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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진보통합

[손호철 칼럼] '안철수 현상'을 보며 한숨만 나온 까닭

추석이 지나갔습니다. 추석을 보내자 우선 안도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MB정부 하에서는 추석을 한번 만 더 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밑에서 다섯 번의 추석을 더 보내야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번 추석 밥상머리의 화두는 안철수였을 것입니다. 저의 형제들이 모인 가족모임에서도 단연 화제는 안철수였고, 저 역시 추석 연휴 동안 틈만 나면 안철수 현상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모두들 지적하고 있듯이 안철수 현상은 다수 대중의 삶은 외면한 채 정쟁에 매몰되어 있는 기존 정치권, 아니 (강용석의원 제명안처리가 잘 보여주듯이) 정쟁에 매몰되다가도 자신들의 비리 비호에는 찰떡궁합으로 손을 잡는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실제 정치를 하든 안하든, 한국정당과 정치의 개혁에 중요한 백신을 한 방 놔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는 부정적 생각이 더 많습니다. 우선 걱정이 되는 것은 안 원장의 정치관입니다. 단편적인 발언들이라 그것만으로 판단하기는 뭐하지만. 안 원장의 발언들을 볼 때 안원장이 지나치게 기술행정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고 정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정치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물론 현재의 정치, 그동안 보여준 한국정치는 부정적인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따라서 안 원장이 기존정치에 부정적인 '반정치주의'를 보여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인기 역시 기존정치에 대한 불신에 기초한 '반정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정치에 부정적이라고 해서 정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우리의 문제들을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하듯이, 정치적이지 않은 기술행정적으로, 기술관료적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해 "서울시장 해보니까 정치와 직접 관련이 없다. 행정이나 일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 한 것도 정치를 그저 정략적 정쟁 정도로 알고 한 무지의 발로입니다.

행정력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정력은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행정은 궁극적으로는 가치의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서 기술관료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철저하게 정치적 판단의 문제라는 사실을 안 원장은 인식해야 합니다. 무상급식이냐 선별급식이냐는 것을 어떻게 기술관료적으로 풀 수 있겠습니까? 참고적으로 정치학에서 정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는 "사회를 위한 가치의 배분", 즉 성장, 평등, 자유, 안보 등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입니다.
▲ 안철수 원장 ⓒ프레시안(김하영)

기존 정당을 넘어서는 '중도'라는 문제와 이에 기초한 제3 정당 문제도 그러합니다. 물론 정쟁이라는 정치행태라는 측면에서 여도 싫고 야도 싫다는 지지층(중도)의 존재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보수와 진보도 아닌 중도층의 결집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행태에 대한 여야비판과 대안모색이라는 점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정당정치의 핵심이고 진보, 중도, 보수의 핵심기준인 정강과 정책이라는 면에서는 '중도'의 제3 정당, 제3 노선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부정적입니다.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얼마나 이념적 거리가 있고 두 정당간의 정책적 차이가 얼마나 크기에, 그 중간에 비집고 들어가 한나라당보다는 '진보'적이고 민주당보다는 '보수'적인 정당을 만든단 말입니까? 아니 설사 정당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 중간의 노선을 만든단 말입니까?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냉전적 보수(conservative)세력, 민주당은 자유주의(liberal) 개혁세력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에 필요한 것은 그 사이의 중도세력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같은 진보(progressive)세력이 아닐까요?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무상급식 문제만 해도 그러합니다. 물론 기술적으로 차이가 있는 절충안을 만들 수 있겠지만, 무상급식이라는 민주당안과 선별적 급식이라는 한나라당안 사이의 안철수식 중도안이라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한 것일까요?

그의 멘토 중의 한명으로 알려진 윤여준 전환경부장관이 안 원장의 모델로 제시한 SNS 정당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정당구조라는 점에서 문제가 많고 정보화혁명이 새로운 정당모형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2002년 대선과정에서 유시민 현 국민참여당 대표가 개혁당을 통해 시도했고 현재 국민참여당이 기본으로 삼고 있는 온라인 정당의 변형일 뿐으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인물론'의 한계도 문제입니다. 물론 역사와 정치에서 인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치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정치의 문제는 인물 보다 구조입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를 보십시오. 그는 법관시절 대쪽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선자금 문제로 최측근들이 차떼기의 주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대쪽이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탱자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귤도 한국정치에 심어 놓으면 익은 때가 되면 탱자가 되고 만다는 주장입니다. 한국정치의 수준으로 타락하지 못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승리하기 위해 한국정치에 적응을 하다보면 이겼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국정치 수준으로 타락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같은 숙명론적 비관론도 문제지만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눈을 감고 인물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안 원장이 정말 정치를 할 생각이고 폭발적인 지지율을 한국정치에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동력으로 만들고 싶다면, 정치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일 먼저 정치에 대한 잘못된 부정적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 추석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2008년 광우병 사태와 그 이후의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생겨난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이 지면에서도 한 두 차례 털어놓았듯이, 2008년 봄 광우병 사태 속에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과 이후 용산사태 등에서 나타난 '촛불의 침묵'을 보면서 언제 대중은 움직이고 언제 대중은 침묵하는가,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라는 화두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평생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직업으로 하면서도 이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는 저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하며 고민했습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추모행렬을 보면서 그처럼 대중을 움직이는 정치인이 왜 진보진영에는 없는 것인가 고민해 오고 있습니다. 사실여부야 어찌 되었든 비리의혹으로 자신이 재판을 받을 경우 민주화운동진영이 받을 타격을 걱정해 스스로 몸을 던진 노 전 대통령의 살신성인을 보면서 왜 권영길 의원은 2007년 대선에서 진보의 세대교체를 위해 대통령후보 불출마선언을 통해 대중을 감동시키지 못했는지 되묻고 또 되물었습니다(다행히 권 의원은 최근 진보대통합 움직임과 관련해, 2007년 결정을 후회하면서 2012년 총선 불출마선언을 했습니다). 그나마 대중적 인기가 있는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의 지지도 노무현, 안철수 등에 대한 폭발적 지지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기만 합니다.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 더욱 한숨이 나오는 것은 대중의 감동이 없이 '그들만의 몸부림'으로 변해버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의 진보통합 논의입니다. 어렵게 진행되던 진보통합 논의는 결국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세력이지 진보라고 보기 어려운 국민참여당과도 통합을 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서면서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보신당의 대의원대회에서 통합에 필요한 3분의 2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물론 통합의 여지는 아직 남아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설사 진보정당이 통합에 성공하더라도 전혀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대중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진보정당의 도약의 계기로 삼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지리한 통합논의를 거치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고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감동이 아니라 짜증과 상처들입니다.

문득 떠오른 것이 1960년대 미국의 가장 급진적 가수였던 필 오크스입니다. 60년대 말 반전운동의 급진적 분위기속에서 정치적 주제를 주제로 한 소위 '테마송'으로 운동권에서 인기가 높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입고 무대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급진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대중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고민의 발로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 게바라와 엘비스를 합쳐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철수처럼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진보의 안철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요?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 제목처럼 진보도 <진보의 안철수를 기다리며> 안철수 현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요?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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