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맹위를 떨쳐 왔던 반(反)세계화 시민운동이 9.11 미 항공기 자살테러를 계기로 반전평화운동으로의 변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부시 미 행정부가 혹시 취할지도 모를 과잉 군사행동에 대한 세계 시민사회의 사전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까지 미국 정부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신중한 대응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지금까지 보여 온 국제 공조에 바탕한 외교적 노력에서 일방적 군사 행동으로 급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반세계화운동의 반전평화운동으로의 전환 여부는 미국정부의 대응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 8월, 미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통화기금(IMF)은 매년 1주일 동안 열려 왔던 IMF 연차 총회의 회기를 단 이틀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1999년 시애틀 이후 갈수록 힘을 얻어 가고 있는 반세계화 시민운동을 염두에 둔 사전 예방조치였다. 최대 10만의 시위 군중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회기를 단축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9.11참사가 발생하면서 올해 IMF 총회는 아예 취소돼 버렸다. 회기 중인 9월 29일과 30일, 백악관 주변 등지에서 대규모 반세계화 시위를 벌이려던 시민단체들도 시위를 취소했다. 엄청난 대참사로 인해 희생자 가족들은 물론 전세계가 애도와 분노에 잠겨 있는 시점에서 대규모 시위를 연다는 게 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대신 시민단체들은 워싱턴 시내 곳곳에서 소규모 반전 집회를 가졌다.
이같은 상황 변화는 9.11참사가 반세계화 시민운동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세계화 시민운동가들은 이번 사건이 세계화 및 반세계화 운동의 장래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우선 이번 사건 이후 미국을 비판하기가 대단히 조심스러워졌다고 털어놓는다. 중국, 러시아를 비롯해 거의 모든 정부들이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을 선언한 상황에서 미국을 비판했다간 테러리스트와 한편이라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마세라타대학의 게나로 카로테누토 교수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미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테러리즘에의 동조라는 비난을 받게 마련”이라면서 특히 “주류 언론들이 이같은 견해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같은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질 경우 반세계화 운동에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언론학 교수이자 언론인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카로테누토는 지난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에서 반세계화 시위를 이끌었던 ‘제노아 사회 포럼’ 소속의 반세계화 시민운동가이다.
반세계화 시민연대측에서는 또 이번 참사가 미국의 군사화를 부추기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군사력에 의한 ‘테러와의 전쟁’을 선택할 경우, 미국의 전쟁경제는 더욱 심화될 것이며 이에 따라 미국의 패권이 강화되면서 세계경제에서도 군사 부문의 비중이 높아질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미국은 국제 사회의 연대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사태가 미국의 일방주의를 약화시키는 대신 다자주의의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상반된 전망도 나오고 있다. 카로테누토 교수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국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면서 따라서 “최소한 국제경제 분야에서만큼은 다자주의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한편 미국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는 지난 1일 발표한 ‘논평’을 통해 이번 사태로 미국의 주도권이 당분간은 강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주도권 강화는 단기적 영향으로 그칠 뿐, 장기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 탈레반 정권의 축출 등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9.11 이후의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잠잠해졌으며 평화운동으로의 전환을 고려중”이라고 진단했다.
그의 진단대로 지금 미국과 유럽에서는 반전평화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9월 29일과 30일 수도 워싱턴에서 반전 집회가 열렸다. 이에 앞서 9월 20일에는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전집회가 열렸다.
이날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위스컨신주 매디슨, 미시간주 앤 아버 등지에서 수백-수천명 규모로 참가한 시위대들은 ‘폭력의 악순환을 우리가 끝장내자’ ‘아프간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등을 외치며 미국의 군사행동에 반대했다.
또 이날 미국 전역의 105개 대학에서도 각각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반전 집회를 가졌다. 대학생들은 또 집회 후에 미국의 중동정책, 이슬람문화, 테러리즘, 평화운동 등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시민단체 평화행동(Peace Action)과 대학생평화행동네트워크(SPAN)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8만5천명의 회원을 보유한 ‘평화행동’의 케빈 마틴 사무총장은 “ 이 극악무도한 범죄의 범인들은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한다”면서 미국의 군사행동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군사행동은 수천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자신의 분풀이를 위해 무고한 목숨을 빼앗는 것은 강대국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테러범들을 군사력으로 응징할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심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영국에서도 지난 9월 22일 런던 시내에서 약 5천명이 참가한 가운데 반전 집회가 열렸다. 이날 참가자들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평화와 정의를’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미국의 군사보복 중단을 요구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부시 대통령에게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겠다’고 말한 것을 비꼰 것이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평화단체 ‘핵철폐운동’(CMD)의 나이젤 챔벌린 대변인은 “우리의 목소리는 미미하다. 서방측의 군사보복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군사보복이 초래할 무고한 인명피해에 대한 불만은 점차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에서도 베를린, 드레스덴 등지에서 반전 집회가 열렸다. 특히 베를린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서는 연일 대학생 등 수천명이 모여 ‘보복 중단, 전쟁 반대’ 등을 외치고 있다. 시위대들은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들이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내고 또 강화시켰다면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요구했다.
이들 반전평화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그 규모도 크지 않다. 또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웬 반전운동이냐’는 일부의 비판처럼 시기상조인 측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부시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는 분명 군사보복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시민사회의 반응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 수 있다.
특히 앞으로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에 따라 국제 시민사회 연대의 반응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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