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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자연은 그냥 자살한 게 아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10>이종걸 민주당 국회의원

이종걸 민주당 국회의원을 만났다. 그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고 그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해 투신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의 후손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민중의 역사가 유달리 가진 자들에 의해서 늘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역사였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말을 외국에서 가져올 만큼 아직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조선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가문의 자손인 그는 지금 어떻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자유란 무엇일까?

"장자연이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다. 몇 달간을 죽음으로 내몰리다 결국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힘 있는 사람이 딱 버티고 서서 권력으로 수사를 왜곡시키고, 죽은 사람 주변을 빗자루질로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더라. 대정부질의 할 때, 00일보, 0사장 이름을 밝혔다고 고소를 당했다. 옆에선 사람들이 말리고 그랬지만 그때 대정부 질문을 안 하면 모를까, 하면 이 사건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장자연 씨와 같은 상황은 아닐지 몰라도, 그러한 성매매 시장에 노출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는 여기에 대해서 크게 문제 제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에 대한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권변호사 시절 어떤 사건이 가장 보람 있었나는 질문에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있었다. 교수가 조교를 성희롱한 사건이었는데, 서울법대 대학원 학생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며 대자보도 쓰고 형사사건으로 고소를 했었는데 전혀 진전이 없었다. 후배들이 나에게 의논을 하러 와서 민사사건으로 소송을 다시 제기해 3년 만에 3000만 원을 받아냈다. 3000만 원 배상 판결난 날이 성수대교가 붕괴된 날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에 성수대교 붕괴 기사와 성희롱 사건 3000만원 배상 기사가 나란히 일면 톱으로 실렸다. 그때 저희 집사람이 귀한 일 해줘서 고맙다고 전화를 했었다. 그때가 가장 보람 있었던 것 같다.(웃음)"라고 답했다. 이때의 보람이 그로 하여금 이후 성폭력 특별법, 가정폭력 특별법 초안을 만들게 하고, 한국 사회 모든 부조리함이 응축되어 있는 장자연 사건에 분노케 했는가보다. 딸 바보. 여기서 왜 이 단어가 떠올랐을까.

"나에게 자유란 서로, 스스로 경쟁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유는 경쟁할 수 있는 상태가 보장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문제는 이러한 자유를 특정한 사람들만 누리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취직 시험을 보면 대부분의 많은 청년들이 다음 기회에 보자는 대답을 회사로부터 듣는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정치인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몇 사람만이 행복한 나라가 아닌 대다수가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현재 청년들의 상황을 볼 때, 내가 무엇을 권유할 만한 입장이 아닌 것 같다. 그저 미안하다."

이 시대 청춘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구조적 문제 앞에 딸 바보의 어깨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다. 한국에서 흔하지 않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지난 총선 때 지역에서의 선거가 굉장히 어려웠다. 떨어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당시에 대기업을 다니다 잠깐 쉬고 있던 친구가 선거를 돕겠다고 왔다. 나는 몰랐는데 친구가 전화홍보팀에 들어가 있었다. 목소리가 나랑 아주 비슷해서 시민들과 통화를 하면 의원님이 직접 전화를 하시느냐고 할 정도였다.(웃음) 결과적으로 내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는데 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일단 할아버지 성묘에 가서 인사하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한테 우호적인 사람 70~80%가 우리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웃음)

