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만주에서 출생해 중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수일은 중국 국비장학생 1호로 이집트, 모로코 등지에서 유학한 뒤 현지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동서교역사와 실크로드를 연구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도양양한 중국인으로서의 생을 뒤로하고 1963년 평양행을 택한다. 그 뒤, 다시 튀니지 말레이 등으로 나가 연구생활을 하며 또 10년을 지낸 그는 1984년 서울에 정착했다. 그러나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돼 사형구형과 1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약 5년간 복역하다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지난 2008년엔 '문명교류 연구소'를 열고 동서양 문명교류라는 평생의 학문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25년, 북한에서 15년, 해외에서 10년, 그리고 2011년 현재까지 27년을 한국에서 살아오고 있는 정수일에게 고향이란 무엇일까?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 정 선생의 60년 만의 고향 방문기를 그 길에 동행한 차병직 변호사의 글을 빌어 싣는다. <편집자>
2011년 7월 2일,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인천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분발한 끝에 항행 시간을 20분 정도 단축시켜 오후 12시 45분경에 연길 공항에 도착하였다. 문명교류연구소 답사단 일행은 단체비자 확인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여, 탑승자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세관을 통과하게 되었다. 미끄러지며 좌우로 열린 자동문을 통해 출국장으로 나서는 순간, 갑자기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비명 같기도 하였고, 환호 같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났는가, 환청인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판단작용이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에 통곡 소리가 잇따랐다. 일순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77세의 정수일과 83세의 큰누나 정인숙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정확히 50년 만의 재회였다.
1934년 연변에서 태어난 정수일은 중국 외교관, 북한의 대학교수 등을 거치며 한국에서 문명교류사학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가 거쳐 온 파란의 사상적·지적·활동가적 역정 때문에, 반세기의 세월 동안 고향과 혈육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와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연변의 백두산 주변과 발해 유적지 답사 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의 말미에 고향 방문의 시간표를 만들어 넣게 된 것이다.
답사를 마친 다음 일행들이 귀국하고 나면 혼자 남아 고향을 찾아보고 가족들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가족들이 연길 공항에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큰누나는 허리가 굽었고 제대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동생 얼굴을 금방 알아보시겠던가요?"
"헤어진 지 50년이 됐어요. 하지만 그동안 남한 텔레비전 방송으로 자주 봤어요."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곧 헤어져야 했다. 백두산 탐방이 끝나고 나흘 뒤에나 가족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식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50년을 기다린 만남을 즉시 중단할 순 없었다. 답사단과 가족들이 가까운 곳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연변의 가족들은 한사코 사양하였다.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폐가 된다는 이유로, 장구한 세월 동안 길러 온 그리움을 아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는 큰누나의 듬성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나흘 뒤까지 살아 있겠소?" 중국공산당 창설 90주년 기념식이 끝난 다음날, 연길 공항의 정경이었다.
60년 만의 귀향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은 서구의 지배를 배제하고 아시아 땅에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1932년 만주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년 뒤 괴뢰정부의 통치자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웠는데, 정수일은 바로 그해 태어났다. 연변은 만주의 일부였으므로, 그는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생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선친 정태극은 일곱 살의 나이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고향 함경도 명천을 떠나 연변으로 이주하였다. 연변은 길림성의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정식 명칭이다. 연변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연길, 용정, 화룡, 훈춘, 도문, 돈화의 6개 시와 안도, 왕청의 2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림성의 성도는 길림이고, 연변자치주의 주도는 연길이다. 한국의 표기법으로는 '지린'·'옌지'가 맞으나, 정작 조선족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길림'·'연길'로 쓰고 발음한다.
청나라는 연변 지역을 개발하고 싶었으나, 한족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땅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의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었다. 1881년경 14세대가 이주하였고, 5년쯤 지난 뒤 밭을 갈다 여진족이 쓰던 우물을 발견하였다. 마을의 한족 청년 한 사람이 주민의 편의를 위해 농사용 용두레를 만들어 달아 공용 두레박으로 사용하였고, 그때부터 그 우물은 용정, 그 마을은 용두레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바로 용정이다. 용정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연길이다. 지금은 연길이 행정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지만, 조선족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연원의 장소는 용정이다.
