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민주주의의 공간이고 협동의 공간이다. 승자독식 시장의 횡포를 피하고 견제할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하다. 선거만 끝나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역으로 돌아가자', '풀뿌리 지역 활동을 강화하자'. 특히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 쪽이 그렇다. 선거 때마다 듣다보니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패배를 절감할 때야 비로소 지역, 마을이 보이는 모양이다.
마을, 서로 만나는 곳
특히 대한민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도 마을은 중요하다. '복지국가가 좋다고 하니, 한번 해 봅시다'라는 구호만으로 우리 곁에 복지국가는 오지 않는다. 또 선거 때마다 복지국가를 선물로 줄 '초인'을 기다리지만,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없다.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구체적인 전략도 필요하지만 먼저 사람들이 복지국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강력하게 원해야 한다. 복지국가를 향한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이란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복지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만 가능하다. 무상 급식과 무상 보육으로 보편적 복지를 체감하면서 복지 민심이 조금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참 부족하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복지국가를 향한 열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 마음을 바꾸려면 우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소통'해야 한다. 그런데 일터에서는 자주 만나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살고 있는 지역에는 이러한 소통이 없다. 평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과 인사조차 건네지 않으니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헛구호로만 되풀이된다. 주장만 남고 지역 활동은 아주 작은 일로만 치부한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게 '복지국가를 향한 소통'이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아파트 층간소음 칼부림보다 먼저 인사 나누기
요즘 '지역'을 말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요사이 이름으로 지역 대신 '마을'이다. 지난 해 부터 시작한 서울시 '마을 공동체' 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마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통적인 '지역 복지'도 '마을 복지'라고 부른다. 박원순표 마을 만들기가 복지국가를 향한 소통까지 고려하진 않았겠지만, 풀뿌리 복지국가 시민운동에 분명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마을 공동체 사업은 급격한 도시화, 양극화로 각박해진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자는 취지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칼부림하지 말고 최소한 이웃끼리 인사는 나누면서 무언가 긍정적으로 함께 할 거리를 내놓고 있다. 올해도 22개의 사업 유형에 총 222억 원을 지원한다. '마을미디어', '부모 커뮤니티', '공동 육아', '마을예술 창작소', '북 카페' 등 다양하다.
▲ 서울시 마을 공동체 사업의 하나인 마을미디어. 도봉구 '보이는 라디오 공개 방송'에 참여한 다양한 세대의 주민들이 한 데 어울리고 있다. ⓒ이상호 |
'이미 마을에서 살고 있는데, 또 무슨 마을 공동체를 만든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마을 공동체는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 경제'처럼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마을이란 본래 있었던 것이고 여기에 '무언가 비슷한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내자'는 취지다. 이는 사람들의 관계망 형성 과정으로 마을 공동체 '회복'이다.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무슨 마을이냐?"부터 시작해 "주민들 스스로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기보다 서울시라는 관이 주도하면 또 하나의 새마을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회적 기업처럼 한 번 유행하고 말겠지"라거나 "주민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까지 공공 예산을 쓴다는 현실이 서글프다"는 의견도 있다. 심지어 "서울시가 좌파 단체에 예산을 몰아준다"는 이념 공세까지 나온다.
그런데 오죽하면 각박한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에 서울시까지 나섰겠는가. 우리 스스로가 각박하다 못해 자본주의 사회에 철저하게 적응하면서 이기심으로 찌들어 있다. 부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그렇다. 개개인의 도덕성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대도시의 무한 경쟁 속에 살다보니 너도 나도 그렇게 돼 버렸다는 의미다.
무상 의료 좋다면서 일단 나와 내 가족부터 살고 봐야?
노동운동, 진보정당, 시민사회 등 그간 보편적 복지를 위해 헌신해왔던 이들도 각박하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마을 공동체를 넘어 전 국민의 단일 공동체를 만들자는 사회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자신은 공동체적으로 살지 않는 이들이 있다. 당장이라도 혁명을 해야 할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공동체를 해체하고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사교육에 일조한다. 또 자기 자식만은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마을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이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이는 값비싼 조기 영어 교육에 몰아 놓는다.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활동은 선별적이고, 복지 인식은 자신보다 더 열악한 사람을 그저 동정하는 시혜적 수준에 머문다. 무상 의료 하면 좋겠지만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민간 실손 의료보험 한두 개 들어두는 게 먼저다.
사람들이 이렇게 위선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았다면 복지국가는 벌써 하고도 남았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도 앞서 마을의 예처럼 무슨 새로운 비법을 발견해야 복지국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풀뿌리 시민들이 스스로 지금보다 세금과 국민건강보험료를 조금씩만 더 내 복지국가 한번 해보자는 게 핵심이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 필요도 없다.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선 거의 모든 국민이 가입하고 있다는 민간의료보험료 일부만 각자 국민건강보험으로 돌리면 된다. 추가로 부담할 보험료는 1인당 평균 1만1000원, 가구당 평균 3만 원밖에 안 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 '비용의 전환' 문제다. 모두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민간의료보험을 해지하고 국민건강보험을 더 키우는 게 옳다.
우리는 왜 이것을 못하는가. 이기심 때문이다. 모두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탓이다. 다 같이 하면 되는데, 다 같이 안 하니까 못한다. 모두 다 일류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학벌 없는 사회가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도 내 자식은 일류 대학에 가야 한다. 남들이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도 나와 내 가족만큼은 그럴 수 없기에 가구당 평균 3.6개씩 민간의료보험을 들어놔야 한다. 이러한 이기심이 각박함과 이웃 간에 불신을 낳는다. 커진 불신은 마을을 해체하고 복지국가는 점점 더 멀어진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을 공동체 회복은 이러한 우리들의 이기심을 극복하자는 데 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마을도 소중하고, 나아가 전체 사회를 중시하자고 한다. 그런 마음이 생겨야 층간 소음으로 칼부림하는 일이 없어지고, 국민건강보험료든 세금이든 조금이라도 더 내 놓을 수 있다. 일부 어려운 사람을 제외하고 자기 것을 조금씩 내 놓겠다고 해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가 가능하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미래 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간디는 일찍이 우리의 미래가 마을에 달려있다고 내다봤다. 자발적인 풀뿌리 주민 운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마을 공동체 운동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닿아 있다. 복지국가 운동의 미래 또한 마을에 있다. 마을 공동체를 회복해야 복지국가로 갈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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