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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은 아득하고 창작은 번개 같고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22〉



▲ ⓒ프레시안

얼마 전 제 스승이 9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에게는 유일한 장인 스승입니다. 만봉 스님은 제가 20대에 4년간 다니던 절의 화승입니다. 불화를 그리는 금어 스님입니다. 저는 우리 스님을 마지막 조선의 화승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화의 옛 전통을 지켜오신 분이셨습니다. 조선의 붓그림이 무엇이고 장인의 수련이란 어떤 것인지 말없이 그야말로 우두커니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 속 모를 정적이 답답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 불화는 참 답답한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 답답한 동굴 속 같은 곳을 깊숙히 들어가 유영하다보면 깊은 바다 속 같이 아득한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즉 고대의 숨소리를 만나게 됩니다. 아득한 숨은 흡사 깊은 산 숲에서 느끼는 낙엽 썩는 냄새 같은 싱그러움이 있습니다.

젊은 학창 시절 마음이 울적 할 때면 봉원사 스님 댁을 찾아가 불화초 몇 장 그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들끓던 성정이 한결 차분해져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조선 불화의 향기는 절 뒷담의 이끼처럼 1970년대 봉원사 깊숙한 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마음 수양법 삼아 배우던 조선의 불화는 그 이후 전개될 내 미술의 운명을 송두리 채 바꾸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후 내 그림은 조선 불화의 전통에 크게 신세 지고 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선의 불화초(佛畵草)는 채색하지 않은 먹으로만 그린 붓그림입니다. 화려한 기교도 보이지 않고 족제비 꼬리털 몇 가닥 묶어서 세운, 아무 멋대가리 없는 작은 붓을 고추 쥐고서 결가부좌하고 납작 엎드려 그리는 그림입니다. 엎드려 하심하며 가장 낮은 자세로 그리는 그림, 기교는 다 빠져서 군더더기를 모두 털어낸 그림, 선긋기를 따라가며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그림, 못처럼 박혔다가 쥐꼬리처럼 사라지는 빈터 투성이 그림입니다.

세상의 많은 그림법 자세 중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엎드려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자세로 마음도 몸도 모두 낮추는 그림입니다. 그리려는 상을 모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납작 엎드려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 안에 그윽하게 피어나는 내 님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내 안에 신성을 맞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워하는 내 님을 맞이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림입니다. 스승은 잊었던 조선의 숨결을 육화전승(肉化傳承)으로 전해주고 가셨습니다. 몸으로 모시어 그 뜻을 말없이 전하는 방법입니다.

스승을 보내는 날 봉원사로 문상 가서 장인이란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일머리를 얻은 사람입니다. 장자가 말한 물질로 들어가 물질로부터 자유를 얻는 자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좀 설명이 부족합니다. 들어가되 지극한 사랑으로 물(物)을 감화시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자가 참장인 같습니다. 물의 성질을 질적인 새 차원으로 격조를 높이는 것입니다. 격조신운(格調神韻)입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김치를 잘 담그는 할머니, 장을 잘 담그는 아줌마, 벼농사를 잘 짓는 농부, 붓을 잘 만드는 사람, 쇠를 잘 다루어 연장으로 바꾸는 사람, 아이를 잘 키울 줄 아는 어머니, 컴퓨터 수리를 잘하는 기술자 등등 우리네 삶에는 찾으면 찾을수록 훌륭한 장인이 곁에 있습니다. 물질의 속성을 잘 헤아려서 그것을 가지고 놀 정도로 달인이 된 자들입니다. 우두커니 몰입하여 물과 사랑놀이 하는 자들입니다.

저는 오늘 하루 종일 말없이 혼자 놀았습니다. 우두커니 즐거움에 몰입하여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하루 종일 혼자 있는 날도 행복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좀처럼 힘들었는데 요즘은 궁둥이가 무거워졌습니다. 대화 상대 없이 이렇게 혼자 살아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건 요즘처럼 외로움 잘 타게 만드는 시대에 복이라면 복입니다.