▲ 용정시에 있는 윤동주 시비와 교실 ⓒ문명교류연구소 |
▲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문명교류연구소 |
정수일의 선대를 비롯한 함경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걸어 온 길을 되짚어 가면, 용정에서 북한의 회령을 마주하고 있는 삼합까지 남동쪽으로 직진하여 사오십 킬로미터에 이른다. 용정에서 출발하면 신화, 승지를 지나 선바위를 돌아가서 장재, 명동이 나타난다. 문익환과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에서 조금 더 가다가 개울을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지신이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달라자라 불렀고, 화룡현과 연길현에 차례로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용정시에 속한 작은 마을, 바로 정수일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지신 중에서도 그의 집 주변 동네를 함경도 본거지의 지명을 따서 명천 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정수일 출생지인 명천마을 ⓒ문명교류연구소 |
옛날에 살던 집은 지나간 고통처럼 허물어졌고, 몇 년 전 동생 승현이 그 터에 기와집을 올렸다. 가족들 몇몇과 소문을 듣고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고급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떠난 고향은 1961년 그가 선택한 진정한 귀국길에 앞서 잠깐 들른 적이 있었지만, 이번의 발걸음은 의미가 달랐다. 육체적으로는 단순한 방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60년 만에 고향의 품에 돌아와 안기는 귀향이었다. 가족과 고향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앉으니 50년과 100년 전 그 어름에 쌓인 기억들이 오갔다. 십여 가지의 요리를 담은 접시와 술병은 아무리 마시고 먹어도 줄어들 줄을 몰랐다. 유년시절의 이야기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식탁 위에 계속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생전에 인기척만 나도 '수일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중국 최초의 조선족 고급중학교가 연길에 설립되었다. 그는 바로 그해 입학하였는데, 다음해에 학교가 용정으로 옮겨 가는 바람에 거기서 졸업했다. 용정에 가자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학교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없어졌거나 통폐합되었을 수도 있었다. 교명이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가늠할 수 없도록 변한 현대의 용정 시내를 헤매다 용두레 우물가에 다다랐다. 작은 공터에 그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이 무언가 낭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다가서서 엿들었더니, 한국의 정치와 경제 사정에 대한 논평이었다. 그 노인들의 도움으로 학교 위치를 확인하였다.
퇴근 직전의 젊은 부교장 방송산은 2회 졸업생이라고 밝히며 나타난 낯선 사람을 시골 공무원 같은 표정으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가 북경대학에 진학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아, 그때 북경대는 정말 대단했는데요!"
학교는 이름만 용정고급중학으로 바뀌었을 뿐 옛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시절 일본영사관 건물 맞은편이었다. 지금은 용정시정부로 사용하고 있는 구영사관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영국인들이 살고 있어서 영국데기라 불렀다. 그리고 앞쪽에 영국인이 설립하고 김약연이 운영하였던 은진중학교가 있었는데, 그는 언덕 아래의 고모댁에 기숙하였다.
▲ 연급고급중학 후신인 용정고급중학 정문 ⓒ문명교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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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그의 학적부까지 찾아내고야 말았다. 낡은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바로 옆 칸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학생의 발바닥까지 전신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입학 때 165.7센티미터에 52킬로그램이었는데, 졸업 무렵에는 172센티미터에 60킬로그램이었다. 3년 동안 우등이었고, 정치경제와 평면기하의 성적이 뛰어났다. 3학년 4반 시절의 생활기록을 살펴보니, 뜻밖에 "음주를 한 사실이 있다"고 지적되어 있었다. 졸업을 목전에 두고 간 마지막 소풍에서 몇이 모여 술을 마셨다. 취하여 낮잠에 빠지고 말아 그만 담임선생에게 들키고 말았다. 다음날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는 그다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성문 내용에 멋을 부려 시를 써 넣기도 하였다. 대자보처럼 복도 벽에 붙은 반성문을 국어 교사 서헌이 읽었다. 시인이기도 하였던 서헌은 정수일이 가장 좋아했던 선생이었다. 서헌은 교무실로 가서 그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신통찮은 시 때문에 다시 야단을 맞았다.
