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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보육·중증질환이 나와는 먼 얘기?"

[복지국가SOCIETY] 보편적 복지는 필수이고 필연이다

복지국가와 보편적 복지가 사회적 이슈가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의 삶 속에서는 그리 큰 화두가 아닌 듯하다. 더군다나,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결정된 복지 관련 내용들, 그리고 최근 행정 부처의 업무 보고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복지국가나 보편적 복지와 거리감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복지국가와 보편적 복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 새겨볼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와 복지국가를 둘러싼 우리 주변의 잘못된 이미지들

보편적 복지와 관련해 주위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사회)복지가 갖고 있는 편협한 이미지들이 여전히 복지 강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잘못된 이미지들은 복지와 관련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구성해 내는 창조적 사고를 상당 부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자주 접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 '임산부 전용석', '노약자 전용석'이다. 이 전용석의 '사회적 약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복지에 대한 표상, 즉 '복지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매일 보고 듣는 '사회적 약자'라는 단어가 어쩌면 사회복지 또는 복지국가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또는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매우 편협한 이해를 사회 저변에 퍼뜨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연합뉴스
사실, 임산부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특히 출산율이 OECD 국가들 중에 꼴찌를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오히려 임산부는 우리나라의 미래 세대를 잉태한 것만으로도 일정 부분 대우를 받아야 한다. 현재의 저출산·고령화가 가져올 엄청난 어려움을 임산부들로 인해 그나마 사전에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사용할 때만이라도 그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정도의 수고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현재 우리나라의 전반에 퍼져 있는 '사회적 약자'의 이미지는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진 여러 속성들과 이들이 사회에 실제로 공헌하는 바를 가려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복지 혜택들이 가진 고유한 속성들을 고려에서 배제시키고 단순히 이들이 약자이기 때문에 해당 혜택들을 제공받는다고 대다수 국민이 오해하고 오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정적 측면은 의료의 공공성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에서 의료 공공성이란 원래의 의미를 상당 부분 상실한 채, 가난한 환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마치 지불 능력이 없어서 더 이상 갈 데 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것쯤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사회복지에 대한 매우 협소하고도 편협한 인식이 바로 의료 공공성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대다수 공공 병원들은 단순히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이고도 세세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의료 공공성의 핵심적 화두는 '의료의 질'을 확보하고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즉, 유럽에서는 '양질의 의료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 의료 공공성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도, 그러나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민간에서는 높은 질의 의료를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이러한 혜택을 돈이 없어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공병원에서 낮은 질의 의료를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점차 이것이 고착화되어 가는 듯하다.

이러한 협소한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는 박근혜 정부의 '고용복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러저러한 혜택들을 주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취업 노력을 전제로 혜택이 주어진다. 물론,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급여로 놀고먹는다면 분명히 문제가 된다. 그러나 현재 실업 상태에 있거나 경제 활동을 포기한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 예를 들어, 프랑스의 최저생활보장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도덕적 해이에 대해 의식 조사를 한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즉, 문제는 일을 하고 싶음에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실업 상태에 머무르면서 실업급여나 최저 생활 보장비만 갖고 빈곤한 생활을 연명하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일할 능력이 있는 자와 능력이 없는 자'라는 이분법은 부정적 선입견에 기반하고 있다. 즉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그들에게 제공되는 복지 혜택으로 인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매우 단순하고도 현실과 괴리된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

사회복지나 복지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복지 또는 복지국가의 이미지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 진정한 사회복지, 복지국가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 복지가 사회복지의 새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의 모든 면에 동의를 하면서도 약간의 뼈와 살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사회복지는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 둘째,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사회복지가 필요하다. 셋째, 사회복지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부수적이고 보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근원적 욕구'와 '근원적 필요'

사회복지와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것은 사상가, 이론가, 전문가 등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복지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며, 모든 사람들이 현실에서 당면하는 일상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일정 정도 사회복지와 복지국가를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본성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생존하려는 욕구(생존욕구)와 인간적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인간적 삶의 욕구)를 갖는다. 이 두 가지 욕구는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지 특정 개인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불치병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처럼 매우 독특한 경우를 빼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노예처럼 또는 짐승처럼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 욕구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강하게 나타나거나, 반대로 지식이 별로 없다고 해서 적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이러한 욕구들을 가지며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 욕구들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활동들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 욕구들을 '근원적 욕구'라고 부른다.

'근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특정의 필요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며, 적절한 수면과 휴식을 취해야 하고, 몸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리적 필요뿐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들도 충족되어야 한다. 타인과 의사소통하고, 상상∙사유∙사고를 하며, 호기심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을 통해 자존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 인간은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레저와 문화 활동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이나 군대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필요들을 '근원적 욕구'와 대칭시켜 '근원적 필요'라고 부른다. 요컨대, 인간은 생존과 인간적 삶의 유지라는 '근원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근원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보편적 복지란, 모든 사람에게 '근원적 필요'를 제공하는 것

복지는 바로 이 '근원적 필요'를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충족하는 것이다. 모든 불안이 복지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 충족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지 않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보편적 복지의 우선순위 또한 생존과 인간적 삶의 유지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중심으로 설정해야 한다. 복지 서비스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필요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필수성, 필연성, 일반성' 때문에 해당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며, 바로 이 점이 보편적 복지의 일차적 특성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장하는 '5대 불안'의 해소는 바로 이러한 특징을 갖는 재화와 서비스를 대상으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생존과 인간적 삶을 유지하려면 일자리와 주거는 필수불가결하다. 교육은 우리의 선조가 만들어놓은 지적 유산을 인계받고 새 것을 창조해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지적·정신적 유산의 누적과 전수가 생존과 인간적 삶의 유지에 필요하다.

