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둘째 날 - 오후] : 샤루허, 위원댐, 북중 국경
샤루허의 냉면과 밀무역
8월 4일 오후 수풍댐 앞 선착장에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점심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주변에 식사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늦은 점심을 먹더라도 이왕이면 지안(集安) 가는 길에 있다는 샤루허(下路河) 조선족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다, 한글과 한자가 병기된 간판들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인의 간판이 걸려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우리말이 통하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 샤루허의 조선족 식당. ⓒ황재옥 |
냉면과 몇 가지 요리를 시켰다. 냉면 맛이 평양의 옥류관이나 서울의 유명한 몇몇 '맛집'의 평양물냉면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하루 반 만에 먹는 김치 때문인지 불만이 없었다. 단둥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족 식당에서는 당연히 김치가 나왔다. 서울에서 먹는 김치만큼 빨갛거나 양념이 골고루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시원하고 칼칼해서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음식 중 맛이 좋았던 것은 근처 산에서 캔 고사리였다. 고사리가 통통하고 줄기가 얼마나 실하던지 볶아놓았는데 맛과 향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오는데 식당 밖에 서있던 건장한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는지 묻고는, 자신은 조선족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사는데 샤루허에 일보러 왔다고 했다. 자신은 북한과 밀무역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고 했다. 불법인줄 알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요사이는 감시가 심해졌단다.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고, 옷차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밀무역으로 돈을 제법 벌어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밀무역을 하고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북한과의 밀무역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는 것인데, 중국이 그만큼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위원발전소와 북한의 전력 사정
늦은 점심을 먹고 샤루허를 떠난 우리는 오후 4시경 압록강의 네 개 발전소 중 하나인 위원발전소 부근에 도착했다. 위원발전소를 보려면 지안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강 쪽으로 좀 들어가야 해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먼발치에서나마 위원발전소를 보고자 한 것은 압록강 수계에 발전소가 네 개나 있는데 일정상 운봉과 태평만 발전소를 못가기 때문이었다. 수풍 외에 최소한 한 개는 더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위원발전소를 찾아갔다. 더구나 수풍발전소 외에 위원발전소도 북한이 관리한다는 점에서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 관리한다니 어쩐지 남의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북중 접경지역을 불원천리 찾아 간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닐까.
▲ 위원댐. ⓒ황재옥 |
위원댐과 발전소는 지형지세가 험준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태블릿PC로 구글 위성사진을 띄우니, 주변의 산세 때문인지 압록강의 모양이 매우 꾸불꾸불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일제 때 지리 교과서에는 위원 부근 압록강 수역을 '뱀대가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은 이 지역을 '호랑이 입'이라는 뜻의 지명을 붙여 놓았다.
보는 눈에 따라서 뱀대가리 같기도 하고 호랑이 입처럼 보이기도 하는 지점에 20여 년 전 위원댐과 발전소가 새로 생긴 것이었다. 위원발전소는 중국과 북한의 합작으로 1990년에 완공되어서 그런지 댐 자체가 수풍댐에 비해 아주 새것처럼 보였다. 예전의 위원 지역은 댐 건설로 1990년에 수몰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을 이주시켜 새롭게 조성한 신(新) 위원이 댐 아래쪽, 북한 측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 신위원 북한마을. ⓒ황재옥 |
그런데 댐 아래쪽 중국 쪽은 시멘트 옹벽을 높이 쌓아 놓았지만 북한 쪽은 둑이 없었다. 강물이 갑자기 불어날 경우 건너 마을로 물이 넘어 들어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단둥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었다. 강 건너 신의주 쪽은 신의주 부두를 제외하고는, 압록강이 범람하면 강물이 거침없이 그냥 마을로 넘어 들어 갈 수 있는 지형지세였다. 이러니 북한 지역에 비가 조금만 세게 내려도 수해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위원댐과 발전소를 바라보면서 북한의 전력사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해방직후 북한지역 발전용량은 152만kw, 남한 전체의 발전용량은 지금 위원발전소의 발전용량의 절반정도인 20만kw밖에 안되었다. 북한이 남한보다 7.6배의 전기를 생산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을 뿐 아니라 천양지차가 난다. 한국은 7000만kw 이상의 발전용량을 가지고 있고 필요에 따라 이를 풀가동할 수 있다. 발전용량이 해방직후에 비해 350배 늘어 난 셈이다. 그래서 폭염이 계속되더라도 전기를 부족하지 않게 공급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의 발전용량 자체는 770만kw 전후로 파악되고 있고, 그 중 35~40% 내외의 가동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즉 약 300만kw 정도의 발전용량만이 풀가동되는 셈이다. 해방직후에 비해 외형은 5배 늘었지만 실제로는 약 2배 늘어난 셈이다. 화력발전소의 경우 석탄과 석유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풀가동이 안 되고, 수력발전소의 경우 여름은 괜찮지만 겨울에 물이 두텁게 얼면 물을 방류할 수 없어 발전기가 쉬어야 한다. 그래서 인공위성으로 사진을 찍으면 휴전선 이북이 밤에는 캄캄하게 나오는 것이다.
