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하고, 만나자고 하면, 별로 빼지 않는다. 가능하면 다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건 윤제균의 품성 때문이다. 윤제균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을 때'를 잊지 않는다. 자신이 어려웠을 때(첫 작품 <두사부일체>를 찍었을 때),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낭만자객>으로 평단에서 집중포화를 받았을 때), 누군가 늘 자신의 옆에 있어 줬으며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 줬던 것을 기억한다.
사람은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살 수 없으며 흥할 때든 망할 때든, 잘난 때든 못난 때든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윤제균은 감독이기 이전에 그냥 '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꾸지만 스필버그의 명예와 부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스필버그처럼 죽을 때까지 영화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윤제균을 만났다. 국내 영화계에서 이미 지나갔다고 간주하는 '프로듀서 전성시대'를 그가 다시 열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급으로 불리는 편당100억 원대의 영화 4편을 만들었거나 만들어 가고 있다.
단독 인터뷰이기를 원했으나 이미 그는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한 터였다. 사람이 무르고 착해 터져서. 그래서 나 역시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딴 데서 본 얘기의 반복이라면 보지 않으셔도 된다. 그래도 윤제균과 그의 영화, 그가 얽힌 영화판을 사랑한다면, 다시한번 보시길.
오동진 : 관여하고 있는 영화가 너무 많다. 일단 죽 한번 나열해 보시길. 뭐, 필기시험은 아니지만.
윤제균 : (웃음) 일단 7월 말에 개봉하는 스피드 영화 <퀵>이 있다. 그리고 2주 후에 해양 SF괴수영화 <7광구>가 개봉한다. 당장 선보이는 것은 이 두 편이다. 이명세 감독의 첩보스릴러 <미스터K>는 하반기에 촬영이 들어갈 것이다. 요기까지는 내가 프로듀서, 곧 제작자로 관여하는 작품이다. 내가 직접 연출하고 제작하는 <템플스테이>는 현재 스케줄상 아무래도 내년 초에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해운대> 윤제균 감독 ⓒ오동진 |
윤제균 :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맞다. 요즘 잘 못 잔다. 이중 한편이라도 잘 안되면 바로 영화판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규모와 상관없이 그 어떤 프로듀서나 감독 모두가 마찬가지로 겪는 일일 것이다.
오동진 : <해운대>로 크게 쓰고, 크게 성공했다. 그 경험이 또 한 번 큰 영화들을 기획하게 된 건 아니고?
윤제균 : 그건 아니다. 물론 <해운대>의 학습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들이 편당 100억 원대가 넘어가는 이유는 다 하이 테크놀로지 영화여서 그렇다. 나는 만들고 싶거나 돈을 벌 수 있는 작품이라서 이 영화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장르의 작품이어서 택했다. 해저 괴물 이야기 한편쯤은 우리나라 걸로 보고 싶었다. 스피드 액션도 이제 우리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첩보 스릴러도 이제는 보다 세련되고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올 때가 됐다고 봤다. 내가 만들 <템플 스테이>는 할리우드의 <미이라>나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이다. 액션 어드벤쳐도 우리나라 것으로 보면 맛이 다를 것이다.
오동진 : 그럼 하나하나 본인이 만들어서 본인이 성공하지, 왜 다른 감독들에게 나눠줬나?
윤제균 : 나눠 준 것이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 나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코믹한 영화에는 꽤 적격인 인물이다. 그렇지 않은가?(웃음) 하지만 첩보나 스피드 액션, SF 등에서는 싱크로율 100%가 안 나온다. 가수 '싸이'가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했다. 성공의 전제조건은 주제 파악이라고.(웃음) 다 자기가 잘하는 장르가 있고 특기가 있다. <7광구>의 김지훈, <퀵>의 조범구, <미스터K>의 이명세 감독분들이 바로 그 장르에 딱 적격이자 장인인 분들이다. 그리고 영화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역할을 나눠가며 하는 공동의 작업예술이다. 이 영화들을 휼륭한 선후배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오동진 : 좋다. 그렇다면 위의 4편 중 어떤 작품이 가장 성공했으면 좋겠는가. 솔직히!
