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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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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1>

"어떤 종류의 평화인가?"

다음은 미국의 석학 노엄 촘스키가 지난 3월 4일 미 오하이오주 톨레도대학에서 행한 '중동지역에서의 평화의 전망' 강연 전문이다.

'정의 없이 평화 없고, 진리 없이 정의 없다'는 부제가 붙은 이 강연에서 촘스키는 중동지역의 갈등과 불화의 중심에는 석유자원의 독점적 확보를 노리는 미국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중동평화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화해 뿐만 아니라 미ㆍ이라크 전쟁 및 터키의 쿠르드반군 토벌 등의 문제해결도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프간전쟁 이후 한편으론 이라크로의 확전을 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상을 외치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를 벌써부터 비판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테러전쟁 배후에는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근원적 요인이라는 점에서 이 강연을 7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감사합니다, 여러분. 마리즈 미하일 강연 시리즈의 첫 번째 연사가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강연을 축사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작금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축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축사보다는 '냉철한 지성으로 회의하되 낙관적 의지로 투쟁하자'는 오랜 격언이 제격인 듯 싶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강연회 개회 선언문을 인용해야겠군요. “평화가 전쟁보다는 낫다.”그러나 이 말은 절대적 명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떤 종류의 평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히틀러가 세계를 정복했다면 평화가 존재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그런 종류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평화인가?**

두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중동 평화에 관한 전망”이라고 하는 이번 주제는 한 가지 측면만을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심각한 폭력이 계속 자행되고 있는데, 특히 세 지역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두 번째는 이라크입니다. 이라크에서는 경제제재조치와 폭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터키와 쿠르드족 문제입니다. 특히 터키와 쿠르드족 문제는 1990년대 가장 심각한 인권 유린 문제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도 해결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산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지역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거의 예외 없이, 심각한 폭압과 인권유린, 고문, 공포가 이 지역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처럼 중동 지역 평화는 여러 가지 상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례 전반에 걸쳐서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대하며, 대부분의 경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입니다. 제가 언급한 위 네 가지 사례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유독 한 가지 요인이 우리들 관심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그 요인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요인에 대해서 개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며, 너무나 명백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진부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명백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범죄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간과하거나 아예 부인해버리는 것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을 조작해서 거울처럼 빤히 보이는 담론을 들여다 볼 가능성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아예 의문조차 갖질 않지요. 더 정확하게 말해볼까요. 우리가 져야 할 책임 문제는 타인이 저지른 범죄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결부될 때에만 거론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지금까지 타인의 범죄 행위가 분명할 때에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딜레마"라고 하는 것에 관해서 대중적, 학술적인 담론이 있었지요. 특히 지난 2년간은 이런 담론이 아주 봇물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에 관한 질문은 거의 한 마디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로 대대적인 학살 사건에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가에 관한 딜레마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딜레마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꼭꼭 걸어 닫힌 창과 같습니다. 창을 걸어 닫지 않으면, 우리가 보지 않아도 될 불쾌한 광경을 바로 코앞에서 봐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하면서도 간과되고 있는 주제-'미국의 역할'**

어떻게 미국의 책임 회피 같은 중심 주제들을 간과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는지는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지만 아쉽게도 이 문제는 그저 배경설명 쯤 되는 경고 정도로 남겨두고, 우리들의 주요 관심사로 넘어가겠습니다. 미국의 이 같은 부끄러운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여야 하겠군요. 사실 그런 자세는 문화적 보편성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과거 역사에서나 아니면 현재 어느 시점에서라도 이와 똑같은 주제가 지배적이지 않았던 때를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생각하는 인간 ‘호모 싸피엔스’로서는 매력적인 특징이하고 할 순 없지만 아주 현실적인 모습이기도 하지요.

현안을 예로 들어보죠. 먼저 이라크를 봅시다. 이라크에 가해졌던 제재조치에 관한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단순히 중범죄인지, 아니면 이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접했던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말 그대로 인종말살 행위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유엔 프로그램 조정관이었던 데니스 할리데이는 자신이 "인종말살적 행위"라고 여겼던 제재조치를 수행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유엔 관리직을 사임했습니다. 그의 후임 한스 본 스페네크도 같은 이유로 사임했지요. 모든 면에서 제재조치의 효과는 사담 후세인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대신 이라크 국민들의 삶은 황폐화시키는 쪽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제재조치를 계속했습니다. 제재조치의 결과가 이러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제재조치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주장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재조치를 정당화하는 가장 단순한 주장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이 했던 말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올브라이트는 2년 전 전국에 방영되는 TV에 나와서 미국의 제재 조치로 인해서 5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 어린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올브라이트는 그 사실에 대해서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었죠. "아주 값비싼 대가죠. 그러나 우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에 대한 토론은 없었습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며, 그에 대한 반응 또한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 말은 그녀가 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한 반응을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공통적으로 하는 주장은 그게 다 사담 후세인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흥미를 자아냅니다. 사담 후세인의 잘못이라는 이 주장을 참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논리로 얻어지는 결론은 따라서 우리는 사담 후세인이 무고한 국민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후세인 개인의 통치를 강화시키는 데 지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태가 사담 후세인의 잘못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를 계속 도와야 한다는 논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라크 위협은 미국이 키웠다**