▲ 미 항공우주국(NASA)이 지난 2003년 촬영한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 ⓒNASA |
발전용량 얘기가 나오자 1970년대 말부터 남북관계 일선에서 일했던 한 일행이 북한은 전기 200만kw를 미국과 한국에 요구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1차 북핵위기' 해결을 위해서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북미 제네바기본합의'의 핵심 요지는 북한이 핵활동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이 책임지고 200만kw짜리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는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미국에 200만kw 전력생산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북한이 200만kw 송전문제를 제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여론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남북은 50만kw 규모의 송전 방안을 논의하다 2001년 초 이후 유야무야되었다고 한다.
북한이 요구한 200만kw는 수풍(70만kw), 운봉(42만kw), 위원(39만kw), 태평만(19만kw) 발전소의 전력량을 모두 합친 170만kw보다 30만kw가 더 많은 양이다. 4개의 발전소가 170만kw를 생산해도 중국과 나누어 써야 하기 때문에, 압록강 수계에서 생산되는 전기 중 북한이 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85만kw정도 일 것이다. 현재 북한 발전용량의 1/4 정도이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북한은 200만kw 정도의 전기가 절실하다는 얘기가 된다. 앞으로 정세 변화에 따라 북핵 6자회담이나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협상이 본격화되면 북한은 200만kw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지금부터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북중 국경선에 대한 오해와 현실
한 곳을 방문하고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차 안에서는 '약식'(略式) 세미나가 열린다. 지안까지 가는 동안 북·중국경선이 언제 어떻게 획정(劃定)되었는지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오갔다. 우리는 이렇게 앉으나 서나 세미나하고 토론을 하면서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했다. 말 그대로 차 안은 '이동 세미나장'이었다.
우선 우리가 이틀 동안 계속 바라보면서 온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지만 국제법상 공유수면(公有水面)이다. 북한만의 것이 아니라 절반은 중국 것이다. 그래서 압록강에 세워진 발전소들은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전기를 나누어 쓴다는 얘긴데, 관리 책임은 나뉘어 있다. 수풍(水豊)과 위원(渭原)발전소는 북한이 관리한다. 반면, 운봉(雲峰)과 태평만(太平灣) 발전소는 중국이 관리한다. 그 점에서는 두만강도 마찬가지다. 공유수면이기 때문에 배 운항, 고기잡이, 용수사용 면에서 어느 한 쪽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이렇게 두 나라가 같이 나누어 쓰고 있다는 얘기는 백두산의 경계 얘기로까지 발전되었다. 우리 주변에는 백두산 천지는 물론 백두산의 중국 쪽 기슭까지도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국제법상 그럴 수가 없다. 서로 붙어 있는 두 나라가 공유하는 산이나 강은 반을 나누게 되어 있다. 유럽에 그런 경우가 많은데, 다뉴브 강은 여러 나라가 공유하고 있고, 알프스 산도 여러 나라가 공유하고 있다. 두부 자르듯이 딱 자를 수가 없을 때 적용하는 국제법적 기준들도 있다.
청나라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시절인 1712년(조선조 숙종 때),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에서 조선쪽으로 한참 내려온 지점에 세워졌다. 그래서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가 서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원래는 백두봉)과 천지는 완전히 중국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뀐 것이 1962~1964년의 일이었다.
