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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 불국사가 영지 못에 비치거든…

[김유경의 '문화산책']<14> 아사달과 아사녀, 그리고 영지

경주 동남쪽 울산 방향 7번 대로에는 성덕왕릉, 영지, 원성왕릉이 있다. 불국사 가는 도중에 있는 이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의 철학적 건축과 예술을 가리키는 이정표인 양 다가오고 8세기 경주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 성덕왕릉이 있는 양장곡 분지의 돌거북. 거대한 조각의 머리는 깨어지고 비석도 사라진 채 논벌 한가운데서 능역을 지킨다. ⓒ 이순희

35대 경덕왕 김헌영이 그 중심에 있다. 그의 재위(742-765년) 중에 시작되거나 이뤄진 황룡사대종, 성덕대왕신종, 춘양교와 월정교, 성덕왕릉, 불국사와 석굴암, 충담과의 대화 등은 통일신라 문화가 학문과 예술 모든 방면에서 절정에 이른 시대를 말해준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 경덕왕은 723년 출생했다. 그가 두 살, 형 효성왕이 네 살 때 어머니 성덕왕비가 25세로 죽었다. 성덕왕은 외척의 권세를 피해 왕비를 다시 들이지 않고 홀아비로 두 아들을 키웠다. 효성왕도 재위 6년 만에 후사 없이 갑자기 죽었다.

동생 헌영이 20살에 대를 이어 경덕왕이 됐다. 즉위 직후 그는 막강한 권력가문의 딸인 왕비 삼모부인을 아이가 없다는 핑계로 내치면서도 같은 가문의 다른 여성을 새 왕비(만월부인)로 들여 외척의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그들의 공고한 권력을 제압했다. 그의 치세에는 끊임없이 문물을 심화시킨 사실이 기록돼 있다. 경덕왕은 생각이 깊고 정치적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경주 시내에서부터 경덕왕 치세의 뛰어난 유물을 만난다. 지금 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선왕인 성덕왕을 어떻게 섬겼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왕 자신이 12만 근의 구리를 시주하며 발원한 신종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그의 왕비 만월부인의 주도로 771년 그의 아들 혜공왕 대에 완성되었다.

성덕왕릉은 경덕왕 때 불멸의 건축인 불국사와 석굴암의 서곡 같다. 왕이 충담스님과 그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던 반월성, 그 아래 남천에 지금 복원 중인 월정교도 그의 재위중인 760년에 이뤄졌다. 길이가 60m에 누각과 회랑이 연결된 돌다리였다고 문화재청 자료는 알려준다.

▲ 성덕왕릉. 능을 둘러싼 두 줄의 돌란대(돌난간) 건축은 불국사의 돌난간과 느낌이 같다. ⓒ 이순희

토함산 서북쪽, 조양의 너른 벌판과 만나는 분지를 양장곡이라고 한다. 역사서는 이곳을 길지로 잡아 성덕왕릉을 축조했다고 했다. 들국화와 소나무가 논벌을 따라 피어 있는 이 장소는 유난히 온화하고 평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느 시점엔가 머리가 깨진 커다란 두 마리 돌거북이 논 가운데 능역 입구에 좌정해 이곳이 애초 대단한 신분을 가진 이의 공간임을 알렸다. 능의 한쪽은 논 벌 너머 야트막한 산의 능선이, 한쪽은 동해 남부선 기찻길 옆에 삽살개가 지키는 집이 있는 도시 변두리일 뿐이었는데 그 안에 이런 맑은 풍경이 들어 있다니 '비밀의 화원'같았다.

성덕왕(재위 702-737)릉에는 세모꼴 받침돌과 십이지신상, 돌난간이 둘려 있다. 세모꼴 받침돌은 만주의 광개토대왕릉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자연석 받침돌의 변형된 구조물 같고 난간의 돌기둥 사이를 연결한 두 줄의 갸름한 돌란대는 즉각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의 돌난간과 다보탑의 난간 조각을 연상시켰다. 삼국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국력으로 갖추게 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돌난간의 등장은 불교적으로 왕좌를 의미한다'고 지난 6월 갑자기 작고한 신라왕릉 연구자 이건직 교수는 말했었다. 경덕왕릉은 이 구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내남면에 있고 그의 능에도 십이지신상과 두줄의 돌난간이 건축됐다. 성덕왕릉과 비슷한 구조이다. 돌난간은 능에서도, 탑과 계단에서도 특유의 분위기를 던지는 아주 섬세하고 세련된 상징이었다. 경덕왕이 사랑한 8세기 건축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건축가는 김대성과 아사달 말고도 또 누가 있었을까.