학교 역사자료관에는 교가가 걸려 있었다. "용두레 우물가에 종을 울리며 / 새벽길 열어준 정든 요람 / 열여덟 청춘이 웃는 창가에 / 푸른 하늘이 비껴 흐르네"로 시작하는 교가는 그가 졸업한 뒤에 그의 후배 김성휘가 가사를 쓰고 동희철이 곡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가 다닐 때는 교가가 없었기 때문에 <선구자>를 대신 불렀다. 자료관의 다른 쪽 벽에는 북경대와 청화대 등의 일류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물론 그보다 오륙십 년 후배들이었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동급생 임원철과 함께 중국에서 처음 실시한 전국통일시험을 거쳐 북경대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 학교 출신으로는 최초의 북경대 입학생이었다. 그는 동방학부에서 아랍어를, 임원철은 철학을 전공하였다. 문득 입학시험을 보러 가던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불까지 싸 짊어지고, 마차를 타다가, 걷다가, 다시 기차를 몇 차례 갈아타고, 일주일에 걸쳐 겨우 북경에 도착하였다. 방 부교장은 정수일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자랑스럽게 걸어두겠다고 하면서 웃었다.
지신의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어머니 아버지와 할머니 산소부터 찾았다. 옛집 뒤로 야트막한 언덕을 조금만 오르니 세 기의 분묘가 나란히 햇빛을 받고 있었다.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동생 승현이 큰소리로 아룄다. "형님 왔어요!"
그는 여동생 인옥에게 새삼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를 물어 확인하였다. "어머니께선 말년에 누워 계시다 밖에서 인기척만 나면 '수일아!' 하고 부르셨어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그럴 리가 없다, 수일이가 왔는데'라고 하셨어요. 매일 애타게 찾으셨어요."
그래도 비록 영전이긴 하였지만 어머니와 다시 마주한 것은 43년 만이었다. 지신을 찾기 전, 버스는 삼합으로 달렸다. 불과 폭이 몇십 미터밖에 되지 않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북한의 회령이었다. 전망이 좋은 삼합의 언덕에 오르자, 회령시 전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화력발전소의 굴뚝은 여전히 상징적이었다. 삼합과 회령을 잇는 다리가 왼편 아래로 보였다. 과거 연변으로 이주해 온 조선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회령을 통해 삼합으로 건너왔다. 삼합에서 다시 지신까지 가려면 일명 오랑캐고개라고 부르는 첩첩산중의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야 했다.
▲ 삼합과 북한 회령 사이의 두만강 다리 ⓒ문명교류연구소 |
▲ 삼합 망강각(望江閣)에서 바라본 회령 전경 ⓒ문명교류연구소 |
회령 시가와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뒤 다시 버스에 올랐을 때,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 때문이었다.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하던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1961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고, 준비 과정을 거친 다음 1963년 봄에 평양으로 갔다. 미리 국적도 변경하여 완전한 조선인이 되었다.
당시 연변의 조선족들은 북한의 친인척 소재만 밝히면 도강증을 얻어 회령을 비롯한 북한의 변경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1968년, 그는 평양에서 회령으로 왔다. 도강증을 지니고 두만강을 건넌 어머니와 이틀 밤을 함께 보냈다. 흩어진 식구들이 다시 합쳐 함께 살날을 기약하고, 이틀 뒤 삼합과 회령 사이에 놓인 국경의 다리 위에서 헤어졌다. 그것이 그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작은누나 사망 소식에 서울서 온종일 울어"
성묘를 하고 논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옛집 바로 뒤편 언덕에는 승현이 심은 이삼십 그루의 백양나무들이 서 있었다. 어린시절 좌우는 조밭이었다. 햇빛을 받아 백양나무의 은빛 가지들이 반짝였다. 그 뒤로 저 멀리에는 학교와 촌정부사무소 건물이 보였다. 눈부시도록 아름답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기 전해의 가을이었다. 바로 그 언덕의 조밭에서 아버지를 도와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고단한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혀 숨을 내쉬고 있는데, 바로 학교 옆의 촌정부사무소에서 직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마구 손을 흔들어대며 무언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촌정부사무소에 설치된 그 마을의 유일한 전화로 전해 주어야 할 소식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북경대 합격 통지였다.
언덕을 내려야 집 마당에 서도 오봉산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20리쯤 떨어져 낮은 병풍처럼 마을을 지켜 주는 오봉산은 마을 사람들에겐 상징적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 삶의 작은 터전이기도 하였다. 가을 농사를 마무리하고 나면, 아버지는 매년 첫눈이 오기 전에 오봉산으로 들어갔다. 엿기름에 쌀가루를 섞어 만든 태석과 함께 몇 가지 식량을 갖추고, 보통 한번 가면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산속에서 먹고 자며 나무를 했다. 땔감은 대략 수레 한 짐 정도 분량씩 곳곳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돌아오면,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 마치 덕장의 황태같이 잘 말랐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아버지는 필요할 때마다 한 짐씩 싣고 장에 가서 팔았다. 그 돈으로 그는 공부를 하였다.
