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를린의 선택
어쩌면 이 영화는 선정적인 설정 때문에 구미를 당기는 지도 모른다. 아니,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이라는 타이틀과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타비아니 형제의 작품이라는 정보를 빼면 선정적인 설정으로 구미를 당기는 것이 맞다. 이 영화의 연기자는 죄수들이다. 다큐멘터리도 아니면서, 재소자들이 영화의 거의 모든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한다. 종신형을 비롯해 각종 중형을 받아 장기 복역 중인 남자 죄수들이, 엄중 경비된 감옥 안에서, 수감 상태 그대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이 영화는 실제 상황은 이렇다. 감옥 내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된다. 무대에 오르기를 바라는 죄수들은 감옥 내 오디션에 응시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오디션부터 연극 연습과정, 그리고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영상화한다.
2.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그렇다면 이건 그냥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올리는 과정에 대한 메이킹 필름. 이 영화의 재소자들은 연극 <줄리어스 시저>의 배우이지,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재소자들은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제 상황이 곧 극적 설정이다. 재소자들은 각각 '연극 연습에 임하는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카메라는 일어나는 상황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다시 '연출'해서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방송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보자. 대문을 두드리고 마중나오는 사람에게 바로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사전 협의없이는 찍을 수 없다. 미리 전화를 해서 "제가 문을 두드릴테니 자연스럽게 나오셔서 놀랍고 반가운 듯 인사를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약속을 해놓은 뒤, 마치 예상치 못했던 양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연출된 사실'이다. 다큐멘터리에 이런 자잘한 연출은 수도 없이 세세하게 숨어 있다.
그런데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서는 반대다. 사전 협의를 통한 연출이 아니라, '사후 재구성을 통한 연출'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신하가 시저에게 아첨을 하는 장면이다. 신하는 시저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다. 이 장면을 연습하면서 두 죄수 배우는 실제 자신들의 관계와 연극 속 인물들의 관계가 비슷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 야비한 자식, 너 실제로도 내 뒷얘기 하고 다니는 거 다 알아. 이건 연극 속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연극 연습은 실제 인물들간의 격한 감정 대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영화가 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이 죄수 배우들 간의 갈등을 '사후 재구성'하여 영화적으로 찍는 것이다. 처음 싸움이 일어나는 상황을 그대로 기록하고 따라가는 카메라가 아니다. 그 상황을 '대본화'하여, 영화적 콘티로 만들어서 당사자들에게 그 대립을 다시 '연기'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큐적 상황은 유지가 되면서 작품 안에서의 모든 컷이 공들인 극영화와 같은 톤으로 작업이 된다. 이러기 위해서 죄수 배우들은 자신이 실제로 했던 반응을 다시 실감나게 '재연'해야 한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이보다 더 어색할 수 없는 그런 모습들이 연출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배우'라는 일을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빠졌던 감정상태를 다시 재생하여 연기로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들이 하고 있는 연습의 요체가 아닌가. 그들은 그러므로 어색하지 않게, 자신의 상태를 진지하게 탐색하여 연기로 만들어 낸다. 이것이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에서 극 영화로 진화하는 방식이다. 첫째, 다큐적 상황을 시나리오화 한다. 둘째, 그 시나리오를 실제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의 재연을 통해 극화해서 찍는다. 이 장르 실험의 대상이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방식이다.
'인간은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이런 작업 방식을 문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장르가 '실제로 사는' 그 순간을 촬영한 것이라면, 이 영화는 '회고담으로 재구성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일기를 쓰면서 지난 하루를 복기하듯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 ⓒBIFF 제공 |
3. 연극과 영화
이 아이디어의 출발은 '배우'라는 정체성을 재능있는 특별한 사람들의 '직업'으로 바라볼 것인가,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해봄직한 '예술'의 한 형태로 바라볼 것인가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TV와 영화의 스타들로 배우를 한정지을 때, 배우는 특정 직업군의 일인 것만 같다. 그러나 연극은 누구나 어릴 적 교과서에서부터 접했다. 아니, 역할 놀이는 아이들 소꿉장난 때부터 모든 놀이의 근간이다. 누군가를 모방하여 표현하는 일은 인간이 늘 하고 있는 종류의 일이다. 연극은 연기라는 것을 그림 그리기나 노래 부르기 같이, 누구나 즐겁게 할만한 예술 형태로 바꿔놓는다.
