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5시, '사교육 특구'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를 바삐 걸어가던 초등학교 6학년 김진수(가명·남) 학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진수는 강남구 대치동에서 영재교육과 올림피아드 대비로 유명한 A학원에 다니고 있다. 진수가 다닌다는 '다른 학원' 역시 대치동에서 수학 단과 학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진수의 어머니는 아들이 과학고 혹은 영재고에 가기를 원한다.
같은 학원 앞에서 만난 중학교 3학년 박재정(가명·남) 학생은 내년 3월이면 경기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다. 이미 지난 7월에 합격통보를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재정 학생은 지난 1년 동안 과학고 입시 준비를 위해 경기도에서 이 학원까지 통학(?)했다. 재정 학생이 대치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날은 주말뿐이었다. 그러나 합격했다고 학원에 살다시피 하는 생활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과학고에서 버텨낼 수 없다"는 말에 재정 학생은 합격 발표 후 바로 과학고 선행학습반에 등록했다. 평일 저녁 5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인 수업시간은 합격 전이나 후나 같다. 토요일에는 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고교 입시를 통과했지만, 버스를 타야 하는 날은 합격 후 오히려 하루 늘어났다.
오후 5시 30분경,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수상자를 수두룩하게 배출한다는 이 학원은 하교하자마자 몰려오는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2월 말에 개강하는 겨울방학반은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주 6회 강의가 이뤄진다. 한 달 수업료는 300만 원. 어린 학생들이 고액의 학원비와 장시간의 수업을 견뎌내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대선후보들은 모르는 사교육의 속살 ☞<1> '대입 자율화' 대못 누가 뽑을까? ☞<2> "이력서에 한줄 쓰려고 3천만원 쏟아부었다" ☞<3> 영어유치원, 부모 욕망이 만든 아이들의 지옥 ☞<4> 박근혜 '온종일 학교', 학부모에게 물어보니… ☞<5> "억대 연봉 스타강사?…월 140만원 '폭탄강사'" |
특목고·자사고 '올인'의 그늘
1974년부터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제도는 오래 전부터 힘겹게 유지되고 있었다. 수월성 교육도 허용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1980년대 들어 과학고, 외국어고 등의 특목고가 생겨나면서 사실상의 고교 서열화가 부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들 학교는 분야별 영재를 키운다는 취지와 달리, 오래 전부터 명문대 입시를 위한 관문으로 변질됐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함께 이 흐름에 기름을 부었다.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고, 일선 학교의 다양화를 꾀한다'는 명목의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에 따라 전국 50여 곳에 자율형사립고(자사고)를 세웠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사립 고등학교에 학생선발, 교육과정 체제 수립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면, 학교 간 경쟁을 통한 교육의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였다. 학교가 전국 단위의 학생모집을 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원칙은 광역모집이었으나, 재단이 법인전입금을 재정의 25퍼센트(%) 이상 출원할 경우에는 전국 어디에서나 원하는 학생을 모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제 서열화는 대학을 넘어 고교로까지 확고히 자리잡았다. "특목고, 자사고 때문에 일반고가 슬럼화돼 간다"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이는 초등학생과 중학생까지 입시 경쟁에 밀어넣는 원인이 됐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프레시안(최형락) |
'고교 다양화'라고 쓰고 '고교 서열화'라고 읽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고교서열화'를 부추기는 꼴이 됐다. 대학 서열이 철저히 나뉘어 있고, 대학을 나와야만 '그나마 안정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현실은 여전한 탓이다. 이런 현실에선 모든 고등학교가 대학입시라는 획일적인 목표에 전력질주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학교를 '다양화'해도, 교육의 목표가 '획일화'돼 있다면, 결과는 뻔하다. '수평적 다양화'는 먼 이야기가 된다. 입시 성과라는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느냐에 따라 '수직적 서열화'가 이뤄질 뿐이다. 그나마 유지돼 왔던 고교 평준화 체제가 현 정부 들어 급격히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승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 자사고를 도입할 때는 정말 다양화에 대한 의욕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결과적으로 고교가 서열화됐고, 수업 내용은 (입시 위주로) 획일화됐다"고 지적했다.
등록금 3배 높은 '귀족학교' 탄생, '자율권' 무기로 입시교육에 전념
실제 새로운 서열 체제이자, 서열화를 심화시킨 주역인 자사고는 곧 '재정이 단단한 명문 사립고교'로 인식된다. 적잖은 자사고의 등록금이 일반고 시절에 비해 크게 올라, 많게는 3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 다른 특목고' 내지는 '귀족학교'가 생겨난 것이다.