▲ 이종걸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역사의 산증인 고모

할아버지가 1932년에 여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돌아가셨다. 고모가 할아버지의 시신을 받았는데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1910년생이시니까 100세에 돌아가신 것이다. 할아버지도 특별하지만, 나에게는 고모가 특히 참 애틋하다. 1910년 8월에 강제병합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을 기다렸다가 전 가족 60여 명이 짐을 꾸려 야반도주하듯 압록강을 건넜다. 우리 집안이 망명할 때 나이가 제일 어렸던 사람이 고모였다. 완전 갓난아기였다고 한다. 그 고모의 남편이 장기준이었는데 이분은 아나키스트 은행털이범이기도 했다.(웃음) 고모부가 기골이 장대하고 신출귀몰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고모는 갓난아기 때 중국으로 넘어가서 중국어를 구사하는데 있어서는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서 일본인과 부딪힐 때 항상 중국인으로 변장하면 통과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어린 고모가 무기를 몸에 지니고 몇 번이고 왕래하며 운반했다고 한다. 간혹 고모가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고모부의 부인으로서만 인정되고, 주체로서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이석영은 재산이 많아서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쓰기도 하였다. 지금으로 보면 6, 7조의 재산은 되었을 것이다. 이석영의 큰아들이 이규준인데 고모의 큰 아저씨이다. 이규준은 변절한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맡은 다물(多勿)단장이었다. 자객이라고 볼 수 있다. 이규준 자신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워낙 많은 사람을 죽여서 피살당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고모가 큰아저씨에게 알려줘서 죽인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누가 변절해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누군가 변절했다는 이야기가 돌면 죽이는 것이었다. 전선 없는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변절한 것을 확인할 것이 없다. 그래서 당시엔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꽤 있었을 것이다. 고모의 동생은 구빈원(救貧院)에서 굶어 죽었다. 2009년에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많이 한탄스러워서 고모 영전에 글을 써서 올린 적이 있다. 밤에 막 쓴 글이라 잘 쓰지 못한 글인데 보좌관이 그 글을 아고라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했다. 고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운 것이 많다.

1932년 아버지가 여섯 살 때, 할아버지께서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을 평생 한 번도 못 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년 뒤에 아버지의 형이 서대문형무소로 잡혀 들어왔다. 큰아버지가 일본인을 많이 죽여서 1심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재판 방청객으로 할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당시에 중형을 받은 사람은 얼굴에 지푸라기로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통 같은 기구)를 씌워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여덟 살 동생을 그 자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지푸라기 사이로 어머니와 동생이 앉아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 형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사형 선고를 받던 그 해 일본 천황이 태어나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무기징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웃음) 내 약혼식 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큰아버님이 당시 이야기를 하셨는데, 재판장에서 어머니 옆에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동생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언제 죽을 줄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서 동생 아들의 약혼식까지 오게 되고, 또 많은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해보니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모인 가족들이 모두 울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아버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당시로는 소학교 1학년 때 만주로 가게 된다. 일본이 만주국 수도로 만든 곳이 신경이라는 도시인데 지금의 장춘(長春)이다. 고모와 고모부가 잠입해서 살고 있는 곳에 아버지가 식객으로 들어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는데, 그 당시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 항일 전쟁 때에 화베이(華北)에서 활약한 중국 공산당의 주력군. 1937년 제이 차 국공 합작 후의 명칭이며, 1947년에 인민 해방군으로 고쳤다)들이 활개를 치던 때여서 지나가는 젊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잡아가는 시절이었다. 팔로군에 아버지가 끌려갔으면 중국 공산당이 되었을 것이다.(웃음) 그런 상황을 피해서 낮에는 집에 숨어 지내고, 밤에 움직이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춘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해방 후 내려온 것이다. 계속 그곳에서 지냈다면 아마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았을 것이다.

내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이다. 이종찬 씨도 128번지이고, 집안사람들 본적이 모두 128번지이다. 알고 보니 할머니가 사셨던 곳이 통인동 128번지인데 셋방이었다. 사실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는 일농(一儂) 윤복영 선생의 집으로, 윤복영 선생이 할아버지를 숨겨준 곳이다. 윤복영 선생은 전 교육부 장관 윤형섭 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당시 할아버지는 상동교회 청년 학우단의 학감이었고, 윤복영 선생은 제자이자 동지였다. 할머니가 임신을 해서 만주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윤복영 선생이 할머니에게 거처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후에 할아버지께서 고마움의 증표로 난이증교(蘭以證交), 이 난초로 사귐의 증표를 삼는다는 의미의 글귀와 난 그림을 부채에 담아 선물하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이상하리만치 공산당과 부딪히셨다고 한다. 공산당에 대해서 무언가 사람을 속박하고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실제로 아나키스트들이 공산주의로 많이 넘어갔다. 김산과 같은 경우도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을 지키셨다. 그러다 1932년에 돌아가셨는데 한편으로는 절묘한 시기라고도 본다. 국내에서의 변절이 주로 1944년에 많이 일어난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1942~1944년에 변절을 많이 한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진주만을 공격하니 일본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변절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고통을 감당해 내야 했을 것이다.