세 번째 주장은, 적어도 사실이긴 한데요, 사담 후세인이 추악한 괴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토니 블레어, 빌 클린턴, 매들린 올브라이트, 혹은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사담 후세인은 그런 괴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를 살려둘 수 없다는 논리로 제재 조치를 정당화합니다. 후세인은 쿠르드족에 무시무시한 독가스를 살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국민을 상대로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여기에는 세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지원을 받아‘(WITH OUR SUPPORT) 그랬다는 것입니다. 후세인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자기 국민을 상대로 독가스를 살포하고 화학전을 하는 그런 만행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 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미국은 후세인이 미국의 친구이자 교역 파트너이며 동맹국일 때처럼 지원을 계속했습니다. 우리가 보인 반응으로 이미 증명됐듯이 이런 만행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행위였으며, 따라서 미국의 원조는 끊이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했었지요. 여러분이 해보시면 재미있을 실험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생략된 세 단어(WITH OUR SUPPORT)를 우리 사회 주류의 논쟁에서 찾아낼 수 있는지 해보는 것입니다. 그 실험은 여러분을 위해서 남겨 놓기로 하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여러분께 그 실험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서 당장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 세 단어를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후세인의 대랑 살상 무기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됩니다. 흔히들 후세인이 생산해 낼지도 모르는 대량 살상 무기의 위협 때문에 그를 살려둘 수 없다고들 주장합니다. 이 말은 모두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한 가지만 빼고는 말이죠. 즉, ‘우리들의 지원을 받아’라는 말이 빠졌다는 것이죠. 후세인이 현재보다 몇 배는 더 위협적이었던 시절에 미국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수단을 의도적으로 후세인에게 제공했습니다.

네 번째 주장은 사담 후세인이 중동 지역에 있는 국가들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의 세력이 미치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심각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세인이 미국의 지원과 참여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자행했을 때에 그가 위협적이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찌 해볼 수 있는 능력의 한계는 예전에 비해서 훨씬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며칠 전 미국의 폭격에 대해서 중동지역 국가들이 취한 태도는 후세인이 중동에서 위협적인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서 중동 국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 그 위협이 미국만 하겠습니까.

이상이 이라크 제재조치에 관해 그동안 우리가 들어온 논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들을 연장해 보면 미국은 지독한 제재조치를 내림으로써 이라크 국민들을 고문하고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논리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태에서 정직한 시민들은 두 가지의 사명을 띠게 됩니다. 그 하나는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는 지성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태를 야기시킨 실질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기의 실체라는 것이 절대로 저절로 드러날 리가 없기 때문이죠.

***미국은 왜 파괴적 정책으로만 치닫는가**

물론 저는 위협 자체를 경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이 주는 위협을 우려해야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런 위협을 키워가도록 지원했던 기간 동안에는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현재의 문제가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중동 지역의 최악의 폭력 사태와 황폐로 치달을 수 있는 위협, 즉 핵무기 사용에 대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 점은 클린턴 행정부 때 전략 사령관이었던 리 버틀러 장군에 의해서 강조된 바 있습니다. 전략사령부는 핵전략과 핵무기 사용을 담당하는 최고 군기관인데, 버틀러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증오로 뒤범벅된 펄펄 끓는 가마솥 같은 중동지역에서 한 국가가 드러내놓고 거의 수백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비축함으로써 자국을 무장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다른 나라들을 부추겨서 똑같이 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전쟁 억제책으로 핵무기 이외의 다른 종류의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무시무시한 재앙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버틀러 장군이 말한 요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위협에 만약 전쟁이 도발되어 그런 국가를 후견하고 있는 강대국이 “비이성적인데다 앙심을 품었다”고 간주하고, 최악의 폭력수단에 호소할 준비가 됐다고 주장해서 비핵보유국에 핵무기를 사용한 선제공격을 포함하게 된다면 그 불길한 재앙은 몇 배가 되지요. 제가 여기서 클린턴 행정부의 최고 단계의 계획을 담고 있는 문서를 인용하였습니다. 그 계획은 대통령 작전 명령에 의해서 실행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이 만약 누구라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왜 세계가 미국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고자 한다면 기사화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세계는 전쟁 억제책으로 대량 살상 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도록 몰리게 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략 분석가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이며, 미국의 정보기관들과 전략 분석가들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들 역시 인간 생존에 대한 위협은 지금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 추진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전 세계는 이를 미국의 선제공격용 무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따라서 잠재적 적이 전쟁 억지를 단계화 시키는 방법으로 이 전략에 응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미 정보기관과 전략 분석가들이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파괴할 위협을 안고 있는 정책 추진에 목을 매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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