더 문제는 이들 학교가 노골적으로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에 '다 걸기'를 하게 되면서 나타났다. 전문가들의 우려대로, 자사고는 선발 자율권, 교육과정 자율권이라는 두 자루의 칼을 이용해 중학교 내신 상위권 학생을 쓸어갔고, 주요 입시과목인 국·영·수 수업시수를 확대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 조사한 '2011년 고교 신입생 과목별 이수단위 현황' 자료를 보면, 자사고 재학생은 일반고 학생에 비해 국·영·수를 13~14단위(15.8%)씩 더 들었다.
"특목고·자사고와 일반고의 '양극화'…고교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중학생들"
자연히 명목상 '평준화' 제도가 유지되는 한국의 고교 체제에서, 실제로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사고 이상의 학교를 가거나, 강남권의 일반고 이상 가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특목고, 자사고 등이 아닌 강북 인문고의 명문대 진학률은 과거보다 크게 떨어졌다.
이는 중학생들의 입시 경쟁 과열로 이어졌다. 특히 정부가 지난해 고교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학사관리 선진화 방안'을 2014년부터 적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고교 입시 부담은 더욱 커졌다. 이전에는 아무리 중학교 성적이 좋았던 학생도 특목고에서는 낮은 내신을 감수해야 했는데, 제도 변화로 이제 특목고, 자사고 재학생도 내신 성적 부담이 큰 수시 경쟁에서 불리할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반드시 좋은 고교에 가야 하는 요인이 생겨난 셈이다. 초등학생부터 대치동, 중계동 학원가에서 고교 입시에 대비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김 정책실장은 "특히 일반고와 특목고가 양극화되면서, 일반고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 됐다"며 "지금 고교에 필요한 건 수평적 다양성 확대"라고 지적했다.
이어 "절대평가는 좋은 제도임에도, 현 고교 체제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이유"도 고교 서열화에 있다며 "고교 정상화, 대입 입시 정상화를 위해서라도 고교 서열화는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문재인, 누가 교육문제 해소 적임자?
현 정부 들어 급격히 심화된 '고교 서열화' 체제에 대한 주요 대선 후보의 생각은 크게 엇갈린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단순한 정책 이견을 넘어 교육에 대한 철학, 나아가 사회 정의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이어진다.
주요 대선 후보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고입 관련 공약을 보면, 박 후보는 현 체제의 유지에, 문 후보는 전면 반대에 방점을 찍었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정책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특목고와 자사고 모두 제도의 근간을 유지해야 하며, 다만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자는 입장이다.
자사고에도 사실상 찬성하는 입장이다. 박 후보는 이미 "고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도입의 취지는 바람직하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고교 평준화 강화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자율 판단에 의해 결정한다"고 밝혀 사실상 유보적인 반응을 내놨다.
문재인 후보의 고입 관련 교육 공약은 간단히 말해 '외고·자사고·고교등급제 폐지'로 대표되는 '고교체제 단순화'다. 문 후보는 과학 영재 양성을 위한 본래 취지를 되살리는 선에서 과학고는 존치시키되, 외국어고, 국제고, 자사고 등의 특목고는 폐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달 5일에는 "대학입학 전형에서 일반고를 차별하는 소위 고교등급제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고교 평준화를 위해 고교 추점 배정제를 확대하겠다고도 밝힌 바 있다.
두 후보의 공약은 공히 방향과 구체성 부분에서 비판을 받았다. 지난달 22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국민 평가단을 통해 두 후보의 교육공약을 23개 영역, 5개 등급의 학점 형식으로 평가했는데, 박 후보의 경우 고교체제 단순화 영역에서 매우 부실한 수준인 D학점을 받았다. 고교 등급제 존치는 결국 고교 서열화 유지로 이어진다는 이유다.
문 후보의 공약은 방향성은 잘 잡았으나,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 정책실장은 "문재인 후보의 고교서열화 폐지 공약은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면서도 "공약의 정교함이 떨어진다. 교육 현실을 잘 모르고 내놓은 느낌"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을 계승하려 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고교서열화 철폐를 공약했다. ⓒ뉴시스 |
문용린 "현 체제 유지" vs 이수호 "학교 서열화, 허물어야"
특히 서울시의 경우, 교육감 후보들의 공약 역시 고교 입시와 관련해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문용린 보수진영 단일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궤를 같이 한다. 문 후보는 고교다양화 정책에 대해 "큰 틀에서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겠다"며 "우리 국민의 다양한 교육적 요구를 국가가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양극화가 일어난다',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손 쳐도, 그게 두려워서 '모두 같은 교육만 받아라'고 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이수호 진보진영 단일 후보 역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큰 틀에서 같은 입장이다. 이 후보는 사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학교 서열화를 없애는 게 우선"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이 후보는 선행학습금지법 등 사교육 대책과 이전 교육감이 추진하던 혁신학교 확대 등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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