큰아버지의 경우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면서 석방이 된다. 1934년에 감옥에 갇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무기징역으로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것인데 12년 감옥생활을 한 것이다. 해방 후, 정릉 쪽에 집을 지어서 살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고 보니, 집 앞에 옛날 큰아버지를 잡아간 고등계 형사가 또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우리 집안이 아나키스트 활동을 한 것 때문에 공산당으로 몰린 것이다. 사실 아나키스트 활동을 한 사람들이 공산당으로 간 경우도 있고, 구별이 불분명하긴 하여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씁쓸한 것은 세상은 바뀌었는데 우리집안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또 일본의 앞잡이를 하던 사람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웃음)

남다른 가족사가 부담된 적은 없었나?

ⓒ프레시안(최형락)
부담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민주당 당 대표 출마를 생각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종걸이 상품은 좋은데 전혀 존재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근래에 일본 독도 관련 문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존재감을 보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웃음) 그래서 역사문제연구소의 관련자분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학자분들은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극구 말리는 상황이다.(웃음) 역사 하시는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우리 집안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신앙과 같은 정서가 흐른다. 정치를 시작할 때 아버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이런 부분이 부담이라면 부담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 이종걸은 어떠했나?

아버지가 은행을 다니셔서 당시 시골이었던 경기도 안양에서 비교적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친구 집에 TV가 있었는데, 당시 레슬링 선수 김일의 경기가 있으면 항상 보러 갔다. 창문 사이로 보고 그랬다.(웃음) 그 친구 집에 TV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는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허영이랄까.(웃음) 안양에서 피아노를 치면 동네 사람들이 피아노 소리 듣는다고 담벼락에 서서 듣곤 했다. 피아노가 워낙 신기했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집에서 통학하던 학생들은 대개 데모를 하지 않았다. 보통 시골에서 상경한 학생들, 하숙을 하거나 혼자 사는 친구들이 데모를 많이 했다. 부모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기도 한데, 나의 경우 부모의 감시, 감독 하에서 학생운동을 했다.(웃음) 당시 학생운동은 나에게 있어서는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 시절 노동자 야학 운동에서부터 인권변호사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활동을 많이 하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당시 사법고시, 행정고시를 본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반동, 변절자로 찍히는 분위기였다. 사법고시를 보는 것에 대한 양해를 친구들에게 구하고, 이후 민변을 가고 인권변호사를 하는 것은 나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연수원 당시 교수님은 김동건 판사였다. 연수원을 마치고 법원을 가라고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법원이나 검찰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사법고시를 본 것은 운동한 친구들 간의 역할 분담이기도 했기 때문에 연수원 마치고 빨리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를 시작하자마자 박노해 사건, 박노해 사건은 사형선고 구형이 내려진 걸 무기징역으로 바꾸기도 했다.(웃음) 그리고 유서대필사건 등을 맡았는데 그런 나를 연수원 교수들이 안쓰럽고, 짠하게 보는 것 같았다. 특히 김동건 교수가 당시 형사 21부였는데 내가 우연히 형사 사건 하나를 맡게 되었다. 그 사건은 거의 집행유예가 나올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김동건 교수가 집행유예를 내려버렸다. 그리고 재판 후에 나를 부르셔서는 "이종걸! 밥은 먹고 사냐?"라고 물으셨다. 항상 맡는 사건이 시국사건이고 그러니 걱정이 많이 되셨던 것 같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재밌는 것은 이후 내가 김동건 판사의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소문이 교도소 내에 퍼진 것이다. 그래서 이종걸 변호사한테 가면 산다는 소문이 퍼져서 사건이 물밀듯 밀려왔다.(웃음) 그래서 한동안 형사 합의부 사건을 많이 맡았다. 교통사고나 사기와 같은 사건은 단독사건인데 '강'자, '특'자가 들어가는 사건들은 대부분 합의부 사건으로 보통 징역 3년 이상을 받게 된다. 인생이 오고 가는 사건이어서 연수원 갓 나온 사람한테는 맡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경우 어떤 때는 서너 건씩 합의부 사건을 맡기도 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다.(웃음)

