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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찬받는 창극 <메디아>의 실험은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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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찬받는 창극 <메디아>의 실험은 정당한가?

[기고] 실험도 기본을 유지해야 정당성을 얻는다

공연 전부터 공연계에 큰 화제를 모았던 창극 <메디아>를 봤다. 느낀 소감은 '우리 시대 창극의 실험은 과연 정당한가'는 것이었다.

국립극장 창극단이 지난 몇 년간 선보인 창극들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창극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내걸고 제작됐다. 무대장치가 돋보인 <청>을 필두로 저명한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가 제작한 <수궁가>, 그리고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은 국립창극단이 계획하는 한국 창극의 현대화를 대변하는 작품들이다. 이번에 무대에 올린 <메디아> 역시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을 창극으로 전환한 작품이다. 주제도 주제지만 음악, 무대, 의상 면에서 기존의 창극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을 선보였다.

최근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5바탕의 현대적 재해석(<청>, <수궁가>), 다른 장르 창작물의 창극화(<서편제>, <장화홍련>), 그리고 <메디아>처럼 해외 극작품들의 현대화라는 극적, 음악적 실험들을 지속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연극과 뮤지컬 분야에서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 연출자들이 이른바 창극 현대화의 사명을 받고 창극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젊은 극작가 한아름과 연출가 서재형 역시 <메디아>를 통한 창극의 현대화라는 미션을 창극단으로부터 부여받은 듯하다.

국악계에서 이러한 실험적 변화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과 격려가 더 많아 보이는 것은 창극 현대화 미션이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소재의 다양화, 파격적인 무대, 관습적 창법으로부터의 탈피, 적극적인 관객개발 등은 그 정당성을 뒷받침해준다. 이른바 수성가락(악기가 노래 가락을 따라 연주하는 기법)에 기반 한 전통적인 판소리 창법과 극적 진행으로는 우리 시대의 창극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국악계 내부의 전반적 정서이지 않을까 싶다. 국립 창극단이 선보이는 최근의 실험들은 어찌 보면 창극의 생존과 진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메디아>를 관람하면서 '이러한 실험이 과연 정당한가'는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창극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며, 그것이 진정 좋은 작품이라면 먼 훗날 고전적인 레퍼토리로 우리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메디아>에서 새롭게 시도한 몇 가지 원칙과 방법이 창극의 현대화와 작품의 완결성을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새로운 시도로 큰 화제를 모은 <메디아>는 대체로 큰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비판이 필요하다는 지적 역시 제기된다. ⓒ뉴시스

<메디아> 제작 원칙은 '기존 창극과는 다르게 하라'는 것이다. 그 원칙은 크게 두 가지 음악적 방법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작창(作唱, 우리 장단과 음계를 이용해 만든 새로운 소리)을 배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극 전체를 스코어링(scoring)하는 송 스루(song through, 노래로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법, 영화 <레미제라블>이 대표적) 방식이다. 먼저 작창의 배제에 대해 언급하겠다. 작창의 배제는 필연적으로 수성반주를 배제한다. 판소리, 혹은 창극에서 작창은 기존에 많이 사용하던 장단과 가락의 성음체계 안에서 약간의 변이만이 가능한 인습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작창은 대부분 창자가 기본 선율을 만들고, 그 소리에 따라 반주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말이 즉흥적이지만, 일종의 관습화된 스케일이 존재한다.

따라서 음악적으로 풍부한 창극을 만들고 싶은 작곡가에게 창극의 창작과 수성반주 방식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이번에 작곡에 참여한 황호준 씨의 작곡 노트에도 이런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고, 결국 모든 노래의 곡을 본인이 새로 만드는 쪽으로 제작 방향이 결정되었다. 100분 가까운 극을 모두 새로 작곡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수준을 떠나 그 시도 자체가 실험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100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작곡의 형태로 구성한 <메디아>의 경우, 관객의 음악적 귀를 충분하게 열어줄 만큼 신선하거나 인상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죄를 짓는 것은 남자. 하지만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는 이 극의 핵심 대사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테마곡은 선율적으로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메디아>의 비극적 진정성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또한 이 테마곡이 코러스를 통해 작품 곳곳에 들리지만 코드변주나 박자, 리듬의 변이를 충분하게 이용하지 않아 지루했다. 심지어는 주인공의 노래를 방해하는 노이즈로 개입할 정도였다. 코러스에 지나치게 의존한 테마곡의 합창 방식은 너무 자주 등장하여 그것이 생산할 수 있는 순간의 임팩트를 살리지 못했다.