▲ 다보탑 탑신 옥개석 위에 올려진 난간 건축. 짧은 기둥과 소로받침이 있는 통일신라 건축이다. 여기에도 돌난간이 주요 건축요소가 되었다. 이 탑을 보러 가기 전 역시 난간이 둘려진 성덕왕릉을 보며 일관된 건축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 이순희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후일 경덕왕 혈통 왕계를 부정하던, 쿠데타 출신 원성왕의 능에도 화려한 난간 장식이 있다. 원성왕릉(괘릉)도 불국사 가는 길, 성덕왕릉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능 앞의 석물 등이 많이 남아 있어 경주 왕릉 중 가장 화려하다.

▲ 경주시 내남면의 (전)경덕왕릉. 성덕왕릉과 비슷한 구조이며 돌난간이 있다. 경덕왕이 사랑한 8세기 건축 장식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경주에서 경덕왕릉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 이순희

토함산이 비쳐 보이는 영지는 성덕왕릉과 원성왕의 괘릉 중간 외동읍 괘릉리 도로변 논과 숲에 면해있었다. 불국사 건축과 뗄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의 사랑이 깃든 연못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든 사람은 백제인 아사달이었다. 그를 만나러 먼 길을 온 아사녀는 "일이 다 끝나면 영지 못에 불국사가 비치고 그때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말만 들었다.

영지 못을 매일같이 들여다보며 기다리던 아사녀는 어느 날 영지에 석가탑 다보탑이 비치자 그리움으로 껴안으려고 하다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아사달이 달려왔을 때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 물속에서 바위가 하나 올라왔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석굴암의 본존불처럼 똑같은 자세로 다듬어 불상을 만들어 세웠다.

▲ 아사달의 예술과 아사녀의 사랑이 깃든 영지.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이 물 위에 비쳐 보인다. 오른쪽에 길이 나면서 못은 절반쯤으로 줄어들었다. ⓒ 이순희

영지는 근년에 못 한쪽이 잘려 도로가 나면서 면적이 줄었다. 길게 뻗어 있는 모양이 된 영지가 얼마나 큰지 알고 싶었는데, 경주여행의 필수품 중 하나 줄자로는 어림도 없고 다만 낚시하는 이의 말로는 '서울의 여의도만하다'고 한다. 기다란 사각형 또는 장화처럼 생긴 못의 모양새부터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정말로 영지 못에는 토함산이 커다랗게 그대로 비쳤다. '산 중턱의 불국사가 비치거든'이라던 아사달의 말도' 못에 비친 토함산 그림자에서 불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다짐일 것이다. 옛날 불국사는 2000 칸의 큰 규모라 했고 영지도 지금보다 두 배쯤 됐다. 영지 부근은 숲이 나 있고 번잡한 아무것도 없다가 영지 끄트머리에 붙여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 리조트 단지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 영지에서 솟아나온 바위로 빚었다는 아사녀 불상. 석굴암 본존불과 수인이나 자세가 같다. ⓒ 이순희

못옆으로 난 길을 건너 석불이 하나 서 있다. 이 불상이 바로 영지 못에서 나온 바위로 만들었다는 불상이다. 불상이 깎여나가 정밀한 예술의 느낌은 덜 하지만 좌대나 불상의 자세는 비례가 보기 좋고 대형인데다 광배까지 다 갖췄다. 6·25 때 이 지역에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사격 연습하던 총탄 자국이 이 불상에 남아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을 후일 보수했다.

그 옆에 영사라는 절 이름의 양철지붕 집 하나가 꽃밭을 달고 서 있는데 그냥 살림집처럼 보인다. 한 스님이 불상을 사진 찍고 있었다. 재를 올리는 신도들도 있어 여기저기 제물 놓인 것이 보였다.

부근에 보이는 아사녀란 이름의 도예공방이 유일하게 이곳이 아사녀의 근거지였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일하는 도예가 유재곤 씨는 3대조부터 이 터에서 100년 넘게 살아왔다.

"옛날엔 길을 넘어 논밭 몇 개 지난 저쪽 둑까지가 영지 연못이었으니 굉장히 컸어요. 길을 내면서 못이 중간에 뚝 잘린 겁니다. 이 석불은 못 중앙에 있다가 못이 줄어들면서 땅으로 드러난 겁니다. 아사녀를 새긴 거라고 우린 생각합니다. 석굴암의 부처님과 수인도 똑같이 만들었어요. 여기 절이 있었대요. 지금도 땅을 파보면 기왓장 파편 등이 나와요. 불국사에서 여기 영지가 내려다보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저 같은 아이들이 소 데리고 나와 먹이고 풀 베고 고동 잡아먹고 못 가에서 놀다가 저녁에 각자 자기네 소 몰고 집에 가곤 했죠. 지금은 못에 외래어종을 너무 많이 방생해서 배스가 많고 토종 물고기는 잘 안 보여요"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지 이야기를 잊은 것일까? 불국사의 그림자 같은 이곳은 경주관광에서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영지의 안내판에는 '아사달이 석가탑 다보탑을 만들 때 아사녀가 기다리던 곳'이라는 글귀가 있다. 길을 내느라고 잘린 쪽 둑은 볼품이 없지만 맞은편 둑은 오래된 풍경에 나무가 울창하고 무덤도 있었다. 토함산이 어른거리는 물은 고요했다. 관광객은 없고 요즘은 낚시하는 이들만이 찾아오고 배스 물고기 잡는 이야기만 한다.

