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한가득 쌓여 있는 걸 보는데 저도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서 7월 21일부터 물이 끊겼잖아요."
함께 파업에 참가한 동료가 말했다. 그것들은 파업 당시 간절했던 물품들이었다. 파업이 끝나고 1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여전히 공장 안 77일에 머물러 있던 게였다. 그 두렵고 끔찍했던 날들에.
십여 년을 다닌 직장에서 한 순간 내쫓긴 대가로 받은 알량한 퇴직금은 저 물품들을 사들이느라 바닥났다. 오히려 빚만 늘었다. 아내도 아이도 떠났다. 시작할 때는 당연한 싸움이었는데, 돌아보니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쌍용차 24명의 사망자'라는 말이 없던 때였다.
"다들 간신히 버티는 겁니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한 쌍용차 노동조합 간부가 우려를 보였을 때, 나는 그것을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했다. 무서운 일이라는 것이 스물넷이나 되는 사람의 죽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르던 나는 쌍용차 해고자들을 기록한 글 말미에 이렇게 써 넣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 당장 이길 수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언제 승리하게 될 것인가. 나는 지켜보기로 한다."
3년 동안 사람이 내리 죽었다. 나는 저리 쓴 것을 후회했다. 지켜보기로 한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거대 권력 앞에 그들은 자신을 한낱 개미 새끼보다 못한 존재였다고 했다. 자괴감, 패배감, 소외감…온갖 감정을 쏟아냈다. 그리고 죽었다.
그러나 죽음도 노동자의 초라함을 벗겨주지 못했다. 노동자의 죽음은 별 것 아니었다. 영정마저 경찰 발길에 차였다. 추모의 촛불 하나 대한문 거리에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인간이 가진 존엄은 노동자의 것은 아니었다. 억울한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어 싸운 것뿐인데, 세상은 가혹했다.
▲ 지난 5월 27일 현대차 양재동 본사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비를 맞으며 잠을 청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수십 개의 눈이 내려다보는 길에서 억지 잠을 청하고 일어나 곤두선 신경으로 "미쳐버릴 거 같다"라 하던 노동자가 물었다. "우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요?" 그들은 법을 이행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현대차가 불법 파견을 했다가 대법원 판결이 났다. 사용주를 처벌하고, 불법으로 사용한 이들을 자사 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그게 법이었다. 그러나 비닐 한 장에도 법과 질서를 외치는 국가는 불법 파견을 10년 이상 사용한 사용주에게는 무심했다. 심지어 몇 푼의 벌금을 내는 과태료마저 현대차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은 '법'에 따라 사지를 들어 현대 본사 앞에서 멀리 내쫓았다.
노동자는 무엇 하나 할 수가 없는데, 돈 가진 자들은 참 쉬웠다. 법을 안 지켜도 될 뿐 아니라, 입맛대로 법을 바꿀 수도 있었다. 현대 기업이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을 바꾸겠다며 헌법소원(2년 이상 일한 파견 근로자를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한 옛 파견법이 헌법에 반한다며 지난해 12월 현대자동차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필자>)을 낸 것을 보며, 나는 그들이 가진 돈의 힘에 질렸다. 거대 권력, 저 무서운 힘 앞에 과연 승리가 가능하긴 한 걸까. 나는 승리를 말한 것을 후회했다.
싸우는 이들은 계속 싸웠다. 그네들의 싸움을 기록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환하게 웃으며 승리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병을 얻고, 가족을 잃고, 목숨을 끊었다. 오직 싸우다 그랬다. 사람이 발 한 번 땅에 못 딛고 300일 가까이 철탑 위에 올라 있어도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했다. 철탑 아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등뼈가 골절되도록 맞았다.
그러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렸다고. 그들은 승리할 수 없을 거라고. 내가 없는 희망을 억지로 짜내어 믿은 거라고. 나는 '억지 희망'에 질려가고 있었다.
고작 작은 희망 몇 개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작은 희망 몇 개를 발견해 위안삼기도 했다. 기뻐도 했다. 현대차 사내 하청 해고자들을 처음 본 것은 2년 전, 2010년 CTS 점거 파업으로 대량 징계 해고된 지 '고작' 1년 된 때였다. 그들은 괜찮아 보였다. 잘 웃었고, 장난삼아 투덕거렸다. 시커먼 노동조합 조끼와 빨간 머리띠 사이로 보이는 얼굴들은 젊었다.