연극의 목표는 연습을 통해 구축된 진실한 순간이다. 그 순간은 공연을 하는 순간 빛나게 존재하고 사라진다. 그 빛나는 순간을 위해 배우들은 연습을 거듭하면서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새롭게 발견해 간다. <줄리어스 시저>를 연습하면서 죄수들이 발견해나가는 것 또한 그렇다. 정의와 대의, 음험한 권력, 신의와 배신, 돌이킬 수 없는 살인 등이 담겨 있는 이 희곡을 탐색해가면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의미, 미웠던 사람들, 소중했던 사람, 돌이킬 수 없는 잘못…. 그들은 연습과정을 통해 생기가 피어나고, 이 생기는 교도관들의 마음까지 움직여서 다음 씬을 연습하기를 기대하느라 자유시간을 살짝 늘려주게 만든다.
한편 영화는 그렇게 존재하게 된 빛나는 순간을 포박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매체다. 알랭 들롱이 지금 어떤 모습의 호호할배가 되었건 간에, 우리는 <태양은 가득히>에서 욕망의 함정에 빠진 퇴폐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젊은이로 그를 기억한다. 연극. 존재가 순간에 머무르기에 더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영화. 소유되어 재생할 수 있기에 더 가치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그 두 가지 가치를 같이 담아낸다. 갓난 아기가 자랄 때 부모에게는 매 순간이 경이다. 성장과정에서 바로 그 때에만 존재하는 귀여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죄수들의 6개월 간의 연습과정도 그와 같다. 관객에게는 이들이 '연기하기'의 감동을 깨우쳐가면서 그 순간을 다시 극으로 표현하는 일이 또 하나의 감동이다. 이 작품의 영화적 욕망은 근사한 결과를 포박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을 극 영화의 방식으로 포박하는 데에 있다.
4. 혼성 장르의 성패
사실 이 실험은 타비오니 형제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배우들의 실체를 그대로 캐릭터로 들여오는 일에는 유구한 전통이 있다. 한국 시트콤 특유의 배역 이름에 배우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일도 그 전통에서 분화된 끝가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극을 접목시키는 데에도 유구한 전통이 있다. 다큐멘터리 연극 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혼성 장르물도 늘 있어왔다. 이런 혼성 장르의 성패는 결국 규칙과 목표에 따라 갈린다. 장르를 깬 만큼, 어떻게 그 작품만의 규칙을 세워 관객과 소통하는가, 그리고 그 새로운 규칙은 어떤 목표를 향해 수렴하는가.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연습을 통해 이룩한 결과(즉, 본 공연 때의 배우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그 과정(6개월 간의 연습 기간)을 재구성한다. 이 영화의 죄수들은 직업인인 아니기에 뿜어져 나오는 진실이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점점 자신의 삶이 베어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엉망이 된 표정, 깊은 후회, 무엇인 옳은지 알 수 없는 혼란, 어쩔 수 없었다는 단호함, 일단 이겨야 하는 짐승의 강인함. 그리하여 '죄수'라는 선택은 선정적 홍보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삶에 대한 갈망, 후회, 유보로 가득 찬 집단이 적극적으로 예술에 임하면서 보이는 변화. 바로 그것을 사로잡기 위해 중범죄 재소자들이 선택된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그들은 각자의 감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연극을 경험하기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죄수는 읊조린다. "예술을 경험하고 나니 이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보통의 영화는 아름다운 결과를 위해 지옥같은 과정을 거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과를 위한 희생으로 찬양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의 제작 과정 자체가 성장이며 예술적 결과다. 그리고 이는 상업상품으로서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영화라는 장르가 여전히 태고의 연극연습과도 같이 인간적 성장의 산실이 될 수 있다는 증명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는 왜 영화인지에 대한 이유를 잊어왔을까.세상은 마치 고시 준비 중인 학생을 보듯 감독 지망생을 본다. 유명 감독만 되면 밀린 빚을 모두 갚아버릴 거라는 기대와, 그런데 실패하는 사람이 대다수더라는 냉소를 섞어서. 그러나 영화는 극소수의 천재를 위한 성공으로 가는 급행열차만은 아니다. 원래 영화는 사람의 설렘과 성장을 담을 수 있는 매체였다.
왜 인간은 예술이라는 밥도 되지 않는 빌어먹을 짓을 좋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예술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두 할아버지는 참 덤덤하게 그 탐구의 결과를 2012년 부산에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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