젊은 시절 장인 스승의 가르침이 답답하게 느껴져 뛰쳐나갔었습니다. 젊은 마음에 나는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라 똑같은 그림을 천번 만번 베끼게만 하는 스승의 교습법이 못마땅했었습니다. 그러나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붓에 기감(氣感)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붓을 발로 차버려도 요지부동으로 다시 제자리를 지키는 직필(直筆)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신기한 이 체험을 참을 수 없어서 학교 판화시간에 창작으로 응용하였습니다. 무례한 일이지만 배우기를 3년도 안 되어서 창작화로 응용해 보았으니 여기 소개한 목판화가 저의 최초 목판화 창작입니다. 소리 없는 조용한 고대의 숨소리를 내게 은밀히 초대하던 날이었습니다. 1979년 그 해는 내 붓그림이 불화초를 벗어나던 잊을 수 없는 해입니다. 조용하지만 발칙한 반란이 시작된 첫 해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 붓그림의 반란'은 지금까지 회화로 조각으로 디자인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통의 학습이란 '그렇다'이고, 창작은 학습한 것을 다시 버리는 '아니다'입니다. 수용은 장인의 자세요, 반란은 예술창조자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입고출신(入古出新)입니다. 입고는 아득하게 길고 출신은 번개처럼 순간입니다. 점수돈오(漸修頓悟)입니다. 한포기 풀이 조상의 종자를 닮으며 자라기를 평생 하면서 꽃 피기는 잠깐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장인적인 학습은 평생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요즘 대학에서 예술교육은 입학하자말자 창작이 중요하다 하면서 입고도 안 된 제자에게 홀로서기를 요구합니다. 몸이 만들어지고 나서 꽃 피기를 모색하여야지 줄기도 잡히지 않은 꽃대에 꽃피기만 부채질합니다. 머리만 키우고 몸을 키우지 않는 이상한 예술교육이 우리 예술문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장인학의 부재입니다.

지금 예술은 현대예술이라는 명목을 붙여놓고 한쪽은 형상력 없이 아이디어만 가지고 자랑하고 또 한쪽에서는 전통계승이라는 명목으로 옛것을 베끼기만 합니다. 한쪽은 출신만하고 한쪽은 입고만 합니다. 서로 절름발이처럼 한쪽만 쥐고 갑니다. 한쪽은 머리만 있고 한쪽은 몸만 있는 기형적 분업주의가 우리 문화의 한 특징입니다.

추사는 추사체를 세우기 위해 52세까지 입고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석문에 나오는 고체인 한나라 전서와 예서를 수 없이 베꼈습니다. 요즘 화가들이 남의 글씨나 그림을 밑에 놓고 베끼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몸을 낮추고 임서모화(臨書摸畵)를 사십년 넘게 한 것입니다. 붓 천 자루를 달아 없애고 벼루 10개가 뚫어지도록 학습한 이후 출신이 시작됩니다. 52세 제주도에 귀향 가서 탱자나무 울타리집을 못 벗어났던 9년의 세월이 비로소 출신을 하는 시기입니다. 바로 여기서 동아시아 최고의 서예라는 찬사가 붙는 추사체가 나옵니다.

제발 바라건대 예술교육은 조기교육이니 동아시아 전통 붓그림과 붓글씨 공부를 대여섯 어린나이부터 시키는 교육이 제도화도기 바랍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만 조기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라나 성인이 된 미술가는 한국의 디자인 문화를 확실히 입고출신할 것입니다.

내 예술도 지금부터라고 스스로에게 격려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글쓰기? 환쟁이가 그림 제쳐두고 어디로 가려고 글쟁이 노릇하는지 나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 짊어지고 가기도 벅찬 이 짐을 둘 셋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만용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벌써 길을 떠나 돌아갈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에라, 갈 데까지 가렵니다.

그 누가 알리요. 동방의 서화동류(書畵同類) 정신이 내게도 입고출신으로 피어날지.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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