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권고의 배경
2011년 8월부터 한국철도공사는 '서울역 야간 노숙 행위 금지' 조치를 시행했다. 서울역에 노숙인이 머묾으로 인해 여러 민원이 들끓으니 야간 노숙을 금지하고, 용모를 검사해 지저분한 노숙인은 서울역 내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철도공사는 민원을 떠받드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역사 운영 수입을 증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게 실제 이유였다. 이를 위해 철도공사는 그동안 노숙인들의 질서 위반 행위를 꾸준히 수집하고 일반화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속내는 둘째 치더라도 이 조치는 노숙인이란 신분을 특정한 차별 행위임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래서 거리 노숙인 6명은 '서울역공대위'와 함께 2011년 8월, 인권위에 철도공사의 퇴거 조치와 차별 중단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인권위 역시 서울역 조치가 인권적 함의가 크다는 판단을 하고 2011년 8~9월 동안 긴급 실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노숙인 인권 개선을 위한 정책 권고의 건'이 2011년 12월 인권위 상임위원회에 상정되었고, 논란을 거쳐 2012년 1월 30일 전원위원회 논의에 부쳐졌다. 권고안은 긴급 실태 조사 결과 노숙 금지 조치가 노숙인의 자활 의지와 자아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노숙인에 대한 낙인이 강화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이동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으로 인권 침해적 속성을 갖고, 근본적으로 노숙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며, 실제 조치의 대상이 거리 노숙인임을 제기하였다. 이에 권고안은 1) 노숙인의 초기 탈노숙을 유도하는데 공공 역사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노숙 금지 조치를 재검토할 것, 2) 노숙인 정책의 후진성이 거리 노숙 상태의 장기화를 불러오는 바 서울시의 정책을 보완할 것을 주문하였다.
차별적 시각이 가득했던 2012년 전원위원회
그러나 당시 전원위원회는 위 정책 개선 권고를 부결시켰다. 인권위원들의 논의 방식과 수준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인권위원들은 "나도 막차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상당히 피해 다녀야 한다", "인도 뉴델리역에 갔는데 노숙자들이 많아서 인도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 "한 달만 복지회관에 입소하면 다 재활한다더라"라며 인권위원 스스로 차별적 시각에 기초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속설에 기댄 판단을 서슴지 않았다. 권고의 목적이 서울역 노숙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 철도공사와 행정기관의 유기적 노력을 위한 것임에도 "서울역에서 노숙하게 하면 탈노숙 의지가 커지냐"며 의도적으로 목적을 곡해하였다.
또한 현병철 위원장은 "시급한 것 같지는 않다. 시급했으면 뭔가 일이 나지 않았겠는가"라며 서울역 조치로 인한 노숙인들의 고통을 평가절하하였다. 반면, 정작 정책 권고의 근거로 제시된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의 논의 끝에 노숙인 인권 정책 개선 권고는 장기 과제로 재검토하자는 현병철 위원장의 제안과 함께 부결되어 미뤄졌다. 그 후 인권위는 노숙인 인권 개선을 위한 정책 권고안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물인 '노숙인 인권 상황 관련 정책 개선 권고'가 1년 만인 2013년 1월 28일 2차 전원위원회에서 다루어져 2월 5일 발표되었다.
음주 제한 구역, '인권위'식 통제 정책?
'노숙인 인권 상황 관련 정책 개선 권고'는 "역 주변 등 노숙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발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 음주 제한 구역을 설정"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인권위는 권고 전문을 통해 노숙인 관련 정책이 "국민으로서 가지는 권리의 보장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노숙인에 대한 관리 정책으로 접근해왔다"며, "노숙인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집단적 낙인은 무수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나아 집단적 차별로 변이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알코올 의존과 정신질환 환자에 대한 현장 의료 지원이 빈약하고, 노숙 상황에서 의료 접근권을 실효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즉, 인권위의 진단과 대책은 충돌하는데, '관리 정책'이 문제라는 인권위가 더 훨씬 강도 높은 관리하에서나 가능할 '음주 제한 구역'을 설정하라고 권고한 점이다. 알코올 질환에 대한 노숙인 의료 체계가 문제라던 인권위가 술을 안 보이는 데서 마시게 하라며 해결이 아닌 은폐를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년 8월, 서울역 강제 퇴거 1년을 기해 진행한 서울역 노숙인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공간의 상실', '모멸감', '시선 악화'에 따른 고통이 강제 퇴거 직후보다 심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강압적 단속'에 따른 고통은 3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광역지자체장을 상대로 권고된 '음주 제한 구역'은 노숙인에 대한 관리·통제정책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할 여지가 다분하다. 기존에도 지자체나 공기업들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의 야영 금지 조항이나 자체 규정에 따라 노숙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하다못해 일부 공공장소에는 '노숙자 출입 금지' 입간판을 세워놓거나 '노숙 자율 금지 구역'을 지정해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발표된 인권위의 권고는 노숙인 통제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2000년대 후반 들어 기초지자체마다 '음주 청정 지역'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례가 속속 제정되고 있는데, 이번 인권위 권고는 이와 같은 제도를 활용해 기초지자체 차원으로까지 노숙인 통제 정책을 확산할 파급력 또한 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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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마나 한 정책 개선 권고
이와 달리, 정부·지자체를 상대로 하는 노숙인 정책 개선 권고는 느슨하고 엉뚱하다. 권고의 대부분은 이미 계획상 추진 예정인 사업들을 재언급하는데 할애되는데, 예를 들어 노숙인복지법에 따라 이미 예정된 인식 개선 사업을 시행하라거나, 몇 해 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개인 파산 정보 제공 등의 사업을 실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노숙인의 현실과 괴리된 정책들도 상당한데, 의료급여 선정 기준(시설입소 3개월 이상, 건강보험 6개월 이상 체납자 등의 기준)과 진료 제한(지정병원제 운영)과 같은 노숙인 의료 정책의 핵심 문제는 누락한 채 의료 지원 지침을 만들라거나, 1인 가구용 주거 취약 계층 임대주택 공급 부족(2012년 전국공급분=36가구)과 같은 고질적 문제를 외면한 채 이미 과잉(주택 형태 측면)인 가족 단위 거처 마련을 권고하고 있다. 정부·지자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담 없이 쥘 수 있는 칼자루 하나를 선물 받은 셈이다.
우리 사회가 노숙인을 대하는 방식은 인권위가 말하듯 관리 정책 편향이었다. 그들이 주체로 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고심하기보다 노숙인들을 골칫거리로 규정하고 그들만의 세계에 자족하도록, 우리의 세계에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 집중해왔다. '노숙자 출신 CEO'류의 사례는 품어줄 수 있으나 여타의 노숙인들과 시공간을 함께하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한 일이 되고 있다. 이런 찰나, 인권위의 '음주 제한 구역' 지정 권고는 벽을 허물기는커녕 그들만의 세계마저 더욱 위태롭게 하는, 노숙인 인권 환수 조치에 다름 아니다.
(*이 글은 "노숙인들만의 게토를 만들라는 인권위"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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