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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라쓰카' 사례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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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라쓰카' 사례에서 배운다

[복지국가SOCIETY] 지방의 문화관광 사업을 통한 지역경제의 활성화

지방에 살다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문화 활동의 결여이다. 물론 대전 같은 큰 도시는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등도 잘 갖추어져 있어 전시회도 개최되고 연극 공연도 자주 열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서울만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다양한 소규모 전시나 소극장 공연이 부재하다는 것은 역시 아쉬운 부분이 있다.

대전과 같이 큰 도시도 이러한 상황이므로 이보다 더 작은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활동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 문화 사업 확대가 지방 경제를 활성화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도 그간 특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개성 넘치는 지역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많지만, 일본에서도 재미있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문화 사업을 통한 농촌 지역의 발전

일본 오사카 근교의 다카라쓰카(宝塚) 시는 대표적인 간사이(関西) 지역의 문화 관광지다. 이 도시는 주말이면 연극 보러 온 사람, 쇼핑하러 온 사람, 가족 단위로 유원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오사카 및 고베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있어 가족 동반의 관광객이 많고, 강변에 저렴한 호텔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그 인기가 매우 높다.

원래 다카라쓰카 시는 19세기 말까지도 산업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낙농업, 포도 재배, 쌀 재배를 통해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다카라쓰카 가극과 같은 문화 공연과 관련성을 가지면서 관광도시로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고, 현재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주요 유원지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카라쓰카 가극단의 모회사라고 할 수 있는 한큐(阪急) 철도 회사였다. 즉 이 회사가 다카라쓰카 가극이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 가극을 보려고 몰려드는 관객들을 위해 편리한 교통망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다카라쓰카 가극의 탄생과 더불어 농업 지역이었던 이 도시는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으며, 다카라쓰카의 많은 주민들은 가극과 관련된 관광 사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다카라쓰카 시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의 여가시설을 계획하고 현실화했던 한큐 그룹의 창설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 덕분이었다.

고바야시 이치조의 경영

고바야시는 매연으로 오염된 도시를 벗어나 공기 좋고 깨끗한 교외의 근대적 주택에 살며 휴일에는 기차를 타고 레저 시설에 놀러가 하루를 보내는 것을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가족을 위한 여가 시설을 오사카 근교에 설치함으로써 농촌 지역의 철도 종착역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구상했다.

▲고바야시 이치조
1892년에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고바야시는 1905년 한카쿠 철도(阪鶴鉄道)라는 민간회사의 감사역을 맡으면서 한카쿠 철도의 해산 작업과 새로운 철도회사의 신설 작업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는 이시바시(石橋)역으로부터 오사카 북쪽 방향으로 미노(箕面)에 이르는 철도와 북서쪽으로 다카라쓰카에 이르는 선로를 건설했다. 이렇게 선로는 놓였지만 문제는 이 두 선로가 도시를 따라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는 데서 발생했다. 승객은 많지 않았고, 수지 타산을 맞추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는 철도 이용객을 늘리고자 다카라쓰카의 구 온천지에 새로운 온천장을 1911년 5월에 개장했으며, 1911년 10월에 일간신문사인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毎日)>와 함께 아동을 위한 박물관도 개장했다. 또한 1913년부터는 매년 여성, 결혼, 가족에 대한 전시회를 다카라쓰카에서 조직했다. 그는 또한 당시에 철도 요금이 너무 비싸 이용이 저조하다는 것을 깨닫고 요금을 낮추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면 오히려 이득이 증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철도 이용객을 유인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 해결책으로 다양한 오락시설과 공연예술을 구상했다. 바로 이런 생각은 1913년 다카라쓰카 가극단의 창설로 현실화되었다.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 묶여 있던 생활을 개선하고 다가오는 미래에 어울리는 근대적인 가족생활의 장을 제공한다는 이러한 장대한 구상은 물론 고바야시만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생활개선'이라는 표어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바야시의 구상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선구적이면서도 대규모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미노의 자연 속에서 노는 것, 온천과 단풍을 즐기고 도요나카의 운동장에서 스포츠를 관전하는 것을 이러한 생활개선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또한 스포츠 관전을 위해서 이미 1913년부터 도요나카 운동장에서 스탠포드 대학과 워싱턴 대학의 야구팀을 초청해 와세다 대학, 메이지 대학 등과의 경기를 기획하였다. 도쿄 여섯 대학 야구의 리그전이 시작된 것이 1915년의 일이므로 이것은 시대를 앞서간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철도역에 백화점을 건설하는 것도 함께 추진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생각은 1920년 11월 우메다에 5층의 쇼핑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이후 1929년 4월에는 리모델링을 해 지상 8층, 지하 2층의 한큐 백화점을 세웠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사업방식의 하나인 터미널 백화점이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터미널 백화점은 철도선을 따라 도시가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사치품 매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과는 달리 한큐 백화점은 음식과 일상 잡화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대중적 매장이라는 이미지를 추구하였다.

고바야시의 예술관과 예술 경영

고바야시의 이러한 생각은 다카라쓰카 가극단 경영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일부의 특권 계급을 위한 예술이 아닌 국민 전체를 위한 예술이었다. 그는 이를 국민극(國民劇)이라고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가부키(歌舞伎)는 대중의 예술이었다. 그것은 무사계급이 감상했던 노(能)나 교겐(狂言)에 비해 서민의 생활감각에 근거를 둔 훌륭한 국민극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가부키는 일반 서민의 감상으로부터 유리되어 화류예술이 되어 버렸다. 결국 가부키는 특수한 계층만을 위한 예술이 되어 버렸고 국민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그는 많은 국민들에게 예술 작품을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입장료가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가부키나 오페라와 같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 대공연의 경우에도 입장료를 올리기보다는 관객 수의 증가를 그 해결책으로 바라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을 구상하면서 기술적으로는 종래의 전통적 악기로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이 시점에서 서양음악의 오케스트라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또한 대사에 있어서도 대극장에 요구되는 성량을 배우들이 가져야 하며, 넓은 무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무용을 증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연극에 대사와 무용이 일체가 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가부키를 모태로 거기에 서양적인 음악과 무용을 취해 넣는 것이 그의 '대극장주의'를 위해서는 필수였다.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망한다"고 생각했던 고바야시에게서 이러한 대극장 건설은 시급한 것이었다.

