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연속 기고 ① '쥐꼬리 월급에 매일 야근' 없애고 싶다면… ② 흡연율 안 떨어지는 진짜 이유? 당신 직장을 보라 ③ 삼포 세대? 영화 한 편, 밥 한 끼에도 벌벌 떨어! ④ 나는 어쩌다 '악덕 자본가'가 됐나 |
세기말 데뷔
1997년 초, 나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흔한 대학 합격증 하나 없이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 우리 아들은 마음만 먹으면 일류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부모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 성적표에는 농구부보다 낮고 아이스하키부보다 높은 미묘한 등수가 기록되어 있었다. 대학에 못 가면 죽는다고 난리를 치던 시절이다 보니 재수 준비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딱히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같은 생각은 아메바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학원비를 번다는 명목으로 종로통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구인지를 주워다 읽는 게 일상. 적당히 취직해서, 적당히 살아갈 수 있겠지. 어느 고깃집에서 '알바'할 때 만난 녀석은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밤에는 직원으로 일하면서 한 달 100만 원을 벌어 알뜰살뜰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나중에 사업할 거라고 했다. 그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지.
겨울 무렵, 부모님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뜬금없이 동네에 술집을 차렸다. 그즈음에 사람들을 다 TV 앞에 달라붙게 하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정부가 "IMF"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딘가에 "구제 금융"이라는 걸 신청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공포라는 확실한 감정을 느꼈다. 방송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죽어라 분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큰일이 났으니 돈을 아껴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수입 상품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김대중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금을 모아야 한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잠깐만" 고생하자고 다들 이야기했다. 그때에는 그 큰일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 할 틈도 없었다. 세상 물정에 둔했던 나는 더더욱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시대가, "IMF 시대"가 왔다고 했다. 어쨌거나, 또래들 사이에선 입대가 유행이 되었다. 군대가 마치 피난처인 것처럼.
I'M Failure
1998년, 고등학교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에 가기 시작했다. 호프집 주방에서 일하던 녀석도, 고등학교 때 만난 두 살 아래 여자애와 딸 하나를 막 낳은 녀석도.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나는 그제야 신검을 보러 갔다. 신검을 보러 가니 군대 가고 싶은 시기를 쓰라고 했다. 딱히 군대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군대에 가는 게 좋다는 충고들을 들어왔던 터라 가장 빠른 날짜를 썼다.
여전히 IMF 시대라는 것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문지상에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명퇴"와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섬뜩한지는 알게 되었을 즈음, "I'M Fired"라는 유행어도 익숙해졌다. 구인지를 백날 뒤져도 '신입'을 구하는 광고는 없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쓰러진 어머니를 업고 돌아오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IMF 시대가 개막한 지 1년이 되어갈 때쯤, 영장이 나왔다. 서울대보다 경쟁률이 높은 게 군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던 무렵이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지만, 1998년 11월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의 열풍을 뒤로하고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무려 새천년의 1월, 군대를 전역했을 때 "우리 집"은 사라진 상태였다. 집을 팔고 전세로 갔다거나 월세로 갔다거나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집이란 게 없었다. 만 21세의 나이에 처음 한 일은 인감을 파고 주택은행에 가는 것이었다. 내 '사회생활'의 초기 자본금은 마이너스 2000만 원이었다. 그래도 난 나은 편이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고 있었다. 구인지에는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터를 구한다는 광고 일색이었다. "고객님 당첨되셨습니다" 따위의 멘트로 순진한 사람들의 등을 치는 그런 일 말이다.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상처는 주지 말고 살아야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더는 없었다.
▲ IMF 구제 금융 위기 이후 실업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이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사회 단체들이 제공하는 무료 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밤이 되면 지하철 통로에 노숙을 하고 있다(1998년 6월 22일). ⓒ연합뉴스 |
어찌 되었건 돈을 벌긴 벌어야 했다. 제일 먼저 골프장 캐디라는 걸 시작했다. 괴상한 직업이었다. 분명히 이 회사에서 면접을 봤고 지시를 받고 있는데, 직원이 아니라고 했다. 너희는 손님과 1대 1로 일하는 사업자라고. 그러면서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불러내서 코스를 치우게 했다. 너희 사업장이니까 너희가 치워야 한다고. 지각하거나 하면 하루를 무료로 일해야 했다. 별별 요구도 많았다. 손님이 보시기 흉하니 선크림은 너무 많이 바르지 말라든가, 손님 볼 치는데 반사광에 눈이 부셔 잘못 칠 수도 있으니 안경은 쓰지 말고 렌즈를 쓰라든가.
쉬는 날은 평일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동료들끼리 어울리기 마련이었다. 대개는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들은 도박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이트로 갔다. 대부분은 돈을 모으려고 시작했지만, 돈을 모아서 나가는 녀석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술집 화장실에서 양복을 잘 차려입은 처음 보는 아저씨 한 명이 시비를 걸어왔다. "너네는 고생을 모르지? 걱정이 없지? 좋겠다"면서. 억울했다. 나름대로 암울하다고.