스무 살 초반 현대차 하청 노동자로 들어와, "처음에는 안 잘리려고 노동조합에 들어갔어요." 별스럽지 않은 이유로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들이었다.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 결성이지만, 10년 싸움이었다. 다 큰 어른들이 화장실 보내주지 않는 문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정도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유치하고 모멸적이며, 계획적이었다. 그들은 저비용 일회용품 취급 받았다. 사람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니, 뭇매가 쏟아졌다. 위장 도급이 분명한데 회사는 합법이라 우겼다. 불법 파견을 말하니, 또 뭇매였다. 해고가 용이하다는 '장점'을 가진 비정규직에게 업체 계약 해지는 일상이었다. 싸움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2010년, 이들이 불법 파견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싸움에 불이 붙었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2년 이상 파견 사용 시 원청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법에 따라,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다. 현대자동차는 답은 해고였다. 회사에서 잘린 이들은 결혼을 미뤘고, 이혼을 하고, 아이가 아팠고, 보험을 해약하고, 집을 팔았다. 개구진 장난을 치며 웃다가도 힘겨워했다. 그들은 그러니까, 충분히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괜찮다 여겼다. 그들은 잘 웃었고, 아직 젊었다.
2년이 지나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충분히'라는 말이 틀렸음을 알았다. 충분하지 않았다. 아직 더 힘들 것이 남아 있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아픈 아이는 계속 아프고, 규모를 줄인 살림살이는 빠르게 낡아갔다. 아이들은 자라고 돈 나갈 일만 늘었다. 벌이가 없는 것은 이미 3년. 좋은 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들은 앳되지 않았다. 3년의 해고 생활과 1년간의 농성으로, 젊었던 얼굴들은 해쓱하거나 검거나 주름졌다.
송전탑 위에는 두 사람이 올랐다. 대법원 판결의 당사자인 최병승과 사내 하청 노동조합 천의봉 사무장이 철탑에 올랐다. 정 그렇다면 회사가 정한 면접과 기준에 맞춰 하청 직원 중 일부를 신규 채용하겠다는 현대차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신규 채용이 아니라, 법에 따른 정규직 전환이었다. 철탑에 올라간 이틀, 바람은 세차고 머리 위로는 고압 전류가 타들어갔다. 추락할 것 같은 몸을 기둥에 묶어 벨트를 동여 잡았다. 다리가 굳고 손이 펴지질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두 사람의 발이 동상으로 얼어들어가던 유난히 추웠던 겨울, 더벅머리를 한 최병승, 천의봉은 이따금 철탑에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참 해맑다." 그 모습을 보며 철탑 아래 난로가에 모인 사이들이 피식 웃었다. 삶에는 싸움만 있지 않기에 웃었다. 그것으로 좋아보였다. 어쩐지 안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게 희망인가 싶었다.
▲ 희망버스 행사가 열렸던 7월 20일 오후 천의봉, 최병승 씨가 철탑 아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라진 희망
그러나 헛된 희망을 비웃 듯 철탑 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구나 하는 한탄이 끝나기도 전에 땡볕이 내리쬈다. 300여 일이었다. 이제는 사람이 지상 몇 십 미터 철탑에 오르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몇 백일을 살아도 놀라워하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버릇 잘못 들이면 안 되는 '떼쓰기'였고, 누군가에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은 옅어져, 그들은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괜찮지가 않았다.
그러던 한 날, 울산 철탑으로 희망버스가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천의봉과 최병승을 내려오게 하자 했다. 희망버스라… 나는 한 번 믿어볼까 싶었다. 솔직히 믿을 것이 없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라도 믿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며칠 전, 각 투쟁 사업장을 돌며 희망버스 참여를 독려하는 현대차 사내 하청 해고자들의 순회 간담회에 따라 나섰다.
7월 15일, 그날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사람들은 잘 웃었다. 일정도 순탄했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기운이 난다" 하던 조합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릴 만큼 나는 안심했다. 전북고속 신성여객 노동조합이 부당 해고를 당한 조합원을 위해 회사 안에 천막도 세우자 그 모습을 보던 현대차 해고자 하나가 '와, 쪽수가 되니 관리자들이 나와 막지도 못 하는구나'라고 했을 때, 양재동에서 천막 하나 없이 버틴 그들의 70여 일이 생각나 울컥했지만 그쯤은 괜찮았다. 이 정도면 순조로웠다. 심지어 금호타이어 정규직 노동조합이 사준 구내식당 밥은 맛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밥을 다 먹지 못했다. 통화를 하느라 한참 자리를 비운, 현대차 아산지회의 한 해고자가 돌아와 말했다.
"우리 아산 사무장이 죽었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 해고자가 두 팔로 머리를 감쌌을 때, 그 어깨가 들썩였을 때, 비로소 알았다. 또 죽었구나. 여기가 참, 촉탁직은 목을 매달고 해고자는 몸에 불을 붙이는 그런 곳이지. 잠시간의 평온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죽은 이와 별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죽이고 그 야욕을 다 채운 뒤에야 멈출 겁니까."
누군가 이리 묻는 곳이었다. 현대차 아산공장 노동조합 사무장 박정식. 35살이었고 조용한 성품이었다. 해죽 웃는 모습이 해맑았다.