초급중학생 시절, 가끔 왕복 80리 길을 걸어 용정으로 갔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운규의 <아리랑>이나 <내 고향>을 보고 밤늦게 돌아오곤 했다. 영화는 물론, 전기나 기차를 처음 본 것은 모두 용정에서였다. 어린 시절 그에게 용정은 미래를 향한 관문이었다. 지신에서 출발하여 명동을 지나면 멀리 선바위가 보였다. 그 아래를 지날 때면 위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조선족 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곤 하였다. 선바위 못 미쳐 먼저 나타나는 마을이 승지다. 승지 다음은 장재라는 마을인데, 장재에서 산쪽으로 몇 백 미터만 올라가면 겨우 몇 가구가 모여 살던 동거우라는 동네가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에게 학문에 대한 야망을 키워 준 외삼촌을 만나러 자주 갔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나무 두세 그루만 지키고 서 있었다.
승지 입구에는 주덕해의 생가를 알리는 표지가 요란하였다. 본명이 오기섭인 주덕해는 1911년 러시아 우수리스크 부근 산간마을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승지로 왔다. 혁명과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지금 연변의 조선족 영웅으로 예우를 받고 있다.
주덕해의 공식 경력을 보면 연변의 첫 전원공서의 전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원이란 지금의 자치주장에 해당하는 지위였다. 그러나 정수일의 기억에 의하면 조선족 최초의 전원은 지신 출신의 문정일이었다. 그에게 문정일은 고향 선배이자 훌륭한 민족 지도자였다. 그는 대학시절에도 곧잘 문정일을 찾아가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감화되었다. 중국의 대학생들이 루쉰을 방문하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의 이름이나 활동의 흔적은 지금 연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문정일이 민족주의자였다면, 주덕해나 조남기는 보다 현실주의자였으며 중국친화적이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어떤 형태로든 민족을 위해 기여하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리하여 조국을 향해 두만강을 건너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주덕해 같은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엇이든 이루어내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두만강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구호를 강령처럼 내세우기도 하였다. 정수일은 그런 구호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북경대 철학과를 졸업한 임원철도 강을 건넜다. 임원철은 북한의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연구원이 외었지만,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 그때의 도강은 불법입국을 의미했다. 정수일은 노선은 같았지만 방법론에서 달랐다. 무작정 강을 건널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합법적으로 조국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하여 모로코에서 자신의 소신을 써서 주은래에게 보냈다.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떳떳하게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넘어 환국하였다.
평양으로 가기 위하여 1961년 북경으로 돌아온 다음 고향에 들렀다. 외교관 생활을 마감하며 큰자형에게는 시계를,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작은누나에게는 이탈리아제 아코디언을 선물로 사왔다. 작은누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그리고 바로 집을 떠나, 국적 변경 등의 절차 때문에 2년 뒤에 평양으로 떠났다. 작은누나 인순은 아코디언을 보물로 여겼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겨우 3년이 지난 다음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작은누나의 남편은 길림에서 제법 큰 공장의 엔지니어로 있다가 숙청당하였고, 집안의 사정은 극도로 기울었다. 살기가 어려워지자 작은누나는 그 아코디언을 학교에 팔아 생활비에 보탰다. 작은누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재작년, 그는 서울의 아파트에서 종일 울었다.
작은누나의 소식을 들려주기 위해 큰누나 인숙은 연길의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명호가 결혼하여 연길로 이사를 오자 그도 따라왔다. 50년 동안 그리워하던 동생을 공항에서 잠깐 본 뒤 나흘 동안 아파트에서 기다렸다. 점심시간에 길림에 사는 인순의 딸과 사위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모이기로 하였다. 점심시간이라면, 이르면 열두 시 늦으면 오후 한 시로 여기면 될 터였다.
낙엽귀근(落葉歸根)
그날 오전 시간을 그냥 허비하기에는 허전하고 아까웠다. 문명사가이자 답사여행가인 정수일은 그 시간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그로서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훈춘의 방천까지 다녀오기로 하였다. 방천의 끝부분은 지도의 한 꼭지점에 해당한다. 바로 정면은 두만강이 끝나는 바다,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이다.
