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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땅 살리며 무소유의 삶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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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땅 살리며 무소유의 삶 실천

왕피골 사람들의 유기농 공동체 실험

왕피골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영남 관문인 죽령을 넘은 시각이 오후 5시경. 이제는 탄탄대로겠거니 했지만 ‘웬걸’이었다. 영주, 봉화를 지나면서 고개가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노루재, 회고개재, 꼬치비재 등 이름도 희한한 고개들이 줄을 이었다. 높이도 400에서 600m까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약속장소인 울진군 서면 삼근리에 도착한 게 저녁 7시. 서울 출발 9시간만이었다. 사방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중 나온 한농복구회의 부녀회장 김인숙씨는 우리 일행의 차를 보더니 대뜸 “차를 갈아 타셔야겠다”고 말했다. 갈아타다니, 다 온 게 아니란 말인가. 어쨌든 안내를 맡은 서동문씨의 무쏘로 갈아타고 캄캄한 산길을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서씨는 운전을 하면서 왕피골의 실험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땅을 살려야 한다’ 두말할 필요없이 대지는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의 대부분이 바로 땅에서 자라지 않는가. 그 땅이 병들고서야 우리 몸이 성할 리가 없다. 한농복구회는 자체 개발, 확보한 미생물로 완벽한 퇴비를 만들어 땅심을 되살리고 있다. 국내 다른 유기농들이 제대로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 퇴비를 자체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부에 주문 생산한 퇴비의 품질은 믿을 수가 없다.

‘병든 몸을 회복시킨다’ 지금 도시인이 먹는 음식물들은 사실 독이나 다름없다. 농약으로 범벅이 된 곡식과 채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인공사료로 키워지는 고기류들도 몸에 좋을 턱이 없다. 한농마을 사람들은 술, 담배, 고기를 일체 금한다. 자체 생산한 청정 농산물로 몸을 다스리고 있다. 서씨는 “마을에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살찐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서 “한농식 섭생 탓인지 철든 이후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이기심과 탐욕을 없앤다’ 인류를 병들게 한 진짜 범인은 남이야 농약 친 공해 농산물을 먹고 병이 들든 말든, 나만 돈 벌어서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다. 이 이기심을 없애지 않고서는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마음 다스리기는 생활과 교육, 두가지 측면에서 실행된다.

우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다. 한농 사람들은 삶에 필요한 최소한만을 소유한다. ‘내’ 집도 없고 ‘내’ 땅도 없다. 재산은 공동 소유하며 공동 관리한다. 한농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다. 그래서 서로를 형님, 아우, 이모, 삼촌으로 부른다.

어린이들은 초등학교만 마치면 자체의 대안학교에서 가르친다. 교육의 핵심은 사람을 섬기라는 것이다. 부모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섬기는 부모 효도 교육, 인류는 남이 아니며 더욱이 적도 아니고 한가족이라는 형제 우애 교육, 부모 효도와 한가족 정신을 생활화하는 경천애인 교육 등이 그것이다. 한농 학교에서는 흡연도 없고 폭력도 없으며 왕따도 모른다.

서씨는 이제까지 국내 최대로 알려졌던 한살림 유기농 공동체가 400명 정도라고 들었다면서 한농마을 구성원은 7천여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을까’ 왕피골 실험의 근원이 궁금했다.
“한 20년 됐지요” 20년전부터 ‘어떤 분’이 땅을 살리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삶의 근본임을 설파했다고 한다. 하루 10시간씩 열흘, 그러니까 100시간짜리 강의를 10년간 해왔다고 한다. 그 분의 말씀에 설복된 사람들이 한농복구회를 이루었다. 한농복구회는 한국농촌복구회를 줄인 말이다. 이들은 농촌을 살리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모이자. 그래야 진짜 유기농을 할 수 있다'**

80년대부터 개별적으로 농촌으로 돌아가 유기농을 실천하던 이들은 1994년 한곳에 모이기로 결정한다. 제아무리 혼자서 무농약, 무비료의 유기농을 한다 해도 주변에서 농약과 비료를 뿌려대는대야 당해낼 재주가 없다. ‘그래, 한곳에 모이자. 그래야 진짜 유기농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유기농 마을이 울진을 비롯, 청송 상주 평창 춘양 원주 장흥 전주 마근담 진천 등 전국에 10개나 된다.

지난해까지 은둔생활을 하던 한농마을 사람들은 올해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농작물을 대도시에 내다 팔고, 언론 취재에도 응하기 시작했다. 서동문씨는 “지난 해 농림부로부터 친환경 농업자금 10억원을 지원받았는데 농림부측에서 우리의 천연농법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고 권해 왔다”면서 출세간(出世間)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보다는 7년간의 준비와 실험 끝에 이제는 세상에 나올 때가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7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묶어 놓은 원동력은 무엇일까. 땅을 살리고 사람을 섬기라는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그 분은 누구일까.