그 후로 10년은 일하고 잘리고 그만두고 회사가 망하고의 연속이었다. 가구 시장, 식당 주방 보조, 물류 센터, 서류 창고, 대필 작가 등등. 심지어는 모바일 야설 작가라는 직종까지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했다. 위장 도급 회사의 비정규직의 인턴이라는 무슨 비비비비정규직 같은 일도 해봤다. 3개월간이라던 인턴 기간은 무한정 늘어나다가 해고로 끝났다. 그게 3년 전인가 무려 회장님이 손수 화물 노동자를 야구 '빠따'로 두들겨 패서 유명해진 그 회사다만, 그땐 회장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내가 어느 회사 소속인지를 아예 몰랐으니까. 어쨌거나 그 10년간 4대 보험은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처음 대출한 빚은 생활력 강한 동생이 갚아주었지만, 생활력 없는 내게는 새로운 빚이 쌓여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실업 급여를 받아본 것은, 우습게도 소위 '운동권'이 되고 나서였다. 그것도 어느 운동권 언론사를 그만두면서. 그즈음에야 10대 시절의 '적당히 벌어서 적당히 먹고사는' 꿈을 포기했다. 별 볼 일 없는 직장뿐인 20대의 누더기 경력, 그리고 30대의 설명할 수 없는 공백으로 채워진 이력서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운동 비슷한 걸 하면서, 주변의 멀쩡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아귀처럼 뜯어먹고 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IMF 시대라는 게 뭔지 어디 가서 '썰'을 풀 정도의 교양은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체감하지 못했다. 알 수 있는 건 그냥 내가 패배자라는 것뿐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2012년 겨울, 어쩌다 보니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운동본부장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쯤 되는 것도 아니고 투표용지 맨 끝에 있는 김순자라는 후보의 선본에서. 선거 운동도 참 괴상하게 했는데, 선거 운동원들이 밤마다 신촌과 명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편의점, 커피숍 등에 들어가 '알바'를 만나고 실태 조사를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 선거 운동원들 둘이서, 실태 조사를 하다가 '가필드'(그러니까 가필드 인형을 뒤집어쓰고 고양이 카페 선전을 하는 '알바' 말이다)를 만났다며 서로 자랑하는 것을 보고 뭔가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가필드가 가필드를 만나면 어떨까? 인형 옷 '알바'들을 인형 옷 입은 채로 만나러 다니자. 그때 든 생각은 무슨 대단한 역지사지 이런 생각도 아니었고, 그저 예의 같은 거였다. 그의 영역에 다가가기 위한 우호의 표시 같은.
ⓒ프레시안(최형락) |
인형 옷을 처음 썼을 때는,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한동안 선거 운동원들이 내 손을 잡고 다녔다. 오래 입으면 몸이 불편하고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아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걸 쓰고 하루 종일 일하는구나.
명동의 그 짧은 거리에서, 고양이·강아지부터 시작해 온갖 모양의 인형 옷 '알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최저임금 혹은 최저임금에서 살짝 깎인 금액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고작 그 돈을 받는구나. 대개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검정고시를 준비 중인 10대 '알바' 한 명의 장래 희망을 듣고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인문학 같은 걸 열심히 공부해서 멘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의 구렁텅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제야 15년 전 뉴스에서 앵커가 한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대에게 'N세대'니 'G20 세대'니 '삼포 세대'니 이름을 계속 붙여왔지만, 그 여러 다른 이름의 한 가지 모습은 그냥 IMF 세대였다. "극복"했다고 주장하던 그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주장되던 일들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었고 항변이 인정되지 않는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비비비정규직. 오르지 않는 임금, 인격적 굴욕, 부당한 처우. "잠깐만"이라는 말로 이루어진 일들은 끝나지 않았다. 그저 더는 "잠깐만"이라는 말이 붙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IMF 시대가 만들어낸 것은 하나의 율법이었다. "쫄리면 죽으시지?" 같은.
그날 명동의, 신촌의 인형 옷 '알바'들에게 물었던 마지막 질문은
"최저임금이 만 원이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파계를 권한다
'알바'들이 만장일치로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면 이 글의 클라이막스가 뭔가 멋있어지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부는 너무 많이 받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고, 일부는 '인플레'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 한 달에 필요한 생활비용을 물으면 최저임금이 만 원이어야 될 정도의 비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플레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저 최저임금을 올리면 인플레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뿐이다.
최저임금을 올릴 때 인플레가 발생한다면 이유야 뻔하다. 저소득층의 생필품 구매 증가. 우리는 최저임금을 올리면 인플레가 일어난다는 우려와 비슷한 우려들에 익숙하다. 부동산이나 금융 시장을 바라보는 사회의 기준이 그렇다. 집 없는 저소득층의 삶을 감수하고라도 땅값 하락을 막아야 한다거나, 근로소득이 소득의 전부인 사람들의 실질 임금이 무한 하락하더라도 금융 투기를 활성화해야 한다거나. 이대로라면 나는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실업자들을 국외로 추방하자는 주장이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프레시안(여정민) |
그 율법을 좀 깨버린다면 어떨까. 돈을 좀 더 받고, 일은 좀 덜 하고, 주말에는 영화도 보고 공연도 가고. 모든 이에게 일보다 쉼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사회, 모든 국민이 충분히 쉴 의무를 가지는 사회. 그러면 나라가 망한다고? 사람이 행복해지면 망하는 나라라니 큰일이군. 그런 나라를 대체 왜 여태 살려두고 있어?
실은 딱 그 얘기가 하고 싶었다. IMF 시대가 끝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고. 그걸 지키자고 아득바득하지 말자고. 새로운 율법의 새로운 시대, 지금 필요한 게 딱 그거라고. 같이 파계 좀 하시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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