맡았던 사건 중 가장 보람된 사건은 무엇이었나?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있었다. 교수가 조교를 성희롱 한 사건이었는데, 서울법대 대학원 학생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며 대자보도 쓰고 형사사건으로 고소를 했었는데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이 나에게 의논을 하러 와서 민사사건으로 소송을 다시 제기해 3년 만에 3000만 원을 받아냈다. 3000만 원 배상 판결난 날이 성수대교가 붕괴된 날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에 성수대교 붕괴 기사와 성희롱 사건 3000만원 배상 기사가 나란히 일면 톱으로 실렸다. 그때 저희 집사람이 딸(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귀한 일 해줘서 고맙다고 전화를 했었다. 그때가 가장 보람 있었던 것 같다.(웃음)

관련하여 장자연 사건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장자연 사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다 최근에는 고소도 당했다.

그 사건을 듣고 참담한 마음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성폭력 특별법, 가정폭력 특별법 초안을 내가 만들었는데, 그 법을 만들면서 여성문제에 관한 이해가 많이 생겼다. 비단 그래서만이 아니라 장자연 사건을 접했을 때, '아, 정말이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연이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다. 몇 달간을 죽음으로 내몰리다 결국 자살한 것이다. 그 과정에 관계있는 사람들 중에 재벌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재벌들이 수사를 막을 수 있지는 못한데, 힘 있는 사람이 딱 버티고 서서 권력으로 수사를 왜곡시키고, 죽은 사람 주변을 빗자루질로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더라.

대정부질의 할 때, 00일보, 0사장 이름을 밝혔다고 고소를 당했다. 옆에선 사람들이 말리고 그랬지만 그때 대정부 질문을 안 하면 모를까 하면 이 사건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모두가 다 00일보 0사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대정부질의를 하는데, 00일보, 0사장이라고 물어봐야 하는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정부 질의를 할 때 사람들도 많았는데 어떻게 이 문제를 안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최소한도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물었어야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 당시 3주 동안 00일보, 0사장 때문에 수사가 진행이 안 되었다. 공개한다, 안 한다 가지고 한 1주일을 보내고 수사도 안 되었다. 이 수사가 죽은 장자연 씨 원혼을 얼마나 달랬느냐는 문제를 떠나서 이건 정말 성(性) 학대의 문제다. 모든 사람이 장자연 씨와 같은 상황은 아닐지 몰라도, 그러한 성매매 시장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배우, 탤런트, 가수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매니저한테 끌려가고, 있기 싫은데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는 여기에 대해서 크게 문제제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조금 더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들어가 보자. 내년 총선, 대선과 관련 야권통합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이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당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는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경쟁한다면 민주당이 힘들 것이다. 더욱이 야권이 결집이 안 된 상태라면 더 힘든 상황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이 한나라당을 왜 이겨야 하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현 정권의 정책을 가지고 몇 년을 지속한다면 김수영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들풀'과 같은 민중들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파키스탄을 보게 되면, 몇몇 독점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나머지 국민들은 교육을 안 시킨다.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국가가 발전하려면 국민다운 국민이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경우 몇몇 계층은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실제 파키스탄에 가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똑똑하고 영리하다. 이러한 국민들을 제대로 교육을 안 시킨다. 소수만 국민으로 인정을 받는다.