서동문씨는 그 분은 석선(石仙) 선생님으로 불린다는 것, 충남 보령 출신으로 올해 59세라는 것, 현재 상주 한농 마을에 머무르고 계시다는 것 외에는 말을 아꼈다. 이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농촌공동체 건설을 위해 애써 왔다. 그러나 한농 마을처럼 성공을 거둔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석선 선생의 가르침을 책을 묶어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은 어떨까.

서씨는 “선생님은 평범한 것을 가르치신다. 자연 사랑하고 부모 공경 하라는 것이지, 유별난 것은 없다”면서 곧 석선 선생의 시집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한농복구회가 펴낸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이라는 홍보책자에는 석선의 시가 실려 있다. 첫 부분은 이렇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흙이 되어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흙이 되어라/ 오직 흙이 되어라/ 밟히고/ 으깨이고/ 물에 적시우고/ 햇빛에 말리우고/ 빠워서 날리고 버릴지라도/ 말없이 날리고 버림당하는/ 너는 흙이 되어라’

끝은 이렇게 맺는다.

‘온 세상 초목이 흙 없이는/ 열매 맺을 수 없고/ 온 세상 동물들이 흙 없이는/ 새끼를 낳아 기를 수 없고/ 온 세상 인간들이 흙을 떠나서는/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없듯이/ 너로 인해 만물들이/ 열매 맺고 씨 퍼뜨리고/ 행복을 얻는/ 너는 흙이 되어라/ 영원히 흙이 되어라’


한농이 펴내는 격월간지 ‘韓農 새아침’ 7/8월호에는 석선 선생님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욕심 악마’라는 시가 실려 있다.

‘욕심 악마는/ 사람을 끌고 다니다 다니다/ 지쳐 버리게 한 후에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다 ... 온 인류는 이 욕심 악마에 끌려 다니다가/ 다 죽임당했다/ 이 악마를 호통쳐 멀리 쫓아 버리고/ 한가로이 길 가는 사람/ 이 사람이 곧 구름 타고 하늘 가는 신선님이시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했다. 왕피골 12개 마을중 본부마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한농마을의 간부 몇분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농복구회 총농제(總農弟) 이명우씨(69). 한농 사람들은 ‘장’(長)을 ‘제’(弟)로 부른다. 모든 사람의 어른이 아니라 아우가 되어 섬기라는 뜻인가 보다.

***너는 흙이 되어라, 영원히 흙이 되어라**

총농제란 미생물 배양, 퇴비 생산 등 농사와 관련된 일체의 기술을 책임지는 자리다. 작고여윈 몸매에 온화한 눈빛을 지닌 그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농사가 너무 좋아 20년전부터 농사꾼으로 전업한 이명우씨는 이제 천연농법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힌다. 어제만 해도 유기농 전문잡지를 내는 사람들이 찾아와 ‘국내에 이런 유기농 단지가 있었느냐’며 감탄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한농복구회 회제 이기송씨(43)는 서울농대 출신으로 29살에 한농에 들어 왔다. 서울대 지역사회개발학과 박사 과정을 밟던 도중이었다. 경제 성장이나 문명의 발달이 곧 사람들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울진지부제 마동운씨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농사에 관심이 많아 해군 중령 예편 후 한농에 들어 왔다. 우리를 안내했던 서동문씨(39)는 원래 전주 한농 예능학교 등에서 교육을 담당했으나 지금은 한농 농산물의 유통을 책임지고 있다. 한농종합식품 및 한농마을 인터넷사업부의 이제(理弟), 즉 사장이다.

늦은 저녁을 물리고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눴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이 운동이 시작됐는지를. 총농제 이명우씨는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함께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우리는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인데 세상이 놀라고 있다”며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부에서는 한농마을이 특정 종교의 배경 위에서 성립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가라고. 서동문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남들은 농촌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80년대부터 귀농을 하고, 초등학교 이후 자녀들을 자체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등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밤 9시가 넘어 저녁자리는 파했다. 이곳은 9시면 잠자리에 든다는데 꽤 늦은 시각이었다. 서동문씨와 함께 숙소로 향하는데 몇몇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회관에서 탁구시합에 벌어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자재 같은 것으로 지어진 조립식 2층집에서 전원주택의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1동에 4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건물 내부는 대도시 아파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기본적 편의시설은 모두 갖춰져 있었고 욕실에는 온수 보일러가 설치돼 있었다.

