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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지지율, '노인을 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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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지지율, '노인을 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복수

[모 피디의 그게 모!] 늙음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

가당키나 한 일인가. 모두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나,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나 다른 선택은 가당치도 않다. 너무나 당연하게 박근혜는 아니어야 하고, 또 너무나 당연하게 문재인은 아니어야 한다.

사실 합리적 비교와 선택의 문제는 애초에 아니었다. 안철수가 후보 사퇴를 하고 나서 대통령 선거의 선택은 거대한 두 개의 기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박정희냐 노무현이냐로. 문재인 지지자들은 박정희를 이야기하고, 박근혜 지지자들은 노무현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봐도 비교가 가능한 어떤 기준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정치적·생물학적 후계에 대해 이토록 지지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정책이나 공약 상의 차별점이 크게 보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새누리당은 워낙 높은 지지율을 기록해왔다고, 그건 누가 후보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넘기려 해도 의문은 남는다. 유신 시절 지식인으로 혹독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은 왜 박근혜를 지지하는 걸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김지하는, 법정 최후진술로 시원하게 유신을 냉소했던 김동길은, 김대중 대통령과 정치역정을 같이 해왔던 한화갑은,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래도 여전히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무식한 촌로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해석할 것인가. 어르신들이 변절했다고 탄식하거나 노망이 났다고 비웃을 것인가. 원래 정치는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논리적 일관성이나 역사적 정당성은 그저 수사일 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아니 왜 삶의 논리와 정반대되는 듯한 선택을 인생 말년에 하는 것인가.

▲박근혜의 강력한 지지율은 늙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늙음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지난 2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 택시부 광장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 유세가 열린 가운데 박 후보의 유세를 경청하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은 글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마침 이런 고민은 요즈음의 관심사와 접점이 있었다. 80대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구상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어떤 과제를 안겨야 할까.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처럼 가슴 따뜻한 연애를 할까. 드라마 <추적자>에서처럼 막후의 회장님을 해야 하나. 자녀와 다투다 병에 걸려 화해를 할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모건 프리먼처럼 인생 멘토의 느낌을 보여줘야 할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연애 이야기는 소외된 노인들의 자기 구원 테마가 오히려 더 무력했다. 회장님 이야기는 권력자의 이야기지, 노인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 간 다툼과 화해는 지루했다. 멘토는 '빠다' 느낌이 났다.

그러다가 떠오른 주제가 '복수'였다. 그래, 평생을 걸고 헌신했던 가치가, 혹은 이것만은 빼앗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이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찢겼을 때, 세상에 복수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남기는 노인의 이야기는 어떨까. 멋진 안티히어로인거지. 분노와 복수. 어쩐지 지금, 여기에 익숙한 테마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기이한 지지율은 늙음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거대한 복수라는 것을. 사람은 외로워지면 다 비슷하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고, 자신의 능력을 기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늘 관계 안에 존재하면서, 기대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그리고 노인들에게는 보통 지혜와 멘토의 영역이 할당됐다. 풍부한 세상 경험, 지나쳐본 인생의 단계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늙음을 칭송하지 않는다. 세상은 강박적으로 젊음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칭송하며 늙음의 존재 자체를 감춰버린다. 정작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경멸을 늘어놓으면서. 늙음이 칭송받을 때가 있다면 늙었음에도 팽팽한 피부와 몸매를 유지하고 있을 때 정도일까. 지금의 늙음은 지혜의 상징이 아닌 노욕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젊은 세대가 물려받아야 할 자리를 끌어안고 앉아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청산과 쇄신의 대상인. 그렇게 사회적 약자인 늙음과 젊음은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실제로 세대 갈등에 대한 가설은 유효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윗 세대의 억압과 지분에 아래 세대가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의 젊음은 실업에 신음하며 자신을 받아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는다. 가끔은 빠른 세대 교체만이 살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는 결국 늙는다는 사실이고, 늙었어도 여전히 삶은 생생하게 살아가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고통에 신음하며 자신을 받아줄 누군가를, 어딘가를 간절하게 찾는 일은 늙음도 젊음 이상으로 절박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결국은 서로 증오하라는 외침으로 다가와 버린 대선 정국의 정서는 그래서 서글프다. 우리 사회는 노욕을 증오한다. 노인들이 세상을 거꾸로 밀고 갈까 두려워한다. 노인들로부터 배워왔던 지혜는 이제 인터넷에 다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증오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젊음에 머무르고만 싶다. 응당 누려야 할 젊음이 약하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경멸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그러나 젊음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어디 젊음만의 것이랴. 심지어 노인들이 지혜를 거세당했다 할지라도 그들에겐 누려야 할 생이 남아있을진대, 나이듦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경험과 지혜를 갖춘 늙음 또한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사라진 데에 대해서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어쩌면 그들에게 남아있는 생을 누리라는 표상이며 생생했던 젊음에 상징적으로나마 머무를 수 있다는 기호일 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남은 생을 충분히 누리고 싶다는 욕망의 대체물이다.

이것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람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따랐던 삶의 가치가 무엇이건 간에 지금 자신들을 찾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을 주는 사람에게 복종할 뿐이다. 사람은 시한부인 한에서는 대단하고 고결할 수 있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항상 대단하고 고결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오히려 격렬히 투쟁했던 사람일수록 자기 몫의 투쟁은 다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누려야 할 생을 그저 누리고 싶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고 나는 변화를 위한 내 몫을 다 했단다. 이제는 그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더 하고 내 말 들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살고 싶다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기호'의 문제다. 박근혜란 기호가 상징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문재인은 그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젊음에 그나마 남은 삶마저 빼앗겨 상징적인 죽음으로 내몰릴지도 모르겠다는 공포. 그로 인해 생기는 증오. 이것이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선점한 표밭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늙음을 다시금 공경할 수 있을까. 늙음에게서 박탈된 공경과 젊음에게서 박탈된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증오의 악순환의 시작은 어디일까. 새누리의 정권이 노인과 청년이 누려야 할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복지를 베풀 수 있을까. 늙음도 젊음도 답이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서로 증오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 부정하는 사회에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변절했다 여겨지는 원로들은 늙음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것은 늙음과 젊음이 똑같이 소외된 약자란 것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겨냥하는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의 수혜자는 누구이기에 증오의 쳇바퀴를 굴리는가. 증오와 복수를 끝내고 삶을 누리고 싶다. 지난 5년의 증오와, 복수심과, 끝내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삶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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