유재곤 씨 말대로 불국사에서 보인다는 영지 못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붙잡고 물어본 불국사 사람마다, 스님조차도 모른다는 것이고 '영지 못을 왜 불국사에 와서 찾느냐'는 것이었다. "아 그 전설 말인교.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요즘 누가 그런 걸 궁금해 한답니까. 불국사에서 영지가 보이는지 그건 모릅니더"했다.

한참 걸려 영지가 보이는 지점을 찾아냈다. 불국사 남쪽 정문 앞 주차장 자연보호헌장 탑이 있는 언덕에서 영지가 멀리 타원형으로 보였다. 무심히 보면 주변풍경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다. 경주여행에는 정말이지 망원경이 필수 지참도구다.

'주차장에 가보라'고 가르쳐준 불국사의 용역인부는 "영지가 여기서 4km, 아니 8km, 아니 20km 밖이다"라고 확실치 않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불국사에서 바라본 외동읍 괘릉리의 영지. 작가 이태준은'산마루가 첩첩한 속 한 골짜기가 번쩍 거울처럼 빛난다' 고 했다. ⓒ 이순희

아사달은 여기서 영지와 아사녀가 있는 서라벌의 세속세계를 내려다봤을까? 예술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1975년 경주박물관에 석가탑 다보탑을 재현해 세우는데 "자그마치 각 분야의 전문가 장인들 150명이 참가해 몇 달에 걸쳐 마칠 수 있었던 힘든 일이었다"고 현장을 감독하던 전 문화재전문위원 유문룡 씨는 말했다. 8세기에는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됐을지 상상도 안 되고 일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불국사의 북적이는 공사현장에서 아사달에게만 기다리는 연인이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그때 아사녀는 영지 저수지 둑을 쌓는 데 흙을 나르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 옛날 불국사 건축은 유일하게 이곳 영지에서만 사진처럼 비쳐 보였을 테니 아사녀가 여기 와 있었을 근거가 충분하다. 1939년 현진건 글에 노수현이 삽화를 그린 <동아일보> 연재소설 '무영탑'은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고, 영지에 관해서는 이태준의 단편 '석양'에 묘사된 내용이 제일 지세하다. 이태준은 1941년 경주 어느 호텔의 영지가 잘 바라다보이는 전망대에 앉아있었다.

'…… 처녀는 영지(影地)를 향해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로 매헌을 이끌었다. 매헌은 담배를 들고, 처녀는 태극선을 들고 깊숙이 의자에 의지해 먼 시선을 들었다. 몇십 리 기장이나 될까, 뽀―얀 공간을 건너 검푸른 산마루를 첩첩이 둘리었는데 그 밑에 한 골짜기가 번쩍 거울처럼 빛난다.

"저게 영지로군!"

"네, 아사녀(阿斯女)가 빠져 죽었다는…… 전 여기서 내다보는 이 공간이 말할 수 없이 좋아요!"

딴은 오릉과 일맥상통하는 유구한, 니힐이 떠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작은 구릉들이 있고, 숲들이 있고, 꼬불꼬불 길이 달아나고, 꼬불꼬불 냇물이 흘러가고, 산모퉁이마다 작은 마을들이 있고, 논과 밭들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구름이 뜨고, 다시 그 구름의 그림자가 마을 위에 혹은 냇물 위에 던져져 있고…… 무심히 보면 그냥 푸르스름한 땅과 뿌연 대기(大氣)뿐, 아무것도 없노라 하여도 고만일 것이었다'

이태준이 크기가 줄어들기 전 영지를 바라보던 그 전망대 있는 호텔도 불국사 앞이었을 것 같다. 영지는 불국사에서 석굴암 올라가는 산길 초입 모퉁이를 꺾어 돌 때마다 나타나다가 꼭대기로 오르면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국사에 들어서기 전 그 건축에 헌신했을 명장 아사달과 그의 사랑을 받던 8세기 실재인물 아사녀의 모습을 한 번쯤 떠올리면서 멀리 영지를 바라보는 일이 첫 의례와 같았다. 영지 주변은 최근 리조트 단지로 개발 중이라 빨간 지붕 얹은 양식 건물이 옆에 있어 멀리서도 표지처럼 식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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