현재 한국은 어떠한가? 최근 <경향신문> 기사에서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장인 황창규 씨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의 내용은 한국 경제의 지나친 대기업 편중 현상을 경고한 것이었다. 국가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핀란드의 노키아사(社)가 흔들리면서 핀란드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설명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10대 그룹 자산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8년 55%에서 지난해 75.6%로 높아졌다고 한다. 파키스탄과 무엇이 다른가? 10대 재벌에 참여하는 사람이 국민의 몇이나 되겠는가? 10대 재벌이라는 소수가 경제적 비중으로 따지면 대다수 국민의 창의력과 아이디어, 노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최근에 대만을 방문해서 놀란 것이 전 국민이 골고루 일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발전된 국가라는 사람들의 인식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은 독점화되고 양극화되면서 재벌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 재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세금을 내기 때문에 먹여 살리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참여정부 이후 민주당은 심판을 받았다. 참여정부를 기적적으로 국민들이 만들어 준 이유는 전 국민이 함께 일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어 주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재벌이 활동하기 좋게 만들었고, 민생은 엉망이 되었다. 물론 대기업이나 재벌의 기업 활동에 있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좋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사실 삼성의 경우 참여정부만큼 좋은 기업 환경이 없었다고까지 이야기를 한다.

10대 재벌이 국내총생산 비중 75.6%를 차지하며 재벌과 관련 없는 국민들은 점점 쓸모없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개인이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혹은 발휘하더라도 뺏기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이 무조건 재벌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재벌과 중소기업, 재벌과 국민의 경쟁은 다윗과 골리앗인데 성경에서나 골리앗이 진 것이지 현실에선 경쟁이 안 되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기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시장의 중요성을 많이 이야기했다. 시장은 경쟁이 있어야 시장이다. 그런데 이미 경쟁이 사라져버린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시장이 죽어버린 것이다. 도박판에서도 질 사람과 이길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사기판이다. 도박도 불확실성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경쟁을 할 수 없는 시장에서 시장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은 이미 결정 난 판세에 힘을 실어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현 정권 체제 또는 한나라당 방식으로 국가를 지속해서 운영한다면 정말 나라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일환으로 야권통합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야권통합에 있어서 민주당은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통합 진영 내에서 민주당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기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많은 세력들이 민주당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불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할 만한 것이 민주당은 지난번 정권을 뺏긴 당이다. 먼저 민주당은 반성을 해야 한다. 민주당을 여타 야당이 볼 때, 색깔이 애매하다고 하기도 한다. 한나라당과 차이가 무엇인지도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민주당 중심으로 통합될 수가 없다.