모든 이에게 같게 주면 보편적 복지? 복지의 질도 고려해야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보편적 복지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보편적 복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제공되는 혜택(재화와 서비스)의 질과 양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소 소득보장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이에게 5만 원을 제공한다면, 형태상으로는 분명히 보편적 복지다. 하지만 5만 원은 최소 소득보장을 위해서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이다. 이 경우,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 보편적 복지의 효시가 된 1930년대 스웨덴의 육아 정책을 보자. 당시 육아 정책의 질적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사회복지 정책들도 많은 부분 낮은 수준의 보장 정도만 담아낼 뿐이었다. 기존의 급여 수준이 10만 원에도 못 미쳤던 우리나라의 기초노령연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금액이 어르신들에게는 유의미할 수도 있지만 인간적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금액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단순히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혜택의 질을 높여야 한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질이 보장된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내 문제'가 아닌 보편 복지, '나의 관계망' 속에서 생각하라

▲ 건강검진을 받는 어르신 ⓒ연합뉴스
앞서 나는 보편적 복지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욕구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했다. 그런데 기초노령연금, 보육과 같은 보편적 복지 시스템에서 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한 개인은 육체적으로는 독립적인 '나'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아내의 남편', '아들의 아빠', '부모의 아들' 등도 포함한다. 사회복지로 제공되는 혜택을 '나의 관계망'을 기준으로 해서 고려한다면, 매우 다른 결론이 나온다.

현재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된 기초연금의 경우,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간 갈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65세 이상의 모든 어르신에게 지급되는 것은 나의 부모나 조부가 수혜 대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관계망을 자신의 주변으로 조금만 확장한다면, 거의 모든 관계망은 기초연금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영유아의 보육을 위해 제공되는 수당과 지원금도 마찬가지다. 내 주위의 누군가는 영유아의 부모일 수 있기 때문에 관계망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관계망이 수혜자가 된다.

중증질환에 대한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상한제도 마찬가지다. '나의 관계망' 속에는 분명히 한두 명의 중증질환을 갖고 있는 성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더 내는 것은 결코 자신의 돈을 다른 사람에게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나의 관계망'에 속한 사람을 포함하여)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임산부 지정석'과 '노약자 지정석'도 이해할 수 있다. 한 개인이 갖는 '나의 관계망' 속에 누군가는 임산부이고 노약자이며, 그 지정석은 바로 그들을 위해 지정해 놓은 자리다. 결코 나와 동떨어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생애주기를 생각하면 보편적 복지는 '나의 문제'가 된다

생애주기를 생각하면 보편적 복지는 '나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태아부터 노인에 이르는 긴 생애를 살아간다. 많은 사회복지 혜택들은 이 생애주기 중의 특정 시기에만 제공받을 수 있다. 영유아 관련 수당과 지원금은 자신이 영유아일 때, 그리고 영유아를 갖는 부모일 때 한해서 받는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은 노인이 되었을 때 한해서 받는다. 그러나 비록 현재에는 받지 않는 혜택들도 미래에는 받게 될 것이며, 어떤 것들은 이미 과거에 받은 것들이다. 보육을 예로 들자면, 아직 자식을 낳지 않은 사람들은 미래에 낳을 자식을 위해 자신의 수입 중 일부를 세금을 통해서 국가에 미리 저축해 두는 셈이다.

기초연금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사람들은 미래에 자신이 받을 기초연금을 세금을 통해 조금씩 국가에 적립해 두는 셈이다. 생애주기와 관련된 사회복지 혜택들은 필수적이고 필연적이며 보편적이다. 삶을 살아감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그 혜택들이 필요한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누구나 보육과 교육 과정을 거치며, 누구나 늙는다. 모든 이가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생애주기별로 제공되는 혜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것들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이 혜택들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혜택들의 유지를 원한다면, 그리고 이를 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요구한다면 이 제도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유럽의 복지국가들이다. 이 나라들은 이미 50년 전부터 생애주기와 관련된 체계적인 혜택들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놓았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이 혜택들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지지는 매우 높으며, 그런 이유로 경제 위기나 집권여당이 교체돼도 이 혜택들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보편적 복지의 폭넓은 제도화를 기대하며

지난 총선과 대선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시기 이후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내심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드러나고 박 대통령의 사회복지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이 윤곽을 드러내자, 보편적 복지의 확대에 대한 기대는 다소 주춤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고용을 복지의 주요한 요소로 인정하고, 이를 정책에서도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다소 진전된 안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복지 정책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의 기초와 고유 속성들은 박 대통령의 정책과는 상관없이 작동하고 있다. 유럽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사실 이러한 고유 속성들은 필연적으로 제도화로 이어졌다. 이 제도화는 단순히 법을 통해 국가에게 '근원적 필요'의 충족을 책임지라고 강제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편적 복지가 갖는 필연성, 필수성, 일반성 등의 성격 때문에 '국가가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인정은 피할 수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복지는 일차적으로 개인이나 가족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 또한 전반적으로 개인의 일차적 책임 위에 구성되어 있다. 국가의 역할도 개인의 책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 재원을 투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러면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의 제공은 거칠게 말하자면 '엿장수 마음대로'가 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보편적 복지는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사회복지를 개인의 책임 실현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국가가 상당 부분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만든다.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는 보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공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사회복지의 발달이라는 역사적 물줄기 속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의 복지 정책도 일면 보편적 복지를 제도화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 이러한 보편적 제도화를 강화하여 국민들의 생존과 인간적 삶을 위한 '근원적 필요'들이 조금이나마 더 제대로 충족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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