이런 음악적 장치들이 앞서 말한 작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면, 무엇보다 빼어난 선율과 변화무쌍한 리듬의 변이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다. 창자의 호흡과 발성으로 얻을 수 있는 작창의 묘미와 사건의 즉흥성, 그리고 배우가 감정의 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판소리 고유의 매력을 음악적으로 충분하게 살리는 게 모호하고 어설픈 창작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적어도 한국의 판소리 혹은 창극의 음악적 강렬함은 창자에서 나오는 것이지, 작곡가의 외삽된 창작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창자의 선 작창을 통해 음악적으로 풍부하게 변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송 스루'라는 기법이 창극에 바람직하냐는 점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송 스루'가 음악적 완결성을 얻으려면 서양의 오페라처럼 완결된 멜로디의 집합적인 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멜로디가 확실한 트랙들이 곳곳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번의 '송 스루'는 자신 있게 내세울 만안 솔로 트랙이 많지 않았다. 극의 마지막 부분 메디아가 자신의 두 자식을 죽인 후에 흐느껴 우는 장면 정도가 인정받을만한 독립적 트랙이었다. 100분간 내가 들은 곡은 반복적인 코러스, 계속해서 메디아의 비극적 감정 흐름을 끊는 도창장과 이아손, 크레온의 소리밖에 없다. 그리고 이아손, 크레온, 크레우사 등 주요 인물들을 대표하는 트랙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송 스루'는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음악의 분절과 연결을 생명으로 하는 '송 플로우'(song flow)를 구현하는 데는 사실상 실패했다.

이런 두 가지 문제점은 작곡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극을 보면서 계속 몰입이 안 된 채 불편했던 가장 큰 원인은 코러스의 지나친 극적 개입과 무대 안으로 들어온 도창장의 어설픈 포지셔닝이다. 이 문제는 연출의 영역에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주인공의 감정을 분산시킬 정도로 극 여기저기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코러스는 어디까지나 주요 배우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그것을 지원하는 역할이지, 그 자체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체는 아니다.

<메디아>에서 나타난 지나친 코러스의 개입은 일면 극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했지만, 주요 배우의 감정 선을 지나치게 방해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100분간 내가 들은 건 거의 코러스밖에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송 스루'에 대한 지나친 강박이 극 자체를 크게 다그쳤고, 그 때문에 음악적 당김과 다스림이라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본 공연(5월 25일 토요일 7시 공연)에서 도창장의 소리와 어설픈 '블로킹 라인'은 분명 연출과정에서 지적되었어야 했다. 주연 배우 메디아와 도창장의 소리는 목소리의 톤이 서로 맞지 않았고, 음색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주연 배우-도창장 사이 일종의 '응창'의 미적 즐거움이 극대화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방해요소가 되었다.

물론 <메디아>가 감행한 새로운 실험성 자체를 전면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의 정당성을 물어볼 뿐이다. 메디아 주역을 맡은 정은혜의 좋은 연기력과 감정선이 살아 있는 보컬 능력, 그리고 비극의 감정을 절제시킨 대단히 차갑고 기하학적인 무대디자인은 높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무대 디자인에 비해 영상의 강렬함은 너무 뻔했고, 의상은 차가운 무대다자인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메디아>의 실험성은 극의 강렬도, 장치들의 내재성, 음악의 완결성이 전제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물론 실험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미학적 원리가 없는 실험은 실험 그 자체로 끝날 수밖에 없다. 국립창극단이 벌이는 이러한 실험적 시도들이 기본기에 충실한 내재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극 실험의 과잉과 공해만 낳을 뿐이다. 국가 예산도 함께 낭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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