▲ 훈춘시 방천(防川)에서 바라본 3국 국경과 두만강 철교 ⓒ문명교류연구소 |
세 국경의 풍광을 둘러보고 그대로 열심히 달렸으면 그래도 열두 시를 조금 넘겨 연길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훈춘의 발해 유적지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발해의 왕성이었던 팔련성 터를 찾기로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발해에 관심이 없었고, 정부는 아직 유적지를 정돈하지 못하였다. 한두 시간을 묻고 헤맸지만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연길에서 전화가 왔다. 늦어도 세 시쯤에는 갈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뒤늦게 작은 책자의 지도에서 팔련성이란 지명을 발견하였다. 만주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농부가 위치를 알고 있었다. 열심히 설명을 듣고 찾아 나섰으나, 역시 불발이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 그 농부를 차에 태웠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농경지에 도착하였다. 아득한 옛날, 정방형으로 정지되었던 듯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는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 훈춘시 근교에 있는 발해 동경 팔련성(八連城) 황궁터 ⓒ문명교류연구소 |
사진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돌아서려 하였으나, 그 농부를 집까지 다시 태워주어야 했다. 시계를 보니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빨리 도착하면 다섯 시에는 가족들과 50년 만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서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곁에서 위안 삼아서 한마디 하였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50년을 기다렸는데 다섯 시간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연변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그가 연변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7월 7일 오전에 역사학과 회의실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강연장에는 박문일 전 총장과 역사학과 교수들이 모였다. 강연의 주제는 정수일의 문명교류학이었다. "50년 만의 귀향은 정말 감격스러운 것이나, 무척 송구스럽습니다"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치고 있는 학문의 요체를 간명하게 정리하였다. 문명과 사회발전의 관계와 의미를 천착하며 거시적 배경과 미시적 배경을 다루었다. 근대적 문명담론을 거쳐 사이드와 토인비를 언급한 다음, 헌팅턴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문명교류론에 이르렀다. 문명교류를 통한 지향점은 보편적 문명 창조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으며, 21세기에서 문명담론은 시대의 화두란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 연변대학 정문 ⓒ문명교류연구소 |
역사학과 교수들의 질문은 너무나 진지하여 토론에만 한 시간으로 모자랐다. 고대 문명과 근대 문명에서 문명의 개념적 차이가 있는가? 문화권과 문명권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문명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적 한국의 문명이란 것이 있는가, 아니면 동아시아 문명의 일부에 불과한가? 문명의 충돌 또한 교류의 한 유형이 아닌가? 문명권과 현대의 경제체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상호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연변대학의 강연이 마무리될 즈음, 그의 고향 방문의 의미가 새삼 형상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인인 그는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자 중국 국적을 얻었다. 집에서는 조선어를,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어로 공부하였고, 중국 외교관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전인 고급중학교 때부터 러시아 어를 익혔으며, 카이로 대학에서 아랍어를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그 밖의 무수한 격정의 계기와 편력의 순간들에 대한 확인은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다만 그의 집요한 학문적 관심사가 생의 마지막 공간으로 한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경계인이 아니라 통일인이다.
가족들의 점심식사는 거의 정확히 오후 다섯 시에 시작되었다. 큰누나의 표정에 섭섭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한두 조카들에 대해 그가 측은한 심경을 내비쳤다. 늦게 시작한 만큼, 늦게 끝났다. 자정까지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최근의 저서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에서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말을 썼다. 낙엽이 제 뿌리에 떨어지듯 인간 또한 마지막에는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의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엽생지(落葉生地), 즉 그때 살고 있는 곳에 떨어져야 하는 불가피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경우는 이제 그리 흔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그러하다. 바로 그의 경우다. 그는 왜 50년 만에 고향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고향에는 언제 갈 수 있는가. '귀근'과 '생지'를 상극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상생으로 승화 시키는 슬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 한 말이다. 그는 반세기 만에 귀향하였지만, '귀근'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자신만이 아는 슬기를 터득하였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7월 9일, 다시 연길 공항에 섰다. 토요일에 도착하였다가 토요일에 떠나게 되었다. 가족들은 다시 출국장 앞에 섰다. 큰누나는 눈물을 흘렸다. 50년 만에 소원 하나를 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이제 헤어지면 정말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금방 또 올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책임지고 1년 안에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 백두산 천지에서 답사단 일행(뒷줄 좌측에서 세번째가 정수일 선생) ⓒ문명교류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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