경제민주화를 비롯한 민생안정과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같은 극단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정권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민주당이 하면 못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왜 그런가라고 물으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런 물음에 대해서 철저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충분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야권통합 과정에 있어 민주당이 양보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오늘 김대중 대통령 2주기 모임을 갔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로서 김대중 대통령이 가졌던 꿈이 헛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원대한 목표에 대해서 민주당 내에 많은 분들이 동의를 하고, 자기 헌신도 필요에 따라 하기도 한다. 또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것도 수용하기도 한다. 오늘 모임에 오신 많은 선배들도 2선으로 물러나는 것에 대해 수용하고, 또 후배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이러한 것들이 총화로 모이게 되었을 때,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과욕이 아닌 최소한도 자신의 역할에 대한 생각과 이성, 스스로의 자생력과 순환하는 순환의 에너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민주당의 혁신과 개혁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왔는데 민주당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민주당을 포함한 개혁진보세력이 반드시 집권해야 한다고 보는데, 여기에서 한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정권을 뺏긴 이유를 살펴보면 그 한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국민들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뺏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국민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였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하고, 그 이후 4년 사이 얼마만큼 달라졌는지,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서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이러한 한계를 제대로 잘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문이다. 여전히 민생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민주당이 중심이 되어서 대통합의 진영을 갖추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다. 이전의 민주당과 다르게 대대적인 성찰과 반성, 변화를 보였다면 개혁진보세력과의 통합에 있어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함께 하는 데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여름 일본 자민당 의원의 독도방문 추진 등으로 한국 사회가 매우 시끄러웠다. 평소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치권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독도문제에 관해서 공식적인 정부의 외교노선은 사실상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계속 부풀리게 되면 그 실효적 지배에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조용한 외교노선을 선택하는 것 같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번 일본 극우파 의원들의 행동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행동을 허용했다는 점은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조용한 외교 노선만으로 일관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역사를 살펴보면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해왔고, 심지어는 대마도도 일본인이 살기 전에는 상당 기간 정벌을 해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받기도 했다. 독도를 공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한일강점 시기에 있었던 일이고,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상징적인 초기 행위로서 독도를 일본 영유권으로 표기한 것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 기간인 36년은 사라져버린 역사이다. 한국에 있어서 이러한 역사의 아픔을 안겨준 일본의 초기 행위가 독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한일 간의 역사를 바탕으로 볼 때, 현재 일본의 일부 극우 의원들의 행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선대로 인해 저질러진 이웃 국가의 역사적 아픔에 대해 사과를 하고, 반성해도 부족한 것인데, 오히려 독도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일본 일부 의원들의 행태는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일부 의원의 행동이긴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볼 때 일본이 역사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이번 독도 문제는 우파, 좌파의 문제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조용한 노선을 가야 한다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일본 일부 의원들의 이번 행태에 대해서는 떳떳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에게도 독도문제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조용한 외교노선을 간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외교노선을 잘 운영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 외교부가 독도문제를 대하는 자세나 일본에게 입장을 보이는 방식도 전반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었다. 1차 희망버스부터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한진중공업 문제를 포함, 한국 노동의 문제는 무엇이라 보는가?

한진중공업 문제는 상징적인 문제이다. 경제발전 초기에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대기업들을 지원해주었다. 그래서 이때 대기업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공익을 위해 내놓아야 할 책임을 느꼈다. 그러나 재벌 2세, 3세로 넘어오면서 이전의 재벌 선대가 국민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망각하게 되고, 국민에 대한 부채의식과 최소한의 공공선의 제공에 대한 책임의식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진중공업도 이러한 경제사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한진중공업은 국민 세금으로 성장해 많은 이윤을 누리던 대한조선공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한국 노동의 9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노동은 이미 어려워졌고, 한 10% 정도도 비교적 고임금에 정규직마저 무모한 이유로 사라지는 상황이다. 국민들이 이러한 상황을 갈 때까지 지켜보다 분노한 시점이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라고 본다. 현 정부가 더 나은 일자리와 양극화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기업과 야합을 해서 지원해주는 현상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현재 정리 해고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다른 조선회사로 옮기게 되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가게 되는 것이고, 한국의 사회안전망에 비추어 보아도 재취업에 대한 보장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겪는 상황은 살인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30년, 40년을 한 직장에 종사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꿈을 키워왔던 사람들에게 해고는 살인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김진숙 씨가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강력히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하룻밤 만에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이 새벽 5시까지 골목, 골목에서 계속 몰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는 근저가 무엇인지 희망버스에 참여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1차, 2차, 3차 희망버스에 계속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장에 있으면서 느낌이 어떠했나?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휴일을 온전히 지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개인의 일상을 감당해 나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이렇게 모인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3차 희망버스 때 거리를 둘러보니 누워서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모이는 단위나 성격이 정형화된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절대적 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부산 영도 크레인 앞에 모여 그것을 깨기 위해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것에 희망을 갖고 모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너 번 희망버스로 부산현장에 내려가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만나던 분들을 다 볼 수 있다.(웃음) 어느 정도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작가들도 많이 왔다. 소설이나 글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보기 힘든 작가들도 다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사회 이야기들은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좋은 논의들이었다. 새벽 두세 시쯤 김진숙 씨가 핸드폰을 사용해 연설을 하는데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 교회 부흥회보다 훨씬 강한 청심제를 맞고 가는 것 같았다. 동이 트고 헤어질 때도 서로 아쉬워하고 더 있고 싶어 하는 모습이 나에게 인상 깊었다. 희망버스를 타고 대략 다섯 번 정도 왕래하면 전국에 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볼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정치권이 희망버스를 하나의 이벤트로 삼아선 안 되고, 희망버스에서 나타난 사회적 욕구, 희망들을 미래지향적인 행동강령과 구체적 실천목표들로 정할 생각들을 해야 한다.

