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에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 수괴)를 저격ㆍ사살했다. 그 때문에 일본 등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소개되지만, 남북한에서는 의사(義士)로 숭앙받고 있다.
그런데 안중근이 의사인지 테러리스트인지 따지는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평화주의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옥중에서 쓴『동양 평화론』등을 읽어보면 '테러리스트ㆍ의사(義士) 논쟁'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1909년 10월 30일 하얼빈 일본제국 총영사관에서 행해진 제1회 신문 당시 일본 검찰관 아이분(岸田愛文)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했다. 왜냐하면 일ㆍ러 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는 명목 하에, 한국 황제 폐위 등 당초의 선언과는 모두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한국의 이천만 국민 모두가 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평화를 빙자하며 조선 침략을 자행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했기 때문에 저격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남긴 유묵(遺墨) 중에 "한탄스럽게도 동양이 평화시국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일본이 침략정책의 기조를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이라는 글귀가 있다.
사형집행 날짜를 받은 안중근은,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감방 안에서『동양 평화론』을 쓰기 시작하여 끝을 맺지 못한 채 요절했다. 그는 1910년 2월 14일 여순(旅順) 고등법원 원장인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와 행한 면담에서, 5가지의 동양 평화안을 3시간에 걸쳐 설파했는데 첫 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여순(旅順)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그곳에 한ㆍ중ㆍ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軍港)을 만들고 3국이 그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평화 회의를 조직하도록 한다. 재정확보를 위해 회비를 모금하면 수억 명의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 각국 각 지역에 동양평화 회의의 지부를 두도록 한다."
1. 안중근의 '지역 중립론'의 의미
여순(旅順)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그곳에 한ㆍ청(중)ㆍ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軍港)을 만들자는 안중근의 제안은, 여순이라는 요충지ㆍ분쟁지역ㆍ전쟁터를 중립화함으로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자는 '지역 중립론'이다. 어떤 국가를 중립화하자는 '국가 중립론'이 일반적인데, 안중근이 지역 중립론을 펼친 것이 돋보인다.
여순과 같은 요충지ㆍ분쟁지역을 중립지역으로 만들어 관련 당사국들(한ㆍ중ㆍ일)이 공동이용하는 군항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그 실현여부를 떠나 매우 참신한 발상이다. 여순을 중립공간으로 만들자는 단순한 지역 중립론을 넘어 그 중립지대의 무장은 허용하되, 동양평화의 당사국인 한ㆍ중ㆍ일이 여순의 군사ㆍ경제적 자원을 공동이용하며 동양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협력안보-평화경제-평화공동체'의 발상이 탁월하다.
[안중근이 보기에] 여순 군항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려면 첫째, 한ㆍ청ㆍ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어 3국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지키게 하고, 그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게 우애를 다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군비는 여순항의 유지를 위하여 군함 5,6척 정도만 정박시켜도 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 여순에 한ㆍ청ㆍ일이 먼저 동양평화 회의를 조직하여 동양평화의 방략을 세우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회의는 장차 인도ㆍ태국ㆍ버마 등 동양제국이 다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면 동양평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393~394)
안[안중근] 의사가 뤼순[여순]을 중립화하여 동북아 평화의 거점으로 삼자고 한 것은 유럽의 철과 석탄의 산지 루르ㆍ자르 지역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루르ㆍ자르 지역에 대한 장악경쟁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으나, 2차 대전 후 유럽 철강석탄 동맹으로 공동 관리한 결과, 유럽경제공동체(EEC)로, 유럽연합(EU)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0세기 초 뤼순은 러시아의 해양진출 기지이면서, 일본의 대륙침략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한 중국 역시 구 만주지역 전체의 향방과도 맞물린 뤼순 반도의 소유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동북아 분쟁의 도화선이었다. 이 지역을 중립화하고 공동 관리함으로써 동북아의 평화와 연대의 길을 열자는 게 안 의사의 주장이었다. 지금 이러한 뤼순에 해당하는 지역이 한반도인 셈이고, 한반도가 동북아 평화와 균형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김영호, 49)
2. 안중근 '지역 중립론'의 재해석
안중근의 여순발(發) 지역 중립론을 유럽의 평화경제ㆍ경제통합, 한반도 평화론으로 재해석하려는 김영호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슈만 플랜(유럽석탄 철강 공동체 계획)을 먼저 설명한 뒤 한반도의 해주-서해의 NLL(북방 한계선) 해역-인천을 잇는 '지역의 중립화(지역 중립화)'에 관하여 기술한다.
1) 슈만 플랜
미국은 1948년부터 루르 지역을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석탄철광 산업과 함께 공동의 기구 아래 통합할 것을 프랑스에게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2년 가까이 이 요구를 거부하다가 슈만 플랜을 통해 이 요구를 수용했다. 1950년 5월 9일 오후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인] 슈만은 역사적인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슈만은 프랑스와 서독의 석탄철강 산업을 초국가적 기구 아래 통합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것과 초국가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유럽 국가들은 이 회의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통합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양국의 "석탄과 철강 산업의 통합은…오랫동안 전쟁물자 생산에 사용되었던 이 지역들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이제 탄생할 생산의 연대(solidarité de production)는 프랑스와 독일의 장차 모든 전쟁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 공동체는 평화를 위한 유럽통합의 제1보이며, 앞으로 유럽통합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고 슈만은 강조하였다.(김승렬, 47)
위의 슈만 플랜과 '안중근 플랜'은 유사한 점이 많다. '전쟁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은 루르 지역의 자원을 유럽이 공동이용하여 평화경제 공동체를 만들자'는 슈만 플랜과 '중국ㆍ일본ㆍ러시아의 패권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은 여순을 중립화하여 동북아 평화의 거점으로 삼자'는 안중근 플랜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2) '해주-서해의 NLL 해역-인천' 지역 중립화 구상
위와 같은 닮은꼴을 한반도에 재현하면서 중립화 통일에 이바지하는 길은 없을까? 안중근이 여순을 동양평화의 중심축으로 생각했듯이, 중립화된 한반도를 동북아 평화의 중심축으로 만들 수 없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응답이라도 하듯이 남북한의 정상이 2007년 10월 4일에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ㆍ4 선언')을 했다. 생각건대 10ㆍ4 선언 제3항ㆍ5항을 통하여 '해주-서해의 NLL 해역-인천'을 중립지대화 하는 지역중립 구상을 가다듬을 수 있다.
안중근이 여순을 중립화하여 분쟁 당사국들(중국ㆍ일본ㆍ러시아)이 공동이용하는 군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듯이, '해주-서해의 NLL 해역-인천'을 중립화하여 분쟁 당사국(남북한)이 공동이용하는 군사지역으로 만들며 평화공동체를 이룩하자고 제안한다; '해주-서해의 NLL 해역-인천'의 지역 중립화 모델을 한반도 차원으로 확대하자. 유럽의 전쟁 유발지였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유럽 통합의 근거지로 삼았듯이, 한반도의 새로운 전쟁유발 후보지인 서해의 NLL을 '해주-서해의 NLL 해역-인천' 지역 중립화 구상으로 엮어내어 중립화 통일의 거점으로 삼자.
<인용 자료>
* 김승렬「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생산의 연대'?」『프랑스사 연구』제6호(2002.2)
* 김영호「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북아 경제통합론」『2000年』제261호(2005.1)
* 노명환「유럽통합 사상과 역사에 비추어 본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세계사적 의의」『국제지역 연구』제13권 제4호(2010)
*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 엮음『안중근과 그 시대』(서울, 경인 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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