'대중예술로서 가극'을 표방하는 이러한 그의 사상은 또한 양차 대전 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극장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행한 반론인 '대극장의 반대자에게'라는 글을 보면, 현재 일부 특권 계급에게 빼앗겨 버린 연극을 대중이 되찾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대중의 힘이 왕성해지고 개혁의 공기가 충만하게 넘치고 있는 시대적 기운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는 그의 맹렬한 비판 대상이 되었다. 시대의 공기를 무시하고 단지 옛날 그대로의 연극 방식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예술 진영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고바야시는 신극(新劇)과 같은 실험적인 연극에 대해서도 "서양 직수입 진영은 가부키에 상징되어 있는 특권 계급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유리시켜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일부 지식층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 사상의 누각이라고 평했다. 연극이 특권 계급만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다수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보통선거의 지지로 나타난다. 그는 '노농러시아(勞農ロシヤ)'에 대중을 위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인용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당시 대중문화를 지향하려는 다이쇼 민주주의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이상가라기보다는 실행가로서 스스로 인식하고 있던 고바야시는 이러한 대중 노선을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갔고, 그 결과의 산물이 바로 1924년에 완성된 다카라쓰카 대극장이다. 4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의 공연 입장료는 일률적으로 30전이었고 신온천의 모든 시설을 모두 포함해도 1엔에 미치지 않았다. 당시에 도쿄의 제극(帝劇) 입장료가 가장 싼 좌석이 30전, 최고로 비싼 좌석이 2엔에서 3엔 사이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는 대중 노선의 중심에 서 있던 고바야시의 입지점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가극단 운영

한큐 그룹이 경영하는 가극단인 다카라쓰카는 연간 관객이 200만 명에 달하며, 전속 스태프들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약 400명의 연기자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도쿄와 다카라쓰카에는 객석수 2000석이 넘는 전용 대극장을 소유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국극처럼 출연자가 모두 미혼 여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가극단 창립 당시 고바야시가 내세운 모토인 "순결하고, 올바르고, 아름답게"는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그는 배우들을 위한 기숙사를 건축했으며, 이들을 하나의 가족 구성원으로 다루었다.

다카라쓰카 가극단은 수익 면에서는 많은 불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대중 연극에 대한 공적 지원이 적다 보니, 모든 수익을 티켓 판매에만 의존해야 하는 대중 연극으로 흑자를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가극단이 흑자 경영으로 돌아선 것은 대략 20년 전부터 일이고, 그 누적적자는 100억 엔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막대한 제작비에 있다. 화려한 의상과 사실적 무대 장치를 위해 드는 비용은 대략 작품당 3억 엔이 들어간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의상은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에 의뢰하기도 하며, 무대의 사실성을 위해서 코끼리를 무대에 직접 올린 적도 있다.

▲ 무코 강변의 다카라쓰카 대극장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카라쓰카의 국민극과 대극장주의 방침은 계속 고수되었고, 다른 공연에 비해 입장료는 여전히 저렴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한큐 그룹의 지원 덕분이었다. 가극 사업부가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문화 소비자가 가장 많은 도쿄에서 일 년 내내 공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1934년에 도쿄 다카라쓰카 극장이 개장되었지만 1944년에 전쟁에 의해 다카라쓰카 대극장과 도쿄 다카라쓰카 극장이 폐쇄되었다.

이후 1946년 다카라쓰카 대극장이 개장되었고, 다음 해에 도쿄 다카라쓰카 대극장이 재개장되었다. 또한, 1978년에는 다카라쓰카 바우홀이 개장되었다. 'TAKARAZUKA1000days' 극장은 1998년 5월 개장했는데, 새로운 '신도쿄 다카라쓰카극장'이 완성하는 2001년까지 1000일간 공연을 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지방에서 문화 사업의 가능성과 기업가의 역할

1954년에 고바야시는 자신의 사업에 대해 "나 자신도 정말 놀랍다"라고 하면서 그 경이로운 성공에 감탄한다. 이 말을 한 지 3년 후에 그는 눈을 감았다. 고바야시의 장례식에는 300명 이상의 연극 관계자와 철도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이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그가 단순히 이윤을 위해 이런 사업을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국민극과 대극장주의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지만, 그는 저렴한 가격에 수준 높은 예술을 대중들이 만끽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그는 판단했다. 서양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접목시키지 않고는 변화하는 현실에서 도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기성세대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에게서 일본의 희망을 보았던 것도 바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카라쓰카의 사례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문화와 여가 활동을 위해 헌신한 한 기업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이곳 시민들이 다카라쓰카에 대해 갖는 자부심과 고마움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의 문화 소외 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대책으로서 관광문화 사업 논의가 활발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종종 하드웨어 중심의 난개발업자들과 수익성 추구에만 급급한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어 아쉬움을 낳는다. 다카라쓰카 시 사례에서 보듯이, 중요한 것은 성급한 보여주기식 치적이 아니라 독창적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장기적인 실현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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