관련하여 현재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역사적으로 파트타임,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사회 노동 형태의 일부로서 존재해 왔던 국가와 그것을 일부 차용한 미국과 같은 국가로 그 유형을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유럽의 경우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권 보장의 측면으로서 파트타임 또는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역사적 배경을 가진 국가들이 유럽에는 많다. 반면, 한국 비정규직의 경우는 저임금을 만들기 위한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로 존재한다. 근로계약의 조건을 사용자의 입장에 맞추어 만든 것인데, 상대적으로 힘없는 노동자의 조건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의 비정규직은 사용자 입장에 편향된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는 필립스라는 큰 전자회사가 있고, 또 그 회사에 납품을 하는 중소기업들이 있다. 네덜란드 대학생들에게 어느 회사를 더 선호하느냐고 물었을 때, 많은 수의 학생이 대기업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 형태의 노동이 대기업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파트타임 형태의 일을 대기업에서 하게 되면 공부를 병행하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여러 형태가 노동자들의 선택지를 넓혀 주는 좋은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는 노동자의 근무기간이 길어지거나 임금이 높아지는 경우, 임금을 낮추거나, 노동자를 밀어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대기업 내 파트타임 또는 비정규직이라는 직종이 있어서 더 선호되는 것인데, 한국의 경우 대기업에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나쁜 노동조건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파트타임제가 짧은 시간 노동을 하고 근무 연속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많이 지급해야 해서 사용자들이 불편한 경우가 있다. 같은 비정규직이지만 한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것이다. 한국은 노동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노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노동 문제는 사람에 대한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노동은 곧 사람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이 생길 때 한국에서의 비정규직 문제 또한 근본적으로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동시대를 살고 있는, 또 어려운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솔직한 심정으로 요새는 젊은 청년들에게 죄스러워서 정치를 못하겠다. 여태껏 내가 정치를 했다고 하는데 사회가 이 정도인가는 생각을 해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청년들이 한국에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대학 졸업을 한 청년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청년들이 가고 싶다는 직장도 대부분 공무원, 공공기관, 외국계 기업, 대기업 등인데 이들 업계의 1년 일자리가 기껏해야 5만 개 정도이다. 그런데 1년에 대졸자가 대략 65만 명이다. 나머지 60만 명은 처지에 따라 일자리를 잡는 것이다. 청년들의 90%가 희망을 찾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의 책임은 최소한 정치권에 50% 이상은 있다고 본다. 지역구에서 나오는 불만을 들으면 내가 할 말이 없다. 지역을 봐도 생활 수준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나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이 당연하다. 취직 시험을 보면 대부분의 많은 청년들이 다음 기회에 보자는 대답을 회사로부터 듣는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정치인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몇 사람만이 행복한 나라가 아닌 대다수가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현재 청년들의 상황을 볼 때, 내가 무엇을 권유할 만한 입장이 아닌 것 같다. 그저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자유인을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역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종걸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란 서로, 스스로 경쟁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유는 경쟁할 수 있는 상태가 보장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추상적인 자유를 이야기하기보다 이 시대에서의 자유는 언제라도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고 구속받지 않는 경쟁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것이 자유라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문제는 이러한 자유를 특정한 사람들만 누리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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