가난한 자들의 죽음
우연히 소식을 같이 듣게 된 한 사업장 정규직 노동조합 간부는 물었다.
"아산지회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없다. 그들은 아주 오래 싸워왔을 뿐이다. 법으로 불법 파견 판정을 받아도 회사는 불법 파견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싸웠다. 해고가 됐고, 아산지회 노동조합 간부 대부분이 해고자였다. 공장 안에서는 대의원을 세우지 못해, 해고자가 여전히 대의원 직책을 달고 있었다. 오래 싸웠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고, 비관했다. 그것뿐이었다. 비정규직 싸움이 그랬다. 현대차 사내하청 10년 역사에 해고자 200여 명, 구속 20여 명, 목숨 잃은 이 2명, 분신 시도만 2명이었다. 이제 목숨을 잃은 이에 박정식 사무장이 추가됐다.
"내가 걔랑 같은 업체야."
그와 같은 업체였다는 김호선 회계감사는 박정식 사무장을 그리 기억했다.
"걔가 젤 마지막으로 노조에 가입을 했어요. 걔가 원래는 조장으로 예정되어 있었어요. 기존 조장이 산재를 받아서, 걔가 수당을 받아가며 조장 일을 대신 했어요. 그만큼 성실해 가지고. 내가 상조회를 만들어가지고, 걔를 총무를 시켰어요. 상조회 생길 때부터 우리 해고돼서 상조회가 없어질 때까지 걔가 총무를 했어요. 그럼에도 나랑 그리 친해도, 대법 판결이 나고 내가 2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도 노동조합 가입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너한테 묻는 거다. 마지막이다. 같이 하자. 그랬더니 그제야 노동조합에 들어오더라고. 들어오는 순간, 열정적으로 한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는 뒤늦은 가입을 했을까. 그 자신은 이리 말했다. "최병승의 대법원 판결 이후 약 한 달 정도가 지나고 조합에 가입했습니다. 정규직이 되겠구나 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과 대법원에서도 판결난 사회적인 상식의 생각으로 조합에 가입하면 정규직이 빠르게 되겠다는 기회주의 생각으로 가입을 했습니다." (박정식 열사가 생전에 조합원들에게 남긴 메시지 중 일부)
"일만 할 줄 아는 그냥 평범한 업체 직원"이었던 "업체에서 일 잘한다고 키퍼까지 한" 그런 그가 당연히 법이 있으니 정규직이 되겠구나 하고 가입을 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애쓰면 법대로 이행이 되겠지 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제가 생각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회사였"다. "권력 또한 돈이 있는 현대차에서 나"왔다. 그는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세상이 이상하게 굴러가는구나. 싸울수록 부당함은 커져갔다. 싸우는 이들 대부분이 받았을 충격을 그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찮다니. 절망도 함께.
▲ 눈물 흘리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프레시안(김윤나영) |
7월 14일, 그는 목을 맸다. 연락이 되지 않아 집으로 찾으러 간 동료들은 현관에 매달린 그를 보아야 했다. 성실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누군가의 다정한 아버지이건, 귀한 자식이건, 그냥 죽었다. 버티다가 죽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현대차는 박정식의 죽음을 자신과 무관하다 했다. 협상을 할 거면 하청업체와 하라 했다. 하청 업체직원의 개인사까지 관여하기에 현대는 너무 큰 기업이었다. 세계 5위 자동차 기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윤의 대부분이 생산비용 절감 효과에서 나온다는 것, 그 효과가 수 천 수 만 명의 값싼 비정규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알 바 아니었다. 그 비정규직이 값쌈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도 모를 일이었다.
노동조합은 현대자동차 공장마다 분향소를 설치했다. 울산 공장 안에도 분향소가 설치됐다. 회사는 야밤에 분향소를 철거해 버렸다. 쫓겨난 영정은 공장 정문 앞에 놓였다. 생전 현대 본사 농성을 하며 양재동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던 박정식 열사는 죽어서도 길거리 신세였다. 플라스틱 병을 바람마개로 씌운 촛불과 막걸리 한 병이 그에게 허락된 추모의 모든 것이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천막도 없었고, 가림막도 없었다. 노동조합을 시작하며 끊었던 술을 다시 마셨다는 그에게 바치는 값싼 술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상해가고 있었다.
누군가 노동자의 죽음 앞에 떠오르는 시가 있다고 했다.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
외로워도 슬퍼도 죽지 마라
괴로워도 억울해도 죽지 마라
....
가난한 자는 투신해도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가난한 자는 분신해도
아주 차가운 눈빛 하나
가난한 자의 생명가치는 싸다
시장에서 저렴한 너는
잉여인간에 불과한 너는
몸값도 싸고 꿈도 싸고
진실도 싸고 목숨마저 싸다
가난한 자들은 죽을 권리도 없다.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박노해)
가난한 자들은 죽을 권리도 없었다. 나는 절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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