우리가 잘 집은 빈 집이었다. 원래 살던 사람은 상주 지부로 옮겨갔다고 한다. 서동문씨는 “이곳에서는 이사갈 때, 옷과 그릇 등 개인 물품 외에는 다 두고 간다”고 귀띔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 수고로이 갖고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세탁기, 냉장고 등 가재도구와 이불, 베개 등 침구도 고스란히 있었다.

아침 6시 30분, 자리에서 일어나니 서동문씨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서씨의 집은 유통사업본부가 있는 삼근리이지만 안내를 위해 우리와 한 집에서 잤다). 7시경 서씨는 동네 사람들과 뒷산에 올랐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MBC 다큐멘타리팀의 취재를 돕기 위해 동행했다는 것이다. KBS, 경인방송은 물론 MBC의 시사매거진2580팀에서도 취재를 신청했지만 MBC 다큐멘타리팀이 ‘선착순’으로 취재의 행운을 안게 됐다고 한다. 벌써 9일째 마을에 머물고 있는 MBC 취재팀의 50분짜리 작품은 10월 1일이나 2일경 방영될 예정이다.

왕피리 이장댁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 서씨는 왕피골 사람들의 일상을 얘기해 준다. 농사는 필수, 모든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농지에 비해 주민 숫자가 많기 때문에 농사일이 힘들지는 않단다.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대개 아침 한나절에 끝난다는 것이다. 그 다음 각자의 특기에 따라 역할을 부여받는다. 퇴비 생산, 양계 등 보다 전문적인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공 건축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의사 교사도 있으며 마을 행정일을 보는 사람도 있다. 마을 한쪽의 세탁소에는 대도시 부럽지 않은 드라이클리닝 시설이 갖춰져 있었는데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은 사회에서 양복점을 했다고 한다.

***내 집도 내 땅도 없는 무소유의 삶**

아침을 먹고 서씨의 무쏘차로 왕피골 순례에 나섰다. 비록 첩첩산중이기는 했지만 차가 아니면 마을 사이를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왕피골은 넓었다. 한끝에서 반대쪽 끝마을까지 40km라던가. 맑은 계곡물이 여기 저기 흐르는 왕피골은 절경이라 할 만했다. 서씨는 “여름철에는 피서객들로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라면서 이곳은 고려 공민왕이 피신한 곳이라 해서(연유를 알 순 없지만) 왕피(王避)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본부마을이 있는 임광(臨光)터는 왕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서씨는 덧붙였다.

첫 번째 찾은 마을은 감나무골이란 뜻의 시목(柿木)마을. 처음 전화를 해준 친구가 크게 감명받았다는 동네 공동구판장에 들렀다. ‘돌나라 행복마트’란 나무간판이 걸려 있는 이곳은 구판장이긴 하지만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다. 필요한 물건들을 그냥 가져가는 곳이다. 자체 생산한 쌀과 곡식, 야채와 비누 등 각종 생활필수품들은 필요한 만큼 가져가고전자레인지나 오디오 등 가전제품들은 필요할 때 빌려 쓴다. 잘 세탁된 양복과 핸드백, 구두들이 있는 대여코너에서는 나들이 옷 등을 빌려 입을 수 있고, 캐주얼복장들이 전시된 나눔코너에서는 마음에 드는 옷을 갖다 입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물건뿐만 아니라 돈도 갖다 쓴다. 카운터 위에 금고에서 필요한 만큼 돈을 꺼내 쓰는 것이다. 금고 옆에는 ‘넉넉하게 가져가세요’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돈을 가져갈 때는 금고 안의 쪽지에 용처와 액수를 적어 넣는다. 쓰고 남은 돈은 다시 금고에 갖다 넣는단다. 금고를 열어 보니 돈이 별로 없었다. “돈이 별로 없네‘라고 말하자 마트 담당 아주머니 금세 어디론가 가서 1만원 지폐를 한다발 집어넣으며 ”매일 아침 1백만원 정도씩 채워넣는다“라고 말한다.

시목 마을을 떠나 채소재배용 비닐하우스가 있는 포전 마을에 갔다. 지난해 농림부 지원자금으로 지었다는 이 하우스는 온도 조절이 전자동으로 이루어져 1년 내내 채소를 재배한다고 한다. 거야(巨野) 마을로 향하는 도중, 높은 언덕 아래로 그야말로 절경이 펼쳐졌다. 저 아래, 양쪽으로 벽옥(碧玉)같은 계곡물이 흘러가는 가운데에 배(舟)모양의 섬이 있었다. 이 섬은 울진 한농학교가 자리한 곳으로 한농복구회의 농사 일꾼을 길러내는 곳이다.