윤제균 : 솔직히 말해서! 모든 작품이 다 성공했으면 좋겠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와 같은 진부한 표현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퀵>같은 경우는 투자를 받을 때까지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마음고생을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게 완성한 만큼 그 보상을 받았으면 싶다. 보상이란,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7광구>는 한국 최초 격에 해당하는 3D 영화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됐다고 생각해 봐라. 국내에서는 3D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성공의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며 꼭 성공했으면 싶은 영화다. 이명세 감독의 작품, 내 영화도 같은 맥락이다.
▲ 8월 4일 개봉하는 한국 최초 블록버스터 3D 영화 <7광구> (감독 김지훈, 제작 JK필름) |
윤제균 : 여기에서 바로 <해운대> 학습효과를 거론할 때다. <7광구>는 <해운대> 전에 기획됐던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얘기한 것처럼 자신이 없었다. 석유시추선에서 벌어지는 괴물과의 사투 얘긴데, 이걸 도저히 어디서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석유시추선에 가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거기서는 촬영이 불가능했다. 국가 기밀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걸 세트로 만들어야 할 텐데 아휴 그게 말이 쉽지 어디 쉽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최대 고민이었다. 답이 안 나왔다. 그런데 <해운대>를 하면서 할리우드 특수효과 회사와 물 CG와 관련된 기술이전을 약속받았고 또 그렇게 했다. 이제 우리는 지상에서 촬영해도 그게 마치 물 위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CG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됐다. 그런 경험이 바탕이 돼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 이번 <7광구>다. 부디 기대하셔도 좋다.
오동진 : 4편 모두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 배급한다. 특정 대기업과 관계가 너무 두터운 것은 아닌가?
윤제균 : '대기업 자본 논리에 너무 종속되는 것이 아니냐'로 해석해도 되는가. 무슨 의미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잘 알겠다. 물론 대기업과 일을 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간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다. 대기업이 지금까지 국내 영화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잃었다. 아직 그 수백 억 원의 돈을 제대로 리쿱(recoup)해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손해를 무릎쓰고도 계속 투자를 해왔다. 그런 차원에서 대기업이 특정 제작사와 일을 하고, 또 자금을 투여하면서 일정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 영화사를 지나치게 자본의 색깔만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동진 : CJ와 일을 계속해 가는 게 피곤하지 않다?
윤제균 : 피곤하지 않다. 난 괜찮다.
오동진 : '요즘은 윤제균 시대다, 윤제균이 대세인 시대다'라는 말들을 한다.
윤제균 : 과찬이고 부담스럽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영화 한 편이면 바로 아웃될 수 있는 게 영화판의 생리다. 그냥 지금 주어진 기회를 열심히 활용할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동진 :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인데도 관심은 당신한테만 몰린다. 감독한테는 아니고. 미안하지 않나?
윤제균 : 맞다. 그 점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건 지금 초기여서 그렇다. 영화가 개봉되고 관심을 모으고 등등 하면 언론들도 다 주인공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말 잘했다. 이 기회를 통해 다른 감독분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정말 미안하다고.
오동진 : 10년 후 당신은 제작자로 남을 것 같은가, 아니면 계속 감독일 것 같은가.
윤제균 : (별로 괜찮은 질문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내가 스티븐 스필버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 근데 이런 얘기를 하면 또 오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스필버그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어쨌든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그는 어린애 같다. 나는 그런 스필버그이기를 원한다. 영화에 대해 꿈을 꾸는 아이 같은 사람.
오동진 : <해운대>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제균 :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표정으로) 벌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진 엄청난 빚을 갚느라고 다 썼다. 지금 내게는 딱 0원이 있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편하다. 돈은 너무 없어도 힘들고 너무 많아도 불편하다고 배웠다. 내겐 지금 일이 있다. 그냥 그게 행복할 뿐이다.
▲ 윤제균 감독과 오동진 영화평론가 ⓒ오동진 |
요즘의 윤제균을 보고 있으면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일군의 프로듀서들이 생각난다. 강우석과 차승재 등등. 그들의 영향력은 아직 줄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윤제균을 보고 있으면 역사의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영화는 늘 새로움을 쫓는다. 영화는 항상 새로워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입성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윤제균은 2010년대 영화계의 새로운 바람이다. 그가 만드는 영화들, 직접 연출할 영화들에 눈길이 가는 건 그 때문이다.
(*이 글은 대중문화 전문사이트 엔터미디어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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