현재의 북중 국경선, 즉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의 경계선은 1960년대 초에 그어졌다.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김일성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명의로 '조중국경선조약'이 체결됐다. 북한과 중국은 '조중국경공동조사위원회'를 설립해서, 강 가운데 섬들과 모래톱의 귀속문제를 확정하자는 내용을 그 조약의 제4조에 규정했다.
'조중국경선조약' 제4조의 규정에 따라 '조중국경공동조사위원회'가 양국의 국경지역을 답사하면서 말뚝을 세우기도 하고 강 가운데 섬들과 모래톱들의 귀속을 확정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천이(陳毅) 중국 외교부장과 박성철 북한 외교부장이 '조중국경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후 북한과 중국은 1972년과 1975년, 두 번에 걸친 공동조사를 거쳐 섬과 모래톱 61개중 13개는 중국 소유로 하고, 48개를 북한 소유로 확정했다. 황금평이 중국 쪽에 훨씬 가까운데도 북한 소유로 확정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북중 양국은 동쪽 자암봉에서 서쪽 제운봉을 경계로 백두산을 반분했다. 백두산 천지도 그 때 나뉘어졌는데, 54.5%는 북한이 영유하고, 중국은 45.5%를 차지하면서 분할됐다.
국경문제에 있어 북한이 유리하게 협상을 하게 된 데는 중소분쟁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1950년대 중반 시작된 중소분쟁이 1960년대 초반 들어 심화되면서, 중국의 최인접국인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커졌다. 그리고 당시 북·중관계도 매우 긴밀한 상태였다. 북한은 이 같은 상황을 활용하여 국경선 협상을 비교적 유리하게 끌고 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중소분쟁의 와중에 발휘된 북한의 절묘한 외교전술의 성과인지, 아니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중국 외교전략의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중국 외교의 전통과 속성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한편, 중국의 문화대혁명기(1966~1976) 초반인 1967년부터 북한과 중국 사이에 갈등관계가 돌출하면서 북중 국경선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홍위병들은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석 주덕해(朱德海)가 김일성과 짜고 북중 국경선 획정과정에서 백두산 천지를 북한에 4.5% 더 떼어 주었다고 주덕해를 박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홍위병들은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을 잃었다", "창바이산을 팔아 넘겼다"면서 1962년의 '조중국경선조약'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주덕해는 복권되었지만, 당시 중소분쟁이 기회가 되고 중국과 북한의 우호적인 분위기 덕택에 북·중국경선이 북한에 유리하게 획정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만주의 음식 '한류'
오후 일정을 소화하고 해가 거의 다 저물 무렵 우리는 한 때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자리 잡았던 지안에 도착하였다. 가는 동안 내내 펼쳐진 넓은 평야는 압록강 중류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중국은 참으로 큰 나라임을 실감했다. 도시와 도시 간 이동을 하는데도 자동차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예전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얼마나 힘들고 까마득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지안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라는 곳을 찾아 나섰다. 버스 기사가 가르쳐 준 곳인데 한국식으로 고기를 구워 먹는 집이라고 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도심에 성곽의 일부로 보이는 돌 축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것이 국내성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너무 반가웠다. 차곡차곡 일렬로 쌓아진 돌을 가까이서 만나니, 그 옛날 우리 고구려인들의 기개가 느껴지는 듯 했다. 지금 이 자리까지 우리 선조들이 생활의 터전을 닦아 만주를 호령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 지안 시내의 식당. ⓒ황재옥 |
식당이 가까워지면서 익숙한 냄새가 대로변까지 풍겨 나왔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 들르고 차 타느라 피곤했지만 '고향의 음식 냄새' 때문인지, 피곤한 와중에도 입맛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식당에 들어서니 많은 중국인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중국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음식을 먹으면서 고함을 지르듯이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이다.
결국 우리는 길 건너에 있는, 조용하고 에어컨도 나오는 중국 스타일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비록 객지에서 고향의 맛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변방도시까지 '한국스타일'의 음식이 자신들의 '중국스타일'보다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 우리의 기분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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