭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우리가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것은 정직한 시민들에게 두 가지의 임무를 남겨놓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뭔가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이런 정책이 추구되고 있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원인은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고 봅니다. 걸프 지역은 세계 주요 에너지 자원의 보고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비교불능의 전략적 자원이며, 어마어마한 부의 원천이고, 따라서 누구든 그 지역을 통제하는 사람은 엄청난 부에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너지 자원의 장악은 세계정세를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자원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지요. 더욱이 중동의 에너지 자원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앞으로 중요성은 더 첨예하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되고 있습니다.
석유 에너지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사실은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상당한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의 영국은 직접적인 점령으로 이 지역을 통제할 만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국의 능력의 밖이었지요. 그래서 다른 수단에 의지하게 됐습니다. 하나는 공군력이고, 다른 하나는 독가스입니다. 그 당시에 독가스는 최악의 만행으로 여겨졌는데, 윈스턴 처칠은 쿠르드족과 아프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자고 요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미 중동정책의 핵심은 석유자원 확보**
영국이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져 왔습니다. 1980년경에 이에 대한 기록이, 처칠이 보여준 독가스 사용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함께 공개되었습니다. 저는 영국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이 문제를 거론했지만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 걸프전이 발발할 때쯤에는 영국의 독가스 사용에 관한 정보가 서서히 새어나가기 시작했었지만 처칠의 지령을 영국군이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1992년 영국정부는 국민들의 압력에 의해 “열린 정부”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열린 정부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정부에 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열린 정부’ 정책 하에 취해진 첫 번째 행동이 쿠르드족과 아프간인들에 대해 영국이 사용한 독가스와 그에 대한 처칠의 역할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공공 기록 보관소에서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공개되기 전에 말이죠. 우리가 그토록 자화자찬했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헌신한 덕택에 이제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와 함께 정치적인 협약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1차 대전 중, 식민지 통치를 담당하고 있었던 영국 식민국은 소위 “아랍적 외관”(Arab facade)이라고 하는 것을 구축할 계획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것은 영국을 대신해 현지 주민들을 통치할 현지 정부를 말합니다. 현지 주민들이 이 대리정권의 통제를 벗어날 경우에만 영국이 개입하겠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당시 열강 중의 하나인 프랑스도 포함되어 있었고, 미국은 그 당시 열강은 아니었지만 여기에서 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세 나라는 1928년에 중동지역의 석유 자원을 삼국이 분할한다는 '붉은 선 협정'(Red Line agreement)을 체결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협정에서 당사자격인 중동 지역의 주민들은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랍적 외관’에 의해서 통제되었습니다. 그것이 합의의 기본적 골격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에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강대국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동의 에너지 자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세력이 없었지요. 프랑스는 초라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마지못해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애통하게도 영국의 역할은 점차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평범한 것으로 쇠락했습니다. 지금까지 영국은 그저 미국의 경비견(attack dog)과 같은 역할일 뿐입니다,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경영에 있어서 보조 역할을 하는 것 말입니다. 미국이 서반구(미주 대륙) 석유의 대부분을 통제했다는 것을 덧붙여야겠습니다. 북아메리카는 그 후 25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 공급자로 위치해 왔습니다. 미국은 윌슨 행정부가 서반구의 석유 주요 생산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영국을 몰아낸 이후로 이 지역의 석유 자원을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했습니다.
미국은 영국이 만들어 놓은 기본틀을 유지했습니다. 기본 원칙이 유지됐습니다. 그 기본 원칙은 바로 서방 (여기서는 미국을 의미합니다.)이 반드시 중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동 지역의 부는 서방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과 영국으로 말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에너지 회사나, 투자가들, 오일 달러의 회전과 수출업자들, 건설 회사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미 재무부 등으로 이윤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요지였습니다. 이윤은 서방으로 흘러들어가야 하며, 권력은 서방이 계속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가능한 한 오랫동안 워싱턴이 장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근본 원칙이었습니다.
***대리 정권 내세워 현지 통제**
바로 그런 원칙이 모든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중동 지역의 국민들이 후진적이고 무식하며,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강대국간 합의의 논리, 나아가 이 합의가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네 지역에서 나온 이익이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는 자국민들이 아닌 서방으로 흘러들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따라서 무식한 현지 주민들에게 이처럼 단순하고 명백한 원칙들을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선진국은 끊임없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후진국 국민들은 언제나 골칫거리라니까요.
1953년, 보수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이란 정부가 이 체제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곧바로 미국과 영국은 군사쿠데타를 지원, 샤 체제를 복구시키면면서 이같은 시도를 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이란에 대한 통제권을 크게 확보했습니다.
그 직후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집권하면서 그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곧 주요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나세르는 민족자결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석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세르는 민족자결주의의 상징이었고, 바로 그 점이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국가를 감염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민족자결의 바이러스 말입니다. 이 말은 통상적 용어이며 세계 전략의 근본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시점에, 미국은 영국 세력을 그 뒤에 두고 ‘아랍적 외관’이라는 영국식 체제를 수정하고 확장시킨 독트린을 발전시켰습니다. 닉슨 행정부가 후일에 “순찰중인 현장 경찰"(local cops on the beat)이라고 부른 주변부 국가들에 의한 경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청이 미국에 있긴 하지만 중동 현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현장 경찰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현장 경찰 역할을 한 주요 2개국은 막강한 군사력의 터키와 샤 체제의 이란이었습니다.
***터키ㆍ사우디ㆍ이스라엘ㆍ이란이 기본 축**
1958년,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랍민족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차선책은 “현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친 서방 세력인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미국 세력의 주요 기지가 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같은 CIA의 건의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건의는 1967년에 실행됐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은 아주 중대한 일을 해주었는데요, 즉, 나세르를 격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이러스”를 퇴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랍군대를 섬멸하고 미국의 세력을 상승 기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이스라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3자동맹이 체결됐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기술적으로 이란과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었습니다만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가 있었고, 이란과 이스라엘 (그리고 터키는 당연히)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란은 샤 체제였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파키스탄도 그 당시에는 이 체제의 일부였습니다.
미 정보전문가들과 이 계획의 주도적 인물들은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인식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당시 미 상원에서 중동과 석유문제에 가장 정통했던 헨리 잭슨 의원은 이스라엘과 이란,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할 수만 있다면 미국의 중동 석유자원에(서방의 이윤확보와 세계경영에서의 통제력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중대한 위협을 가하려 하는, 일부 아랍국가들의 무책임하고 과격한 분자들을 제재하고 봉쇄해준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금을 대고 최대의 석유 자원을 보유하는 것으로 그런 임무를 수행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터키, 파키스탄과 함께 현지 군사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의 “순찰중인 현장 경찰”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뭔가가 정말 잘못된다면, 그때는 형님들을 부르는 것이지요. 바로 미국과 영국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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