학교로 내려가 보니 계곡 저편에 널따란 밭이 있었다. 서씨는 “저 곳이 우리 고유의 농산물 종자를 키워내는 곳”이라고 귀띔한다. 수수, 조 등 곡식에서 각종 야채에 이르기까지 수십종의 토착 종자들을 저 밭에서 받아내고 있다고 했다.

거야 마을에서는 양계장을 볼 수 있었다. 한농 사람들은 육식은 하지 않지만 계란은 먹는다. 서씨는 계사(鷄舍) 한켠에 쌓아둔 사료를 한줌 집어 내 코 밑에 대며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사료는 물론 계사 안에서도 냄새는 별로 없었다. “사료 등을 특수 미생물로 처리하기 때문에 닭똥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서씨는 자랑한다.

마을 바깥에는 한농마을이 자랑하는 폐수 정화시설이 있었다. 미나리깡이었다. 적송(赤松)을 태워 만든 숯으로 폐수를 1,2차 정화한 뒤 마지막으로 미나리깡을 거쳐 폐수를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서씨는 마지막으로 폐수가 흘러나가는 부분에서 손바닥으로 물을 퍼올려 또다시 내 코 밑에 대며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지 않았다. 서씨는 MBC 취재팀의 PD가 이 물을 마셨다며 그 장면이 TV에 방영될 것이라고 벌써 몇 번째 자랑을 했다.

햇네(陽地) 마을에선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논 하나가 30-40평이 될까 말까한 다랭이논. 콤바인은 엄두도 낼 수도 없는 곳이었다. 대부분 예순은 넘겼음직한 ‘아저씨’들이 낫으로 올벼를 베고 있었고 장년의 아저씨 한 분이 철제 지게로 그 볏단을 져나르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 40분. 일요일 귀경길이 겁났던 우리는 서씨를 졸라 본부마을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서씨는 한농복구회의 ‘야망’을 털어 놓았다. 일본이 남미, 호주 등에 대규모 농지를 마련해 자국의 식량안보를 튼튼히 하고 있듯이 우리도 해외에 식량기지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농복구회는 필리핀, 키르기즈스탄에 3백만평, 러시아 연해주에 1백50만평 등 해외 여러 곳에 농장을 건설하고 있다. 서씨는 “이런 일이야말로 정부가 해야 하는 것인데 하기는커녕 우리 사업에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면서 “언론이 이런 사업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왕피골의 실험은 이제부터 시작**

한농은 지난해 5억원을 들여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위문공연을 열었다고 한다. 올해도 연해주에서 대규모 공연을 열려고 하는데 언론이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지, 아쉽다고 서씨는 말했다. 말끝에 서씨는 귀가 번쩍 트일 만한 얘기를 털어 놓았다.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쓰일 채소를 한농이 공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생산되는 야채들은 워낙 농약이 많아 국제행사용으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농림부측이 한국정부에 야채 공급을 요청해 왔고 그 역할을 한농이 하리라는 것이다. 서씨는 중국의 농림부 차관이 최근 신장성(新彊省)에 있는 한농 농장을 직접 방문했다고 자랑했다.
왕피골 12개 마을중 3분의 1도 보지 못하고 오후 1시경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했다. 대낮의 왕피골,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정말 대단했다. 수십m 이상 깎아지른 절벽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길을 50리 가까이 지나야 평지가 나온다니 6.25가 나도 모를 만했다. 그 고개의 이름은 박달재라 했다.

박달재를 나오는 도중에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레카차가 고장난 봉고차를 끌고 왕피골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서씨는 왕피골에 있는 2급 정비공장으로 차를 고치러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비기술이 대단한 데다 수리비도 싸게 받아 타이어를 갈기 위해 이 오지까지 차를 끌고 들어 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농의 인적 자원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한농마을에는 ‘마징가Z' 등 한국 만화영화의 개척자인 김청기 감독을 비롯, 사회에서 명성을 드높인 분이 적지 않다고 한다. 레카차를 만나기 직전, 엑셀 승용차를 몰고 왕피골로 들어가는 한 아주머니를 지나치며 서씨는 “왕진갔다 오시는 모양이네”라며 “저 분이 한국의 100대 한의사중 한 분으로 포항에서 활동하시다 왕피골로 들어오셨다”고 설명했다.

오후 2시가 약간 넘어 우리는 어제 저녁 당도했던 삼근리로 나왔다. 이렇게 해서 약 19시간의 왕피골 기행은 끝이 났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한국농업 사정에 밝은 몇몇 분들에게 한농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반드시 찬사 일변도만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한농의 천연농법은 한국 최고”라고 칭찬을 하면서도 “그 공동체적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유사종교적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배경이 있든 없든, 그것이 무에 중요하랴.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그들만의 낙원’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보다 넓은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 모두를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인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왕피골의 실험’은 이제 막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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